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까지 보이는 날
나태주
숨을 들이쉰다
초록의 들판 끝 미루나무
한 그루가 끌려들어온다
숨을 더욱 깊이 들이쉰다
미루나무 잎새에 반짝이는
햇빛이 들어오고 사르락 사르락
작은 바다 물결소리까지
끌려들어온다
숨을 내어 쉰다
뻐꾸기 울음소리
꾀꼬리 울음소리가
쓸려나아간다
숨을 더욱 멀리 내어쉰다
마을 하나 비 맞아 우거진
봉숭아꽃나무 수풀까지
쓸려나아가고 조그만 산 하나
다가와 우뚝 선다
산 위에 두둥실 떠 있는
흰 구름, 저 녀석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몸 안에서
뛰어놀던 바로 그 숨결이다.
합리적인 이성주의에 바탕을 둔 서양철학은 자연과 인간을 별개의 존재로 이해한다. 반면에 비논리적인 성향이 강한 자연주의에 바탕을 둔 동양철학은 자연과 인간이 동일한 존재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기에 서양에서는 자연을 극복의 대상으로 상정하는 반면에, 동양에서는 자연에 인간이 동화되는 것을 이상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동양에서는 인간이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태도를 중시한다. 다시 말해 자연현상은 그것이 어떤 형태의 것이든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사실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모든 자연현상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고자 하며 또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여기에서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자연과 인간이 일체가 되는 것을 이상적인 경계로 여기는 동양적인 철학은 합리적이기보다는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농후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논리적인 접근을 불허하는 신비주의는 자연의 법칙에 대한 순연한 복종을 당연시한다.
나태주 시인의 ‘멀리까지 보이는 날’은 바로 동양적인 철학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발원한다. 다시 말해 단순히 문학적인 감수성 또는 시적인 기교에만 의탁하는 그런 시가 아니다. 동양철학을 기반으로 하는 까닭에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으로 비친다. 어쩌면 신비주의에 보다 실제적으로 접근했다고도 할 수 있다. 나와 자연이 일체가 되는 놀라운 비약조차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숨을 들이쉰다/초록의 들판 끝 미루나무/한 그루가 끌려들어온다’
첫 연에서부터 일상적인 시각을 건너뛰는 시적인 상상력이 우리의 감성을 사로잡는다. 숨을 들이쉬니 저 멀리 들녘 한 끝에 서 있는 미루나무가 끌려들어온다는 사실은 서구적인 교육에 바탕을 둔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호흡 속으로 미루나무가 끌려들어온다는 얘기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자연과 내가 한 통속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나라는 존재는 부드러운 피부를 지닌 인간형상에 머물지 않고 자연현상 또는 그 속에 속한 사물까지도 호흡 속에 끌어들일 수 있는 무한한 가변성을 지닌 초월적인 존재임을 시사한다. 인간 본연의 능력을 초월하는 어떤 힘을 지닐 수 있다고 믿는 도가(도교)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 대수로운 일도 아니다. 단순한 변신술을 뛰어넘어 땅과 하늘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축지법 변신술 연금술 따위가 허무맹랑한 꿈이 아니라 바로 현실임을 확신하는 도가의 입장에서 보면 호흡의 과정에서 자연이 내왕하는 것도 하등 이상할 것 없다.
‘숨을 더욱 깊이 들이쉰다/미루나무 잎새에 반짝이는/햇빛이 들어오고 사르락 사르락/작은 바다 물결소리까지/끌려들어온다’
숨을 더욱 깊이 들이쉬면 햇빛과 바다물결소리까지 가슴속으로 끌려 들어온다는 시적인 상상력이 이처럼 바로 현실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이러한 사실에 그 어떤 의문도 갖지 않는 자연스러운 태도 때문이 아닐까. 과연 이 같은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따위의 이성적인 판단을 배제한 채 이 시가 이끄는 대로 그저 따라가면 문득 세상이 너무도 아름답게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는 초자연적인 현상까지도 실제인 것처럼 말하는 천연덕스러움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 동양사상으로 보면 자연과 인간은 동체이다. 하나의 몸이므로 주객이 따로 구분될 수 없다. 동양사상은 자연이 나이고 내가 곧 자연이라는 등식을 허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햇빛이나 물결소리가 호흡 속으로 드나드는 것은 억지가 아니다. 그냥 자연스러운 자연현상의 하나일 따름이다.
‘숨을 내어쉰다/뻐꾸기 울음소리/꾀꼬리 울음소리가/쓸려나간다’
호흡이 진행될 때마다 온갖 자연현상 및 물상이 내 안으로 들락날락하는 것은 마치 달과 지구의 인력작용에 의해 밀물과 썰물이 생기듯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와 자연과의 구분이 없는 까닭이다. 내가 자연이고 자연이 나임으로써 주관과 객관의 구별조차 있을 수 없다. 단지, 어떤 연유에서건 내가 숨을 들이쉬고 내뱉을 때마다 자연현상이 내 안으로 드나드는 사실에 순종할 뿐이다.
뻐꾸기 울음소리와 꾀꼬리 울음소리가 숨을 내어 쉴 때 밖으로 쓸려나가는 것은 내 안에 자연이 존재함을 시사한다. 꾀꼬리와 뻐꾸기가 사는 공간, 즉 자연이 자리하는 것이다. 안과 바깥이 구별되지 않는 일체의 공간 어느 한 곳에 내가 존재하면서 자연현상 또는 초월적인 현상까지도 체험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체의 자연현상에 대한 긍정이다. 이로써 나라는 존재가 중심이 되건 자연이 중심이 되건 어떠한 일도 용인하고 동의하는 것이다.
‘숨을 더욱 멀리 내어쉰다/마을 하나 비 맞아 우거진/봉숭아꽃나무 수풀까지/쓸려나아가고조그만 산 하나/다가와 우뚝 선다’
이제는 비에 젖은 마을의 봉숭아꽃나무며 수풀까지도 내 안에서 밖으로 쓸려나간다. 어디 그뿐인가, 이들이 ‘쓸려나아간’ 자리에 ‘조그만 산 하나’가 다가와 우뚝 서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온 뒤 자연을 조금이라도 유심히 바라본 이라면 금세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비가 오고 난 하늘은 유난히 맑다. 공기가 맑기에 멀리 있는 산이 바로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있는 듯이 느껴지는 것이다. 시인의 감수성 및 예리한 관찰력은 자연현상을 아주 실제적으로 이해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자연현상을 인간의 호흡에 일치시킴으로써 이와 같은 시적인 상상의 공간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리라.
여기에서 말하는 숨을 들이쉬고 ‘내어쉰다’는 행위는 생명력을 상징한다. 생명력이라는 하나의 원칙 또는 섭리에 의해 인간과 자연은 한 통속이 되는 것이다. 생명력이야말로 인간을 자연에 결속시키고 귀속시키는 절대적인 조건이다. 또한 자연의 주인이 바로 나임을 확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산 위에 두둥실 떠 있는/흰 구름, 저녀석/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몸 안에서/뛰어놀던 바로 그 숨결이다’
마치 손오공이 구름을 타고 다니며 온갖 요술을 부리듯 신비한 정경이 펼쳐진다. 나의 숨결이 그 생명력이 구름이 되는 초월적인 경계는 끝없이 아름답다.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동양철학을 지지하는 시인의 감수성은 이처럼 아름다운 꿈의 무지개를 피워내는 것이다. (신항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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