명시감상

나를 울린 시 (21) - 해빙기

펜보이 2007. 7. 14. 09:11
 

 해빙기(解氷期)


 박이도

  

  봄밤엔 산불이 볼 만하다.

  봄밤을 지새우면

  천 리 밖에 물 흐르는 소리가

  시름 풀리듯

  내 맑은 정신으로 돌아온다.


  깊은 산악마다

  천둥같이 풀려나는

  해빙(解氷)의 메아리

  새벽 안개 속에 묻어 오는

  봄 소식이 밤새 천 리를 간다.


  남 볼래 몸풀고 누운 과수댁의

  아픈 신음이듯

  봄밤의 대지엔

  열병하는 아지랭이

  몸살하는 철쭉

  멀리에는 산불이 볼 만하다.


  노오란 해 솟으면

  진달래밭 개나리밭

  떼지어 날아온

  까투리 장끼들이 울음으로

  우리네 산야엔

  봄 소동 나겠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은 겨울의 끝자락을 잡고 온다.  소생한다는 것은 되살아난다는 말이다.  모든 생물은 한 겨우내 얼음 밑에 죽은 듯이 있다가 누군가의 부름을 받고서 일순간에 일어선다.  그런데 봄은 반드시 겨울을 등지고 온다.  아니, 봄은 저 혼자 오기가 싫어서인지 한사코 겨울을 달고서야 온다.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에 내팽개치듯 겨울을 버린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겨울 없이 어찌 봄이 존재할 수 있으랴.  그러나 일단 부름을 받은 봄은 언제 겨울에 눌려 지냈냐싶게 꽃놀이를 일삼으며 희희낙락한다.  긴 잠에서 깨어난 뭇 생명체들이 지어내는 환희의 합주를 지휘하면서 봄은 마침내 겨울의 사슬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겨울의 겨드랑이 밑에 숨죽여 지내다가 제철을 만나 온갖 현란한 색채로 세상을 꿈결처럼 아름답게 꾸미는 봄은 필경 요정이자 요부이다.  세상을 견고하게 응결시킨 겨울의 속살을 은밀히 간지럽혀 조금씩 몸을 풀게 만드는 봄의 간교함을 눈 여겨 보라.  겨울을 간단없이 녹이는 봄의 자태야말로 요사스러움의 극치가 아니랴.  이 세상에 봄의 애교에 넘어가지 않는 겨울은 없다.  그렇다.  봄은 제아무리 추운 겨울이라고 할지라도 기어코 물리치고 온다.

  박이도 시인의 “해빙기”는 겨울과 봄이 교차하면서 펼쳐지는 계절의 변화를 꿈결처럼 묘사하고 있다.  마치 그림을 보듯 아니, 아름다운 예술영화의 한 장면처럼 전개되는 봄의 시상은 시가 존재해야 할 이유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겨울과 봄이 자리를 교대하는 정경을 이처럼 깊은 심미안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역시 시인의 감수성이 아니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굳건하게 결속되어 있던 동토가 서서히 녹는 가운데 꽃이 피고 새순이 돋아나며 새들이 노래하는 따위의 자연의 외적인 변화를 설명조로 노래하는 시는 너무도 많다.  ‘해빙기’는 자연의 변화를 지켜보며 감정의 동요를 일으켜 경이로움과 찬탄의 언어로 시종하는 상투적인 형식의 서정시와는 어딘가 다르다. 

  한마디로 봄의 속살을 훔쳐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만큼 은밀한 시선으로 계절의 변화를 더듬어 확인해 가는 시인의 감성적인 촉수가 놀랍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실조차도 감촉하는 그 섬세한 시적인 상상력이야말로 예측 못할 감동을 만들어내는 요술지팡이와 다름없다.  이처럼 세상에 대해 전혀 새로운 눈을 뜨도록 유도하는 시와 만날 때 우리는 거리낌없이 그 언어의 마술에 걸려든다.  그로부터 맛보는 흔쾌한 감정은 물질적인 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봄밤엔 산불이 볼 만하다./봄밤을 지새우면/천 리 밖에 물 흐르는 소리가/시름 풀리듯/내 맑은 정신으로 돌아온다.’

