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나를 울린 시 (14) - 내 사랑은

펜보이 2007. 7. 4. 10:56
 

 내 사랑은


  송수권


  저 산마을 산수유꽃도 지라고 해라

  저 아랫뜸 강마을 매화꽃도 지라고 해라

  살구꽃도 복사꽃도 앵두꽃도 지라고 해라

  하구 쪽 배밭의 배꽃들도 다 지라고 해라

  강물 따라가다 이런 꽃들 만나기로서니

  하나도 서러울 리 없는 봄날

  정작 이 봄은 뺨 부비고 싶은 것이 따로 있는 때문

  저 양지 쪽 감나무밭 감잎 움에 햇살 들치는 것

  이 봄에는 정작 믿는 것이 있는 때문

  연 초록 움들처럼 차오르면서, 햇빛에도 부끄러우면서

  지금 내 사랑도 이렇게 가슴 두근거리며 크는 것 아니랴

  감잎 움에 햇살 들치며 숨가쁘게 숨가쁘게

  그대와 뺨 부비는 것. 소근거리는 것.

  내 사랑 저만큼의 기쁨은 되지 않으랴.


  봄은 어디에서 오는가.  흔히 봄은 강남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한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면 이 땅에도 봄은 온다네’라는 노랫말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봄은 필경 강남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하리라.  강남은 아마도 중국의 양자강 이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싶다.  그 연원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옛 중국 시에서 인용되었음직하다.  우리의 경우에는 봄은 제주도 꽃 소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제주도 어느 곳에 설중매가 망울을 터뜨렸고, 이어 유채 꽃이 해변을 노랗게 물들이기 시작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봄은 남쪽바다를 건너 남녘 강줄기를 타고 서서히 북상한다.  생각해 보라.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면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정경을 하늘에서 내려다보았다 치자.  그 얼마나 장관일 것인가.  얼른 상상이 되지 않는다면 도미노 블록이 무너져 가는 장면을 연상하면 쉽사리 이해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  꽃은 봄의 전령이다.  봄이 왔음을 알리는 가장 확실한 전언인 것이다.  자연의 변화에 민감한 이라면 꽃과 더불어 새순이 움트는 나뭇가지나 풀들의 새싹으로 즐비한 양지쪽을 무심히 지나칠 수 없으리라.  거무튀튀한 나뭇가지 끝에서 말갛게 비어져 나오는 연두 빛 새순들의 그 신묘한 기상을 어찌 모른 체 할 수 있으랴.  아, 이것이야말로 힘찬 생의 찬가가 아니던가.

  송수권 시인이 보는 봄은 사랑의 향기가 넘쳐나는 연인의 계절이다.  물론 꽃이 피면 생식을 매개하는 벌이 날아드니 번식의 계절임은 분명하다.  겨우내 추위에 갇혀 움츠러들었다가 따스한 봄빛을 받으니 숨죽이고 있던 생명의 기운이 힘차게 뻗어나면서 사랑을 연주하기에 십상인 것이다.  우리 인간사회에서도 ‘봄은 처녀가 바람나는 계절’이라 표현했다.  인간 역시 뭇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사랑하기 딱 좋은 계절임을 시사하는 말이다.  그런데 송수권 시인은 역설적으로 꽃이 지는 것을 보고서야 사랑의 열정에 사로잡힌다고 말한다.  무슨 일인가.

  ‘저 산마을 산수유꽃도 지라고 해라/저 아랫뜸 강마을 매화꽃도 지라고 해라/살구꽃도 복사꽃도 앵두꽃도 지라고 해라/하구 쪽 배밭의 배꽃들도 다 지라고 해라’

  꽃이 다 지고 나면 어쩌자는 것인가.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꽃의 현란함과 향에 취해 넋이라도 잃었단 말인가.  아니, 그까짓 벼라 별 꽃들이 아무리 제 흥에 겨워 봄을 노래한다고 한들 나하고 무슨 상관이랴는 심보인가.  그렇다.  꽃들이야 저절로 만발하였다가 마침내 제풀에 지고 마는 것이 아니랴.  산마을 강마을 하구 쪽 배 밭을 불 지른 듯이 만개했던 봄꽃들이 시든다 해도 내버려두자는 심사는 예사롭지 않다.  무언가 의중에 숨기고 있는 것이 있으렸다.

