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평

미술시평 (5) - 박물관은 민족미술의 원본

펜보이 2007. 7. 5. 14:54

   

  박물관은 민족미술의 원본


  우리는 오천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문화국민으로 자처한다.  실제로 인류역사상 단일민족으로서 오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국가는 그리 많지 않다.  한반도 도처에서 구석기 및 신석기 유적 발굴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으로 보아 오천년 역사가 우리만의 주장이 아님을 뒷받침한다.

  한반도에 최초의 국가의 형태를 갖춘 것은 고조선으로 기원전 233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조선은 중앙통치가 아닌 부족의 연합체인 부족국가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고조선은 단군조선을 기점으로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이어지는데 기원전 108년 중국의 한무제가 한사군을 설치하기 이전까지 주로 대동강 유역에 자리를 잡고 있던 부족국가였다.  한사군에 이어 삼한시대 그리고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 대한제국, 그리고 현재의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유구한 역사 속에서 한반도의 오천년에 걸쳐 고유의 문화가 형성되었다.

  이렇듯 오랜 역사적인 배경을 통해 한반도는 이웃 중국과 더불어 동북아시아의 어엿한 독립적인 문화국가로 행세해올 수 있었다.  더구나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는 일본문화는 한반도의 영향을 논외하고서는 성립될 수 없을 정도이다.  물론 한반도의 문화는 자생적이기보다는 중국으로부터 직접 받아들이는 형태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문화란 그 속성상 외부로부터 이입되었다고 할지라도 세월이 흐르면서 그 국가체제 및 민족적인 정서에 동화되기 마련이다.  우리 문화가 중국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문화와 엄연히 구별되는 독자적인 표현양식으로 변화시킨 것도 바로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에 융화시킴으로써 가능했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맥락에서 볼 때 한반도는 상고시대부터 근세에 이르는 그야말로 역사박물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주거지로서 적합하다고 판정되는 해안 및 강 유역 어디를 파더라고 주거형태는 물론이요, 그와 연관된 생활기물들이 끊임없이 발굴되고 있다.  이를 토대로 우리 나라 각 지역의 공공박물관과 함께 대학에는 저마다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유물박물관이 건립되었다.  특히 고고학과 또는 이와 관련된 학과가 설치된 대학은 대학이 위치한 지역을 중심으로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유적을 발굴하고 있으며, 거기에서 나온 유물을 중심으로 박물관을 건립 운영하고 있다.  지역의 공공 박물관들도 학예원을 중심으로 대학과 연계하여 유적 발굴작업을 계속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중앙 및 각 지역의 공공박물관 및 대학박물관은 단순히 발굴 유물뿐만 아니라, 각종 생활민속기물을 포함하여 회화 조각 공예 등 예술품을 체계적으로 전시하고 있다.  지역 대학박물관 중에는 발굴성과에 따라 중앙박물관에도 없는 독특한 유물을 소장 전시하는 곳도 있다. 

  우리 나라의 고고학 수준은 이제 자립단계에 들어서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한반도 역사연구는 아직도 만족할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는 고사하고라도 불과 오백년 남짓의 근세조선의 역사를 복원하는데도 아직 힘겨워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전래의 문화유산 상당수가 외침에 의해 유실됨으로써 역사 복원을 더욱 힘겹게 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되고 있다.  아울러 전통문화에 대한 정책의 미흡으로 인한 예산부족 등 현실적인 문제가 역사복원을 더디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고고학자와 박물관 연구원들은 잃어버린 잊어버린 역사를 복원, 그야말로 오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한반도 문화국가의 실체를 규명하는데 신념을 바치고 있다.  그런데도 이들의 노력에 대해 우리 사회는 아직도 모르는 체 남의 일로 외면하고 있다.  역사복원은 고고학자 및 사학자들의 학문적인 연구과업일 뿐이라고 치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들의 노력이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이며, 왜 필요한 것인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소위 예술을 한다는 미술가들조차 이들의 존재 및 그 연구성과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현재 우리 나라에는 크고 작은 유물박물관이 적지 않다.  중앙국립박물관을 비롯하여 각 지역의 공공박물관 및 대학박물관 그리고 기업 및 개인이 설립 운영하는 개인박물관이 있다.  일부 미술관은 옛 미술품만을 소장 전시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미술관은 박물관으로서의 성격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미술품이 아닌 근대 이전의 고미술품만을 수집 전시 관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박물관의 성격이 강한 것이다. 

  이들 박물관과 미술관은 상설전 이외에도 많게는 일년에 수 차례 적게는 한 두 차례 정도 자체적으로 특별전 형태의 기획전시회를 마련하고 있다.  이러한 기획전시회는 대부분 주제전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새로운 유적지 발굴에 따른 유물만을 전시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특정 시대의 기물만을 모아놓거나 또는 같은 종류의 기물을 시대별로 구분하여 전시함으로써 변천과정을 살펴보는 등 대개는 역사적인 가치 규명과 관련하여 객관적인 검증의 기회를 갖자는 의도를 내포한다.

  따라서 이들 박물관 기획전은 잃어버린, 또는 잊어버린 역사의 복원이라는 보다 큰 목표 아래 행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역사복원과 관련한 기획전시는 이 분야의 전문가들을 위한 학술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우리의 역사와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역사를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단순히 과거를 이해한다는 지식의 차원에 머무는 것인가.  그리고 역사는 현실과 상관없는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과학적 성과가 세상을 바꾸어 가고 있는 현실에서 과거 돌아보기는 구태의연한 태도인지 모른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현재와 미래는 검증되지 않은 시간일 뿐이다.  인류역사가 말해주고 있듯이 실수와 실패는 항시 현재와 미래를 맹신한 결과가 아니었던가. 

