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나를 울린 시 (19) - 도봉

펜보이 2007. 7. 11. 13:28
 

 도봉


  박두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이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 골을 되돌아올 뿐.


  산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그림은 시가 되어야 하고 시는 그림이 되어야 한다.  어쩌면 궤변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그림이나 시는 서로 공통점이 많기에 하는 말이다.  다시 말해 시(詩) 속에는 그림을 보는 듯한 형상의 전개가 있어야 하고, 마찬가지로 그림 속에는 시의 절대요건인 함축적인 아름다움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시적인 그림이 있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서경시 및 서정시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시적인 상상력을 통해 아름다운 세상 및 인생을 꿈꾸게 된다.  뿐만 아니라 회화적인 이상미를 통해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가꾸어 갈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다.  일상적으로 마주치기 때문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자연풍경도 시인의 감수성에 감전되면 돌연,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한 아름다움이 불거지면서 우리를 놀라게 한다.  문자언어의 연금술이라는 시의 세계는 이렇듯이 몇 마디 언어로써 세상을 전혀 다른 모양으로 바꾸어내는 요술과 같다.

  그래서 자연의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시인의 입을 통해서나 새삼 그 실체가 드러난다.  이렇게 보면 서경시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시인의 탐미적인 시각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화가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포착하여 평면공간에 재현하는 것 역시 탐미적인 시각의 결과이다.  감성적인 눈으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들여다본다는 점에서는 시인이나 화가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특히 서경시의 경우에는 그림과 거의 동일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시인은 아름다운 자연경치를 문자언어로 노래하는 반면에 화가는 조형언어로 표현한다는, 방법적인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박두진 시인의 ‘도봉’은 도봉산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물론 여기에서는 도봉산이 지니고 있는 아름다운 모양새 따위에 대한 직접적인 미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가 전하는 내적인 의미를 음미하는 가운데 깊고 높은 산의 실체를 연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가 하면 ‘도봉’이라는 산 이름만으로도 이미 넉넉히 그 장엄한 자태를 떠올릴 수 있다.  급격히 치솟은 바위 연봉들로 집단을 이루는 도봉산의 산세를 익히 아는 이라면 더욱 그렇다.

  ‘산새도 날아와/우짖지 않고,//구름도 떠가곤/오지 않는다.//인적이 끊인 곳/홀로 앉은/가을 산의 어스름./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보나./울림은 헛되이/빈 골 골을 되돌아올 뿐.’

  도봉산을 마주하고 읊은 노래임에도 구체적인 인상은 담기지 않고 있다.  오직 주관적이면서 주정적(主情的)인 관점으로 노래하기에 산의 형태를 떠올릴 수 있는 직접적인 표현이 생략되고 있다.  그러나 ‘가을 산의 어스름’이라든지,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라는 구절에 넌지시 암시됨으로써 간단치 않은 산의 위용을 충분히 마음속에 그려낼 수 있다.  더구나 ‘인적이 끊인 곳/홀로 앉은/가을 산의 어스름’은 산의 의인화를 통해 대인(大人)과 같은 산의 거대한 체적을 연상케 한다.  특히 뒤에 좇아오는 ‘산그늘 길게 늘이며’라는 구절은 비로소 도봉의 실체를 가장 가깝게 표현하고 있다.  산그늘이 기다랗다면 산이 그만큼 높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시사하는 대목인 것이다.

  산이 크면 거기에 깃들이는 고적함 또한 훨씬 커지게 마련이다.  거대한 산과 마주한 그 자신의 포부 및 심경이 산의 이미지에 겹쳐지는 것도 이 시가 지닌 은밀함이다.  다시 말해 큰산과 그 자신의 처지를 비유함으로써 대등한 관계가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거대한 산은 호연지기의 젊음, 그 열정에 비유되는 시적인 모티프인 셈이다. 

  거대한 산 앞에서는 산새가 숨을 죽이고, 구름도 머물지 않는다.  오직 홀연히 자리하는 산 그 자체의 당당함이 한편으로는 되레 외로움의 근원이 된다.  인격이 높으면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을지언정 진정한 친구가 없듯이 산이 너무 높으면 홀로 외로운 법이다.  이상이 지나치게 높으면 현실이 보이지 않는 이치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도봉을 보면서 시인은 비로소 자신 또한 외롭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그러기에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보나’고 자문한다. 

  그러면서 ‘울림은 헛되이/빈 골 골을 되돌아올 뿐.//산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가고,/황혼과 함께/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라고 현실을 직시한다. 

  이상이 아무리 높다하더라도 현실은 차가울 뿐이다.  그러한 현실인식은 혼자 있음으로써 가능하다.  산의 외로움을 보면서 거기에 비친 자신의 처지를 돌아다 볼 기회를 갖게 되는 까닭이다.  현실인식은 삶의 진정성에 대한 의문을 뜻한다.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임을 자각하는 일이야말로 삶의 진정성을 통찰하는 일이다.  이상은 높아도 현실은 피부로 와 닿는 것이다.  이상이 높을수록 거기에 이르는 길을 험하고 힘들다.  높은 이상의 이면에는 마치 도봉의 긴 그림자처럼 삶의 쓸쓸함이 깃들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그 자신의 삶의 한 가운데는 사랑이 차지한다.  그런고로 삶이 쓸쓸하니, 그 사랑도 괴롭기만 하다.  그처럼 허전한 마음이 되어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어느 마을에서 쉬느뇨?’고 탄식한다.  외로운 자신의 처지를 위로해 주는 이 아무도 없는 고적한 현실이 차갑게만 느껴진다.

  여기에서 ‘그대’는 사랑하는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반드시 시인의 마음속에 자리한 여성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상일 수도 있고 동시에 그 자신의 삶의 내연에서 피어나는 조국애, 민족애, 종교애일 수도 있다.  시인 자신이 남자라 하여 ‘그대’가 애정의 상대로서의 ‘여성’이라는 확증은 없다.  이 시가 지칭하는 ‘그대’는 그만큼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 대상이다.

  이 시가 애정시가 아닌, 서정시로 여겨지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성에 대한 열정의 지표가 없다.  세상에 대한 이성적인 탄식만이 있을 따름이다.  막막한 현실이 그리도 가슴을 차갑게 만든 것이다.  이상을 마음껏 펼칠 수 없는 현실에서 부딪치는, 젊음에 찾아드는 뼛속 깊은 외로움이 손에 잡힐 듯이 그려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심금을 울리는 감미로운 시적인 여운이 강물처럼 흐른다.  그 감미로움은 차라리 슬픔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아름다움이 지극하면 슬픔의 강으로 흐르게 마련이기에 그렇다.  ‘그대 위하여’ ‘이 긴 밤과 슬픔’을 갖는다는 시적인 감정의 여울이 목젖을 메운다.  (신항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