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나를 울린 시 (18) - 낙엽의 노래

펜보이 2007. 7. 10. 16:13
   낙엽의 노래


  홍윤숙


  헤어지자 우리들 서로 말없이 헤어지자

  달빛도 기울어진 산마루에

  낙엽이 우수수 흩어지는데

  산을 넘어 사라지는 너의 긴 그림자

  슬픈 그림자를 내 잊지 않으마


  언젠가 그 밤도 오늘밤과 꼭 같은

  달밤이었다

  바람이 불고 낙엽이 흩어지고

  하늘의 별들이 길을 잃은 밤

  너는 별을 가리켜 영원을 말하고

  나는 검은머리 베어 목숨처럼 바친

  그리움이 있었다 혁명이 있었다


  몇 해가 지나갔다

  자벌레처럼 싫증난 너의 찌푸린 이맛살은

  또 하나의 하늘을 찾아 거침없이

  떠나는 것이었고


  나는 나대로

  송피(松皮)처럼 무딘 껍질 밑에

  무수한 혈흔(血痕)을 남겨야 할

  아픔에 견디었다.


  오늘밤 이제 온전히 달이 기울고

  아침이 밝기 전에 가야 한다는 너-

  우리들이 부르던 노래 사랑하던 노래를

  다시 한번 부르자

  

  희뿌여히 아침이 다가오는 소리

  닭이 울면 이 밤도 사라지려니

 

  어서 저 기울어진 달빛 그늘로

  너와 나 낙엽을 밟으며

  헤어지자 우리들 서로 말없이 헤어지자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만큼 슬픈 일이 달리 또 있을까.  이렇게 말하면 부모를 사별하는 일이 가장 슬프다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물론 저마다 가지고 있는 슬픔의 유형이 다르듯이 슬픔의 깊이나 무게 또한 다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것은 부모를 사별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부모에 대한 사랑은 자신을 나아서 키워준 데 대한 공경의 뜻이 강하다.  얼마정도는 의무감이 작용하기도 한다.  반면에 이성에 대한 사랑은 거의 맹목적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목적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넘어선다는 뜻이다.  일체의 목적을 초월하는 사랑은 이성간에나 가능하다.

  인간이 사는 이유 중에서 이성에 대한 사랑만큼 절실한 것이 어디 또 있겠는가.  이성을 사랑한다는 일이야말로 참다운 의미에서 인간이 사는 이유일 것이다.  이성을 사랑하는 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동물적인 본능이기에 그렇다.  다시 말해 이성에 대한 사랑은 종족의 번식이라는 엄숙한 의식의 첫 장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감정은 바로 종족의 번식을 획책하기 위한 수단이자 방법으로써 발동한다.  이것이야말로 순수한 의미에서의 사랑이다.

  그런데 그처럼 본능적으로 좋아진 사람과 헤어지기도 한다.  그게 인간사회의 오묘함이다.  인간을 흔히 감정의 동물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사랑은 감정에 좌우된다.  사랑은 이성의 몫이 아니라 감성의 몫인 까닭이다.  불같은 열정에 사로잡혀 있다가도 어느 순간 격한 감정의 격랑에 휩쓸리면서 순식간에 식고 만다.  뿐더러 어떤 이유를 동반한 이성적인 사고가 개입되면서 사랑의 감정이 갈등을 겪는다.  그리고 그토록 죽을 듯이 사랑하던 사람과 별안간 이별을 감행한다.  어느 면에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이성적인 행위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헤어져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이성적인 행위의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슬픔이 극에 달하면 아름답다고 했던가.  홍윤숙 시인의 ‘낙엽의 노래’는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상황을 지극한 아름다움으로 형용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이처럼 아름답게 승화시키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헤어져야 할 어쩌지 못할 상황에 직면함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보낼 수밖에 없는 형식의 이별의식인 탓인지는 몰라도 슬프다기보다는 차라리 담담하다.  그 담담함이 이 시를 서정적인 아름다움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헤어지자 우리들 서로 말없이 헤어지자/달빛도 기울어진 산마루에/낙엽이 우수수 흩어지는데/ 산을 넘어 사라지는 너의 긴 그림자/ 슬픈 그림자를 내 잊지 않으마’

