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나를 울린 시 (20) - 지상

펜보이 2007. 7. 12. 22:22
 


  지상


 박제천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별을 가지고 있다.  잃어버렸다가도 다시 찾게 된다.  개중엔 이승의 몸을 버리고서야 자기의 별을 찾기도 한다.  어느 날 무심히 밤하늘을 바라볼 때 갑자기 한줄기 불꽃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면 그대 곁의 어느 누가 또 보이지 않으리라 사람들은 누구나 별과 운명을 같이한다 사람들은 그러나 별에 이르지 못한다 별은 언제나 사람들의 머리 위에 떠 있다 사닥다리를 뚜어올라도 움켜쥘 수 없다 피와 살의 무게가 사람들을 지상에 있게 한다 그것들을 버린다 해도 별빛이 너무 눈이 부시다 눈이 오는 오늘밤은 별도 보이지 않고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먼 곳에서 한 줄기 등불만 몸을 떨고 있다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한다.

 

  망원경이 발명된 이래 밤하늘의 별은 신비의 사전목록에서 사라졌다.  신비의 사전에서 사라진 것이 어디 별 뿐일까만, 영원한 꿈을 빼앗겼다는 상실감을 비교해 보자면 별보다 더한 것이 달리 또 있을까.  그래도 이 밤, 비록 신비감을 잃었다고 할지라도 별은 변함없이 밤하늘을 밝히며 우리의 꿈과 고달픈 잠을 지키고 있다.  그렇다.  어린 날, 별은 미지의 세상을 내다보는 꿈의 창이었다.  그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딴 것이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보석처럼 찬란한 빛을 발하며 아름다운 꿈의 세계로 인도했고 우리는 기꺼이 거기에 현혹되었다.  그리고 별을 통해 우리는 지구 밖의 먼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별은 어린 우리들에게는 순수 순결 성스러움의 상징이기도 했다.  맑은 밤하늘에서만 그 존재를 빛내는 별의 존재방식은 우리를 순수 순결의 정서로 감염시켰다.  그래서 별을 통해 우리의 마음은 정화될 수 있었다.  별을 사랑할수록 점점 맑아지는 삶의 방정식을 우리는 배웠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서 별을 쳐다보지 않게 되었다.  세파에 시달리면서 삶의 방정식을 따르기는커녕 별의 존재조차 잊게 된 것이다.  그러니 마음이 탁해질 수밖에 없다. 

  박제천 시인의 ‘지상’은 신비한 별에 사로잡히던 어린 날의 동화를 되살린다.  하지만 미지의 세상을 내다보는 꿈의 창이었던 신비한 프리즘의 세계를 되살려주지는 못한다.  그가 제시하는 별은 더 이상 꿈을 실어다주지 않는다.  이미 온전한 인격체로서 독립한 현실적인 나에 대한 성찰의 지표로서 다가올 따름이다.  적당히 세상을 경험하고 적당히 영악해진 ‘나’의 존재가 별에 투사된다.  별은 신비의 대상이 아니다.  물론 어떠한 종류의 이상도 길어다주지 못한다.  끝내 별일 수 없는 지상의 인간으로서 끝나고 말 우리들 운명에 대한 조용한 성찰을 유도하는 존재로서 지금 우리 머리 위에 차갑게 빛나고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별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시인이 되 뇌이듯이 어린 시절 우리는 할머니로부터 별과 관련한 많은 얘기를 듣고 자랐다.  은하수며, 짚신할아버지며, 견우직녀며, 양치기며, 저마다 아름답고도 슬픈 전설을 가지고 있는 별들의 꿈과 사랑을 통해 우리는 미구에 올 우리의 운명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 때마다 우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 속의 별을 ‘나의 별’로 정해두고 그처럼 아름다운 별의 삶이 내게 옮겨지기를 기원했다.  슬픈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별을 ‘나의 별’로 삼아 밤마다 올려다보며 그 슬픔을 달래주고 나누어 가지려 했다.

