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나를 울린 시 (17) - 영산

펜보이 2007. 7. 8. 22:56
 

                                                           

  영산(靈山)

 

 김광규



  내 어렸을 적 고향에는 신비로운 산이 하나 있었다.

  아무도 올라가 본 적이 없는 영산(靈山)이었다.


  영산은 낮에 보이지 않았다.

  산허리까지 잠긴 짙은 안개와 그 위를 덮은 구름으로 하여 영산은 어렴풋이 그 있는 곳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영산은 밤에도 잘 보이지 않았다.

  구름 없이 맑은 밤하늘 달빛 속에 또는 별빛 속에 거무스레 그 모습을 나타내는 수도 있지만 그 모양이 어떠하며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 영산이 불현듯 보고 싶어 고속버스를 타고 고향에 내려갔더니 이상하게도 영산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이미 낯설은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런 산은 이곳에 없다고 한다. 

 

  인간에게는 특이하게도 사고력이 주어졌다.  사고력은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만의 특징이다.  사고력은 일체의 현실에 대한 지각을 포함하여 꿈과 상상의 세계를 가능케 한다.  꿈과 상상은 초월적인 세계임에도 현실의 미흡함을 보완해준다.  꿈과 상상을 통해 현실적인 불만 및 부족을 메울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설령 한낱 이루어질 수 없는 허황함으로 끝나고 말지언정 항상 가능성을 신뢰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세계라고는 할 수 없다.  한마디로 꿈과 상상은 현실에 대응하는 가상의 공간인 셈이다.  그렇다.  꿈과 상상은 현실의 저 안쪽, 즉 내 안에 자리하는 독립적인 세계이다.

  생각해 보라.  꿈과 상상이 없다면 현실에만 얽매이는 인간 삶이란 얼마나 무미건조할 것인가.  꿈과 상상의 세계를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기에 팍팍한 현실도 거뜬히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어떤 현실적인 조건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정신의 자유로움을 통해 완전한 인격체로서의 개체독립이 가능케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꿈과 상상이란 다름 아닌 자유로운 인간정신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일체의 속박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야말로 꿈과 상상의 영역에 관한 일이다.

  김광규시인은 그 자신의 꿈과 상상의 세계를 ‘영산(靈山)’으로 설정하고 있다.

  ‘영산’은 글자가 말하듯이 ‘신령한 산’을 뜻한다.  ‘신(神)의 기운이 깃들인 산’이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현실에서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산이 아니다.  산은 산이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산이 아니라, 신비스러운 존재, 즉 영적인 기운이 감도는 산이다.  신령스러운 기운을 느끼는 것은 현실적인 감각 밖의 일이다.  다시 말해 보통 인간의 감각계와는 다른 아주 특별한 능력에 의해서나 감지, 감득할 수 있는 경계이다.  현실적인 감각으로 느낄 수 없는 세계란 실재하는 세계가 아니다. 

  그러기에 ‘영산’은 어쩌면 신기루와 같은 것인지 모른다.  손에 닿을 듯싶어 다가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존재, 비록 허상일지라도 눈에 보였다는 사실로 존재하는 것이 신기루 아니던가.

  ‘내 어렸을 적 고향에는 신비로운 산이 하나 있었다./아무도 올라가 본 적이 없는 영산(靈山)이었다.’

  어렸을 적으로부터 시작되는 이 시에서 ‘영산’은 ‘고향’과 동의어임을 알 수 있다.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은 이미 현실로부터 멀어져 과거의 어느 시간선상에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 고향은 비현실화 되어 있는 셈이다.  ‘영산’ 또한 그러하다.  마치 실재했던 것처럼 믿고 있지만 그 곳에 올라가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고향과 영산은 현실에서 동떨어져 있다는 점에서 볼 때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 

  ‘영산은 낮에 보이지 않았다./산허리까지 잠긴 짙은 안개와 그 위를 덮은 구름으로 하여 영산은 어렴풋이 그 있는 곳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고 말함으로써 실제로 존재하는 산이 아니었음을 명확히 한다.  낮에 보이지 않는 산이란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다.  게다가 과거의 시간선상에 머물고 있으므로 고향은 이미 실재가 아니듯이 ‘영산’ 또한 환상의 공간에 떠 있는 섬이다.  여기에서 안개와 구름은 영산이 존재하는데 필요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안개와 구름을 통해 그 존재의 가능성을 드러내는 까닭이다.  낮에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안개와 구름에 가려짐으로써 어렴풋이 그 존재를 짐작케 할뿐이니 이상한 일이다.  

  ‘영산은 밤에도 잘 보이지 않았다.’ 

  낮에도 보이지 않으니 밤에는 더욱 보일 리 없다.  다만 ‘구름 없이 맑은 밤하늘 달빛 속에 또는 별빛 속에 거무스레 그 모습을 나타내는 수도 있지만 그 모양이 어떠하며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는 진술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낮에는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밤에도 잘 보이지 않는 존재가 달빛이나 별빛 속에 나타난다는 말은 현실적인 감각으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이러한 모순은 신비주의적인 동양사상을 통해 간단히 해소된다.  실재하지 않는 존재조차 마치 실제처럼 확정적으로 믿는 동양인의 정서로서는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전설과 설화를 의심치 않는 동양인의 정서로 보면 영산이란 어딘가에 존재할 수 있다.  설령 그것이 당장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언젠가는 틀림없이 나타난다고 믿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합리적인 이성주의 시각으로는 지극히 비현실적이다.

  그런들 어떠랴.  마지막 연에서 보듯이 ‘영산’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산임이 드러난다.  시인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에 의해 영산의 존재가 무참히 부정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영산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수 없다.  그 자신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함께 하는 고향의 이미지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 영산이 불현듯 보고 싶어 고속버스를 타고 고향에 내려갔더니 영산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이미 낯설은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런 산은 이곳에 없다고 한다.’

  물론 그 자신조차도 영산의 실체를 본 일이 없으니 새삼스레 고향을 찾아간다고 해서 갑자기 솟아오를 리는 없으려니와 그런 사실 또한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영산’이 문득 보고 싶어 고향에 내려간다.  고향에는 낯선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들은 ‘영산’의 존재를 부인한다.  그렇다.  ‘영산’은 그에게 ‘고향’의 동의어이다.  ‘영산’이 보고 싶어 갔다지만 실제로는 ‘영산’의 꿈을 키워준 고향을 보러간 것이다.  그러나 낯선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고향은 이미 그에게 더 이상의 고향은 아니었다.  ‘영산’의 존재는 그가 고향을 떠나는 순간 함께 떠나와 그 자신의 마음속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영산’이 부정되는 고향은 더 이상 고향일 수 없다.  시인은 고향에 내려와서야 비로소 그러한 사실을 깨닫고 있다.  ‘영산’은 시인의 꿈이자 이상향이고 마침내는 상상의 공간이다.  (신항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