  이미 이별을 작정하고 떠나는 자와 보내는 자의 모습이 담담하다 못해 처연하다.  헤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받아들임으로써 담담함 아니, 처절함이 있다.  사랑을 단념한다는 것은 처절하다.  헤어져야 할 필연적인 상황을 서로가 이해하기에 어떤 말도 필요치 않다.  그래서 ‘서로 말없이 헤어지자’는 것이다.  연인의 이별을 아는지 ‘달빛도 기울어진 산마루에’ 낙엽마저 ‘우수수’ 흩어진다.  기울어진 달빛에 길어진 연인의 ‘슬픈 그림자’도 마침내 사라진다.  이런 극적인 장면을 통해 비극적인 이별의 아름다움은 더욱 증폭되고 구체화된다.  그렇다.  이별에는 드라마가 있다.  인간사의 하고많은 인연 중에서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그 절연의 아픔을 위해서는 드라마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기울어진 달빛’과 떠나는 이의 ‘긴 그림자’ 그리고 ‘흩어지는 낙엽’은 드라마를 위한 기막힌 무대장치이다.  떠나는 이와 보내는 이에게는 가슴을 에는 듯한 아픔일 수 있으련만, 시인은 되레 탐미적인 시선으로 접근함으로써 이별을 아름다운 사랑의 전설로 매듭지으려 한다.

  ‘언젠가 그 밤도 오늘밤과 꼭 같은/달밤이었다/바람이 불고 낙엽이 흩어지고/ 하늘의 별들이 길을 잃은 밤/너는 별을 가리켜 영원을 말하고/나는 검은머리 베어 목숨처럼 바친/그리움이 있었다 혁명이 있었다’ 

  사랑하는 님을 보내고 나서 과거를 회상한다.  마치 혁명처럼 ‘나’를 완전히 바꾸어버린 그 사랑의 힘에 사로잡히고만 시간을 돌이켜본다.  사랑을 맹세하던 밤과 이별이 있는 밤의 정황이 일치하면서 과거의 시간이 오버랩 되는 것이다.  별들도 숨을 죽인, 변치 않을 사랑을 약속한 그 밤이 꿈처럼 흘러가 버리고 스산하게 흩어져 나뒹구는 낙엽이 가슴의 상처를 덮는다.  ‘검은머리를 베어 목숨처럼 바친’ 그 사랑이 허무하게 끝나고 있다.  사랑의 농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묽어지게 마련인가 보다.  여기서도 영원한 사랑은 없음을 실증하려는 것인가.

  ‘몇 해가 지났다/자벌레처럼 싫증난 너의 찌푸린 이맛살은/또 하나의 하늘을 찾아 거침없이/떠나는 것이었고’ 

아무리 깊은 사랑이라도 삼 년을 지탱하기 어렵다는 속설을 증명이라도 하듯, ‘나’로부터 염증을 낸 ‘너’는 떠난다.  그러는 ‘너’를 보며 ‘나는 나대로/송피처럼 무딘 껍질 밑에/무수한 혈흔을 남겨야 할/아픔에 견디었다’며, 이미 결판이 난 이별의 이유를 진술한다. 

  그래도 이별의 순간만은 아름다운 의식으로 마무리하고 싶다는 것인지, 서로를 사랑했던 추억을 떠올림으로써 미움만은 거두자고 한다.  ‘우리들이 부르던 노래/사랑하던 노래를/다시 한번 부르자’ 그리고 나서, ‘어서 저 기울어진 달빛 그늘로/너와 나 낙엽을 밟으며/헤어지자 우리들 서로 말없이 헤어지자’고 되뇐다.  이별을 이처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이성의 소관임을 말해준다.  사랑이 감성의 유희라면 이별은 이성의 산술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한 편의 서정시처럼 전개되는 이별의 뒤쪽에는 무엇이 있을까.  미움이나 체념보다는 한 시절 꿈같은 사랑에 대한 헌사가 있다.  더불어, 비록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으나 미움을 거두고 한 편의 아름다운 사랑의 시로 매듭지으려는 감정의 절제가 있다.  사랑을 미움으로 지우려하면 ‘나’의 감정이 황폐화하고 만다.  황폐화한 감정은 다음의 사랑도 기대할 수 없으려니와 ‘나’를 영원한 독방으로 감금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  사랑은 한 순간 속에서 영원한 것이어야 한다.  시인은 눈물 없는, 회한 없는 사랑의 실체를 그려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신항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