     이처럼 ‘지상’은 ‘나의 별’에 대한 추억으로부터 문을 열고 있다.  그런데 시인이 여기에서 말하는 별은 더 이상 아름다운 꿈의 대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들의 각박한 삶과 같이하는 운명적인 존재로서의 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별은 예시의 상징이었다.  미래를 암시하고 예시함으로써 우리의 삶보다 항상 한 걸음 앞서가는 존재였다.  별이 존재하는 방식을 은밀히 탐색함으로써 우리들 운명을 예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세상으로 와서 큰 일을 한 사람이 죽기 전에는 반드시 큰 별이 진다는 속설이 있다.  그 사람이 지상에서 사라짐과 동시에 ‘그의 별’ 또한 소멸한다고 믿었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별은 인간 개개인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자기의 별을 ‘잃어버렸다가도 다시 찾게 된다.  개중엔 이승의 몸을 버리고서야 자기의 별을 찾기도 한다.’며 별과 인간은 운명적인 끈으로 맺어진 관계임을 상기시킨다. 

  ‘어느 날 무심히 밤하늘을 바라볼 때 갑자기 한줄기 불꽃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면 그대 곁의 어느 누가 또 보이지 않으리라’

  시인은 여기에서 별과 인간의 운명적인 관계는 단순한 옛 이야기 속의 전설이나 또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임을 설득한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기 별’이란 한 인간으로서의 목숨을 가지고 지상에 태어나는 순간, 마치 쌍둥이처럼 하늘에 생겨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니 어디 우연일 수 있으랴.  그처럼 운명적으로 연결된 ‘자기 별’이지만 별은 하늘에서, 그리고 인간은 지상에 존재한다.  별은 현실이 아니고 이상인 까닭이다.  그러기에 인간이 공동운명체로서의 ‘자기 별’에 이르려 제아무리 노력해도 한갓 헛된 수고에 그친다.

  ‘사람들은 누구나 별과 운명을 같이한다 사람들은 그러나 별에 이르지 못한다 별은 언제나 사람들의 머리 위에 떠 있다 사닥다리를 뚜어올라도 움켜쥘 수 없다 피와 살의 무게가 사람들을 지상에 있게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피와 살을 지닌 지상의 존재임을 절감한다.  이상적인 존재로서의 별을 닮으려 해도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다.  꿈에 불과하다지만 ‘자기 별’은 바로 혈연적인 관계를 맺은 존재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 별은 이상화된 존재로서 우리들 삶의 영역을 벗어나 아주 먼 곳에 있다.  우리는 지상에 살면서 ‘자기 별’과 일체가 되려 부단히 노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별’에 합치될 수 없다.  이는 별과 인간 사이에 놓인 영원한 간극이다.  즉,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말하는 것이다.  ‘피와 살의 무게’야말로 인간이 결코 벗어 팽개칠 수 없는 현실이자 운명적으로 지상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갇혀 살 수 밖에 없는 삶의 조건인 것이다.  이러니 우리는 이미 정해진 운명에 순순히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기 별’이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위안인가.  이상을 버리지 않는 삶이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모습일 수도 있기에 그렇다.  설령 ‘그것들을 버린다 해도 별빛이 너무 눈이 부시다’는 대목에서는 이상이란 어떠한 경우에라도 변하지 않는 것임을 확인시키려 한다.  결과가 빤한 삶에 대한 허무를 허무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눈이 오는 오늘밤은 별도 보이지 않고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먼 곳에서 한줄기 등불만 몸을 떨고 있다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한다’

  삶의 고뇌를 앞에 두고 사색의 심연에 빠진 한 인간으로서의 자아에 대한 성찰의 순간이 이처럼 선연하게 떠오른다.  먼 곳에서 몸을 떠는 한줄기 등불은 이 지상에 남아 있어야만 하는 자아의 참모습이다.  지상이란 고뇌의 강이 아닌가.  그렇다 그 고뇌의 강에서 홀로 떠는 모습을 ‘자기 별’에게 조차 알릴 수 없다.  이상이 별처럼 높다고 하더라도 지상의 삶이란 끝내는 정해진 운명을 따라가는 일이기에 그렇다.  (신항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