  온고지신이라는 금언처럼 옛것에서 새로운 것이 나오는 것이다.  현재가 없는 미래는 있을 수 없듯이, 과거가 없는 현재 역시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현재와 미래에 너무 도취된 나머지 과거의 존재조차 잊어버리기 일쑤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기에 아무 쓸모도 없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과거, 즉 지나간 역사는 우리에게 정녕 아무 것도 아닐까. 

  과학문명, 그 중에서도 전자문명이 극도로 발달하고 있는 현시대는 확실히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의식과 태도 그리고 행동양식을 필요로 한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극명하게 다르듯이 과거와 현재는 너무도 많은 차이가 있기에 그렇다.  그러니 구식의 아날로그가 디지털 시대에 전혀 쓸모 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디지털만이 오직 현재와 미래의 세상을 보장한다고 할 수 있을까.

  디지털이란 현재진행형의 전자기술이다.  다시 말해 검증되지 않은 미지의 과학인 것이다.  물론 디지털은 현재까지의 진행상황으로 보아서는 인류의 생활을 더욱 빠르고 그리고 편리하게 만들어줄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빠르고 편리한 생활만이 최선인가.  지금은 디지털의 세계에 도취되어 그 장단점을 파악할 계제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 이 현재의 시간도 머지 않아 과거의 시간이 되게 마련이다. 

  문제는 발달 발전 진보만을 생명으로 여기는 현대과학이 인간의 조건보다 너무 빨리 앞서간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과거를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실수 실패를 되풀이하기 전에 현실적인 문제점을 살펴 대처하자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미래에 있을지도 모를 실수 실패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박물관의 존재를 소홀히 하는 것은 순전히 전자과학문명이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전지전능의 수단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문화예술은 과학과 다른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현대미술은 과학과의 연대를 통해 그 영역을 무한정 확대해 놓고 있다.  현대과학을 받아들이면서 미술은 무소불위의 존재가 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정작 일반인들은 현대미술과 심한 괴리감을 느낀다.  도대체 알 수 없어 하는 것이다.  과거의 미술을 모르는 상태라면 현대미술에 대한 어떠한 의문도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과거를 배웠다.  그것이 아주 하찮은 정도에 그칠지라도 과거를 통해 현실을 인식하고 이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 세계를 풍미하는 현대미술은 우리의 역사 우리의 문화 우리의 정서와는 사뭇 다른 서구적인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의식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어쩌면 오늘 한국미술이 서구미술의 경연장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 것, 우리 역사 및 전통에 관해 무관심하거나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우리 것에 대한 의식, 우리 미술에 대한 자각이 없는 상태에서 서구미학만을 받아들이기에 서구의 종속미술, 아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래서야 어찌 오천년 문화민족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문화예술이란 자신을 포함하여 자신을 배태하여 성장시켜준 민족의 가슴속에서 면면히 흘러온 정서의 표현일 때 참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문화예술이란 지식에 의존하는 지적 산물이 아니라 감성 및 정서의 산물이기에 그렇다.  그런데도 많은 미술가들은 미술을 지적유희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서구미학을 맹신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나와 내 것에 대한 올바른 자각이 없기 때문이다.  나와 민족이 존재하지 않는 미술로 아무리 유명해질지라도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우리 것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오판하고 있다.  서구적인 것에 비해 열등하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서구미학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현상도 이와 관련이 있다.  문화예술이란 공산품처럼 직접적인 비교로 그 가치가 판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서구미술이 우월하고 우리미술이 열등하다는 시각은 결과적으로 자기비하의 인식에서 발단한다.  우리는 우리미술이 우수하고 그렇지 못하고를 따지기에 앞서 내가 누구인가를 먼저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누구인가 하는 의문에 가장 확실한 답을 주는 곳이 다름 아닌 박물관이다.

  박물관은 단순히 과거의 유물이나 전시해 놓는 곳이 아니다.  올바른 역사관과 세계관을 심어줄 수 있는 가장 믿음직한 교육의 현장인 것이다.  과거의 유물은 검증된 것이다.  따라서 거기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존재했던 사실, 다시 말해 내가 존재하게 된 근본으로서의 삶의 모습을 바로 박물관이 실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처럼 우리에게 중요한 박물관이 현실사회로부터 외면되고 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미술전문지조차 박물관 전시회 소개에 아주 인색하다.  더구나 지방 박물관 기획전시는 철저히 무시당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어디 미술전문지뿐인가.  중앙의 유력한 매스컴 또한 마찬가지다.  세상을 리드해 나가는 언론이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니 일반인들의 안중에 들어올 리 없다.

  올바른 민족사관은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본다.  그러한 역사관을 통해 온전한 개인미술 민족미술이 배태되는 것이다. 

  미술가들은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고뇌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서구미학에만 기웃거린다.  아주 가까이 해결책 또는 답이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박물관은 조형의 보고이다.  멀리랄 것도 없이 수화 김환기는 그 자신의 조형의 원천을 우리 것, 즉 조선백자 및 청자의 아름다운 선에서 찾아냈다고 하지 않았던가.  자연을 모방한 것이 바로 고대유물이다.  그야말로 자연을 절대자로 알고 그를 숭배하며 닮아가려는 자연적인 삶에서 비롯된 조형감각이 고대유물이다.  토기의 선이 보여주는 그 담백한 아름다움은 자연의 선에 대한 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미술을 추종하는 것이 결코 올바른 방법이 아님을 확신하는 미술가가 있다면 이제부터라도 박물관을 찾아가자.  우리 민족의 정서가 그대로 녹아든 토기 한 점에서 불현듯 그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예술적인 영감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신항섭)


<"미술신문" 2000년 5월20일(제24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