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나를 울린 시 (15) - 그대 생각

펜보이 2007. 7. 5. 14:44
 

  그대 생각


  고정희


  그대 따뜻함에 다가갔다가 그 따뜻함 무연히 마주할 뿐 차마 끌어안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대 쓸쓸함에 다가갔다가 그 쓸쓸함 무연히 마주할 뿐 차마 끌어안지 못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어떤 것인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내가 돌아오는 발걸음을 멈췄을 때, 내 긴 그림자를 아련히 광내며 강 하나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거리에서 휘감고온 바람을 벗었을 때 이 세상에서 가장 이쁜 은방울꽃 하나가 바람결에 은방울을 달랑달랑 흔들며 강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이후 이 세상 적시는 모든 강물은 그대 따뜻함에 다가갔다가 그 따뜻함 무연히 마주할 뿐 차마 끌어안지 못하고 돌아서는 내 뒷모습으로 뒷모습으로 흘렀습니다

 

  사람은 성년이 되어가면서 누구나 아름다운 사랑을 꿈꾼다.  그리고 자신의 사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리라 꿈꾼다.  그러나 현실적인 사랑은 꿈처럼 반드시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사랑은 나 아닌 또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그렇다.  물론 꿈꾸는 사랑은 그 자체가 환상이다.  그런데 사랑할 수 있는 상대와 만났을 때는 현실이 개입된다.  꿈이 아닌 현실에서의 사랑은 생각처럼 달콤하거나 멋진 것만은 아니다.  서로가 다른 생각 및 감정을 가지고 있는 까닭이다.  상대가 나와 똑 같은 생각 및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꿈처럼 아름답게 귀결할지 혹시 모르겠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의 사랑은 대체로 얼마나 막막하고 때로는 얼마나 저리도록 가슴 아픈 것인가. 

  내가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해서 상대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보장이 없다.  설령 나를 사랑하는 상대를 만났을지라도 서로의 사랑이 진정임을 확인해 가는 과정이란 얼마나 어려운가.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진심으로 타인을 사랑하는 일은 아주 힘들어지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 자의식이 확고해질 무렵이면 순수한 의미에서의 사랑은 그렇게 간단히 이루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고정희 시인의 “그대 생각”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만의 소중한 감정의 꽃임을 말하고자 한다.  상대에게 사랑의 감정을 전하게 되면 이미 그 사랑은 실체가 사라지고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러면서 사랑이란 누군가의 그림자를 담은 강물처럼 한 사람의 가슴속에서 말없이 유장하게 흐르는 것임을 들려준다.  그러기에 그 사랑의 감정에 이끌려 다가갔으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한 채 도로 가슴에 싸안고 돌아온다는 것이 이 시의 순결성이자 아픔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그러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할지 모른다.  그게 곧 짝사랑이 아니냐고 말하고 싶어 할 것이다.  그렇다.  짝사랑이란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으로 결말이 난다.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사랑하는 이를 단지 멀찍이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너끈히 사랑임을 단언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사랑한다면서 일상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기뻐하고 슬퍼하며 괴로워하는 것보다 가슴에 담아두면서 오롯이 사랑의 감정을 키워나가는 것이 어쩌면 더 아름다울 수도 있다.  이러한 류의 사랑을 우리는 굳이 아가페적인 사랑이라고 말하지는 말자.  

  ‘그대 따뜻함에 다가갔으나 그 따뜻함 무연히 마주할 뿐 차마 끌어안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나를 이끄는 그 ‘따뜻함’을 맞아들이려 다가갔으나 망연자실한 상태로 그저 마주했을 뿐 그 따뜻함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 채 돌아왔다는 그 감정이야말로 사랑이 아닌가.  하마 자신의 감정을 행동으로 드러냄으로써 사랑하는 마음 그 순수성을 잃을까봐 그저 돌아오는 길을 택했다는 것인가.  아니면 무슨 이유에선지 낙심하여 돌아섰다는 것인가.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다. 

  ‘그대 쓸쓸함에 다가갔으나 그 쓸쓸함 무연히 마주할 뿐 차마 끌어안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이 어떤 것인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사랑하는 이가 쓸쓸한 모습을 하니 그대로 있을 수 없어 다가갔으나 망연자실 마주했을 뿐, 그 쓸쓸함을 나누어 갖지 못한 채 돌아오는 기분은 어떤 것인가.  그대의 ‘따뜻함’이나 아니면 ‘쓸쓸함’조차도 내게는 사랑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그래서 그 실체를 느끼고 싶어 다가갔으나 어쩐 일인지 낙심한 기분이 되어 돌아온다.  그대가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인 것인가.  아니면 소중한 자신의 감정이 상할까 두려운 것인가.

  ‘다만, 내가 돌아오는 발걸음을 멈췄을 때, 내 긴 그림자를 아련히 광내며 강 하나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손에 쥔 것 아무 것도 없이 돌아오다가 문득 뒤를 돌아다보니 강 하나가 따라오고 있는 사실을 자각한다.  ‘내 그림자를 아련히 광내며’라는 기막히게 아름다운 시어로 표현되는 ‘강’은 무엇인가.  인간보다 훨씬 이전부터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말없이 흐르는 존재가 아닌가.  천지가 개벽하지 않는 한 강은 그저 변함없이 흐르는 존재가 아닌가.  사랑이 어떤 이유에서건 이루어지지 못할지언정 내 가슴속에서는 강물처럼 흐름을 계속되는 것이라는 뜻이겠다.  여기에서 강은 사랑의 은유이다.

  ‘내가 거리에서 휘감고온 바람을 벗었을 때 이 세상에서 가장 이쁜 은방울꽃 하나가 바람결에 은방울을 달랑달랑 흔들며 강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속적인 모든 욕심을 버리고 나니 비로소 ‘세상에서 가장 이쁜 은방울꽃’으로 승화된 사랑이 강물 속으로 들어가 일체가 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은방울꽃은 꿈꾸는 사랑의 구체적인 형상이다.  실체화하지 못한 사랑이 가지는 그 끝 모를 서러움은 시인에 의해 이처럼 목젖이 맺히는 아름다움으로 노래된다.  서러움은 기어코 눈물을 쏟아내는 그런 평이한 아픔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이후 이 세상 적시는 모든 강물은 그대 따뜻함에 다가갔다가 그 따뜻함 무연히 마주할 뿐 차마 끌어안지 못하고 돌아서는 내 뒷모습으로 뒷모습으로 흘렀습니다’ 

사랑이란 상대로부터 확인하는 순간부터 늙어 가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가슴속에 심어 두는 사랑은 늘 피어 시들지 않는 있는 은방울꽃이 된다.  ‘이 세상을 적시는 모든 강물’ 즉, 사랑은 사랑하는 그대를 향한 내 마음의 꽃밭에서 세상이 저물도록 그렇게 자리하면서 자나 깨나 나를 지켜줄 것이다.  사랑이란 세상을 지탱케 해주는 힘이다.  비록 그것이 구체화되지 못하는 한낱 미완의, 가슴속의 사랑일지언정 말이다.

  흔히 사랑한다는 것은 남녀가 만나 서로를 좋아한다는 감정이 싹트면서 시작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감정을 상대에게 전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럼으로써 상대가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같은 부피의 사랑의 감정을 되돌려줌으로써 마침내 사랑이 성립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고정희 시인이 보는 사랑의 모습은 이렇게도 다르다.  가슴 아린 서러움 속에서 선연하게 일어서는 은방울꽃 하나, ‘이 세상에서 가장 이쁜’ 사랑이 아니랴. (신항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