  ‘강물 따라가다 이런 꽃들 만나기로서니/하나도 서러울 리 없는 봄날’

  그렇다.  꽃 나들이 나간다고, 화전을 부쳐 먹는다고 법석인들 나하고 무슨 상관이랴.  강물을 따라가다가 지는 꽃들을 만난다고 해도 전혀 슬플 일이 아니다.  감정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낙화를 보고 무심할 수 없는 이치인데도 시인은 까짓 뭐 대수로운 일이냐는 것이다.  지는 꽃을 남의 일 보듯 하는 이 심사는 대체 무엇인가.

  ‘정작 이 봄은 뺨 부비고 싶은 것이 따로 있는 때문’

  그래, 그러면 그렇지.  다른 꿍꿍이속이 없고서야 그처럼 지는 꽃에 냉담할 수 있겠는가.  드디어 다른 곳에 둔 속셈이 드러나고 있다.  제아무리 꽃이 만발하여 눈을 현혹한다고 해도 거기에 넘어가지 않을뿐더러, 그 꽃이 생을 다하여 낙화가 된다고 하여도 결코 슬프지 않다는 냉정함 이면에는 이처럼 은밀한 속내가 있었던 것이다.  뺨을 부비는 행위야말로 직설적인 사랑의 표현이 아닌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거기에 홀딱 빠져 있으니 눈부신 꽃의 행렬이 어디 사랑만 하며, 분분한 낙화가 어찌 슬픔으로 비치랴.

  ‘저 양지쪽 감나무밭 감잎 움에 햇살 들치는 것/이 봄에는 정작 믿는 것이 있는 때문’

  믿는 것이 있기에 꽃이 피는 기쁨이나, 꽃이 지는 슬픔 따위에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음을 거듭 강조한다.  사람에게는 믿는 데가 있으면 어디서나 당당하다.  그 무엇도 부러울 것이 없으려니와 아쉬울 것도 없다는 심정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저들끼리 다투듯 개화하는 봄에 나비가 꽃을 좀 희롱한다고 해서 눈에 거스를 일도 아니다.  ‘뺨을 부비고 싶은’ 내 사랑이 있으니 남의 사랑이 어디 관심사가 되겠냐는 것이다.

  ‘연초록 움들처럼 차오르면서, 햇빛에도 부끄러우면서/지금 내 사랑도 이렇게 가슴 두근거리며 크는 것 아니랴’

  생명의 기운으로 움트는 연초록 새순들은 햇빛에 눈이 시리다.  세상 밖의 풍경을 거들기 위해서라지만, 나뭇가지 곁에 봉긋하니 자취를 드러내고 있다가 마침내 봄 햇살에 간지러워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세상 밖으로 삐쳐 나오는 새순은 햇빛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마냥 부끄럽기만 하다.  사랑이 그렇다.  아무도 모르게 둘만이 은밀히 나누는 것이기에 그렇다.  사랑이란 봄빛의 부름에 나뭇가지의 움이 돋아나듯 그렇게 수줍게 크는 것이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자연의 조화가 달리 있을까.  ‘연초록 움들처럼 차오르면서’라는 소절은 탱탱한 젊음을 시사하는 멋드러진 표현임과 동시에 관능성에 대한 은유이다. 

  ‘감잎 움에 햇살 들치며 숨가쁘게 숨가쁘게/그와 같이 뺨 부비는 것. 소근거리는 것./내 사랑 저만큼의 기쁨은 되지 않으랴.’

  움이 돋는 감나무 잎이 너무도 예쁜 나머지 햇살마저 연정을 억제치 못하여 뺨을 부벼댄다.  여기에서 ‘숨가쁘게 숨가쁘게’라는 표현은 사랑의 행위에 대한 은유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사랑하는 이가 너무도 예뻐 거듭거듭 뺨을 부비면서 속닥거리는 그 행위야말로 세상사 모든 것을 잊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바로 곁에서 봄꽃이 하염없이 진다해도 까짓 하나도 서럽지 않다는 것이다. 

  사랑이란 정녕 이런 것이다.  세상의 온갖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 존재로서의 가장 선명한 증표야말로 사랑이 아니던가.  천지만물이 생동하는 봄날의 사랑이란 이처럼 순수하다.  시인은 봄꽃을 보면서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사랑의 감정, 그 순결성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신항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