  시인의 봄은 밤으로부터 오는가.  의표를 찌르듯이 시작부터 남다르게 느껴지는 시인의 눈은 ‘봄밤’의 ‘산불’을 통해 봄을 본다.  ‘꽃이 피고 새가 우짖는’ 식의 통념적인 표현이 아니다.  산불과 봄은 어떤 연관성을 가지는가.  산불은 필경 언 땅속까지 파고들어 나무뿌리 끝에 남아 있는 얼음마저 녹이며 새로운 계절을 재촉하는 봄의 전령인 셈이다.  말하자면 산불은 겨울을 내몰 듯 쫓아내고 싱그러운 봄을 불러들이려는 계절의 성급함을 상징한다.   산불을 지르는 것은 봄의 전령이다.  산불에 취해 지새우다 보면 차가운 얼음장이 녹아 흐르는 천 리 밖 개울물 소리를 듣는다.  이미 봄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천 리 밖의 물소리를 듣는 것은 청각이 아니다.  신비스러운 감성의 작용이다.  얼음이 녹아 흐르는 물소리를 듣다보면 어느새 겨울이 떠날 채비를 서두르고 있음을 깨닫는다.  천 리 밖의 ‘물 흐르는 소리’에 그만 겨울처럼 꽁꽁 얼어붙게 만드는 심신의 온갖 시름이 일시에 달아나고 본디 내 맑은 정신을 회복한다.  봄은 이처럼 나 자신을 포함하여 온갖 생명체에 똑같은 부피의 삶의 환희를 돌이켜 주는 것이다. 

  그렇다.  봄의 기운에 밀려 일제히 소생하는 뭇 생명체들처럼 봄은 어김없이 인간에게도 삶의 의욕을 가져온다.  봄이 왔음을 느끼면서 비로소 자신을 짓누르던 어떤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욕구를 되찾게 되는 것이다.  ‘맑은 정신으로 돌아온다’는 표현은 삶에 대한 새로운 욕구를 시사한다.

  ‘깊은 산악마다/천둥같이 풀려나는/해빙의 메아리/새벽 안개 소에 묻어 오는/봄 소식이 밤새 천 리를 간다.’

  ‘천둥같이 풀려나는/해빙의 메아리’가 주는 시각적인, 아니 청각적인 이미지는 이 시가 전하려는 메시지이자, 생명력이며, 강력한 설득력이다.  겨울이 해체되는 해빙의 순간을 이처럼 강렬한 이미지로 그려낸 시가 달리 또 있었을까.  온 세상을 하나로 동결시킨 겨울을 일시에 무너뜨리는 봄의 이미지를 이처럼 짤막한 언어 속에 생생하게 함축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시의 경이로움이 아니고 무엇이랴.

  ‘남 몰래 몸풀고 누운 과수댁의/아픈 신음이듯/봄밤의 대지엔/열병하는 아지랭이/몸살하는 철쭉’들의 설렘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봄은 간단히 오는 것이 아니다.  봄을 기다리다 못해 열병을 앓는 아지랭이, 몸살하는 철쭉이 있듯이 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인고가 따르게 마련이다.  때로는 아이를 낳고도 기뻐할 수 없는 과부의 아픔처럼, 그렇듯이 남에게 알릴 수 없는 저간의 사정도 있는 것이다.  계절의 순환은 확정된 자연의 섭리에 따라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정녕 봄을 맞이하는 데는 뭇 생명체의 숨은 열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쨌든지 봄은 기어이 오고야 만다.  마침내 저만치 산비탈을 짓쑤셔대는 산불이 물러가고 날이 밝으면 봄은 온 누리에 일시에 퍼진다.  그리하여 온 세상은 약동하는 봄기운으로 넘친다.

  ‘노오란 해 솟으면/진달래밭 개나리밭/떼지어 날아온/까투리 장끼들이 울음으로/우리네 산야엔/봄소동 나겠네’

  여기저기서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고 꿩들이 부산스럽게 우짖어대니 세상이 시끄럽다.  무슨 소동이라도 난 듯이 온 세상이 시끌벅적하다.  봄은 그렇게 요란한 정경으로 우리에게 온다.  온갖 생명체들이 삶의 환희를 노래하니, 어찌 세상이 소란스럽지 않으랴.  정녕 봄은 이리도 활기찬 것이려니.  (신항섭: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