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평

미술시평 (4) - 참다운 의미의 동인활동이 필요한 시대

펜보이 2007. 7. 4. 10:44
   

  참다운 동인활동이 필요한 시대


  한국 미술계에는 여러 형태의 크고 작은 모임이 많다. 출신학교에 따른 동창회 형식의 모임이 있고 동기동창의 모임도 있다. 그런가 하면 출신지역과 특정지역의 모임이 있고, 예술적인 이념 및 사상을 같이하는 모임이 있다. 또한 특정양식이나 형식에 뜻을 같이하는 모임이 있으며, 단순히 친목에 목적을 둔 모임도 있다. 뿐만 아니라 순전히 전시회만을 위해 만든 모임이 있는가 하면, 특정 작가의 문하생들로 이루어진 모임이 있다. 아울러 같은 재료를 사용하는 작가들의 모임 및 장르별로 뜻을 같이하는 모임도 있다.

  이처럼 한국미술계는 다양한 형태의 모임의 집합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모임이 많다. 왜 이토록 많은 모임이 필요한 걸까. 그리고 그 모임은 한국미술계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 미술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작가 개개인의 작업이다. 집단적인 작업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소수 또는 다수의 작가들이 모이는 것일까.

  이러한 현상이 유독 한국미술계에 국한된 것인가. 어쩌면 한국미술계에 이와 같은 형태의 모임이 생기게 된 것은 순전히 식민지 시대에 비롯된 일본의 영향이라고 보아도 좋다. 일본미술계 또한 모임의 천국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행동보다는 단체적인 행동을 통해 공동체의 일원임을 확인하는 데서 안도감을 느끼는 일본적인 문화의 한 형태인 것이다. 각 지역마다 미술단체가 조직되고 유명작가 문하생들이 또 다른 형태의 모임을 만드는 일본적인 풍조를 우리 또한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는 모임의 숫자는 물론이요, 그 활동적인 측면에서 볼 때 한국미술계가 오히려 일본미술계를 압도하고 있을 정도이다.

 미술활동에서 작가들의 모임이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은 인상파시대를 기점으로 한다. 살롱문화로 대표되는 파리의 한 문화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미술가들의 모임이 단순한 친목의 성격을 벗어나 조형적인 이념에 뜻을 같이하는 작가들의 모임으로 성격을 바꾸기 시작한 것은 인상파 화가들에 의해서였다.

  1866년에서 69년 사이 매주 금요일마다 파리 몽마르뜨르 클리치가에 위치한 카페 게르보아에서 마네를 비롯하여 바질 드가 르누아르 피사로 모네 시슬레 등의 일단의 화가들과 문학가 졸라 뒤레 리비에르 등의 예술가들이 모였다. 이들은 여기에서 변화하는 시대에 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예술의 방법론에 대해 토론하였다.

  이 과정에서 의기투합한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형태의 그룹전을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1974년 ‘화가 조각가 판화가 무명작가 협회전’이라는 명칭의 전시회를 마련했는데, 이는 아카데미즘에 봉사하는 제도권 미술에 대한 반발이면서 동시에 도전이었다. 이 전시회는 인상파의 태동에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 전시회는 처음으로 새로운 조형적인 이념에 의해 결속된 일종의 동인활동이었다. 다시 말해 마네가 살롱전에 출품했던 ‘풀밭 위의 식사’가 비판의 대상이 된데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새로운 미술운동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시대적인 요청에 의한 새로운 예술적인 이념을 고대하는 젊은 작가들이 제도권 미술, 즉 아카데미즘을 거부하는 한편 그에 대응하는 새로운 형태의 조형적인 방법론이 필요했고, 인상주의라는 전혀 새로운 미학을 태동케 한 점묘법은 그 바로 돌파구였던 셈이다. 여기에서 동인활동이 한 시대를 풍미하는 미학의 산실 역할은 물론, 대 사회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미술활동임을 자각케 했다는 점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미술에서의 모임이란 이와 같이 새로운 미학을 생산하거나 이념적인 동질성을 확인하면서 서로간의 창작활동에 어떤 식으로든지 자극을 주고받는 형태의 동인활동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미술계의 경우에는 동인활동이 단순한 친목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동인활동이 작가들의 개별적인 존재를 보호하는 하나의 울타리와 같은 역할에 그치는 것이다. 어느 특정 단체의 일원이라는 일종의 소속감이야말로 불안정한 자신의 위치에 대한 대 사회적인 보호막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한국미술계의 동인활동은 위에서 열거했듯이 아주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가령 한국미술협회라는 단체는 미술의 각 장르를 아우른다고 하지만 회원이 무려 2만 명에 달하는 매머드 모임이다. 이처럼 거대한 미술단체는 세계에서도 그 유례가 없는 아주 특이한 형태이다. 그런가 하면 각 장르별 또는 표현양식이나 표현형식에 따라 수십 명에서 수백 명에 이르는 대형 미술단체 숫자도 적지 않다. 뿐더러 두 세 명에서 십 수 명의 작은 모임은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이다.

  이처럼 크고 작은 형태의 많은 모임은 미술계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미술계의 모임은 대체로 함께 전시회를 가지는 정도로 알고 있다. 실제로 미협을 비롯하여 대다수의 모임은 일년에 한 차례의 정기 전시회를 갖고 있다. 사정에 따라 조금씩의 차이는 있으나 이러한 정기전을 통해 회원간의 유대 및 결속을 다지는 것으로 의무를 다한다. 즉 새로운 표현방법과 관련한 어떠한 특정 이념이나 사상을 생산하기보다는 함께 전시회를 개최한다는데 큰 의미를 두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기에 대다수의 전시회는 연례적인 행사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처럼 많은 모임에 전혀 참여하지 않는 이른 바 재야작가의 경우는 어떠한가. 당연한 일이지만 스스로 만드는 개인발표전이나 상업화랑 또는 미술관의 기획전에 초대받아야만 작품을 발표할 수 있을 뿐이다. 만일 어느 곳에서도 초대받지 못하면 개인발표전을 제외하고는 발표할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면 한국미술인들이 유달리 모임에 집착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전시회는 그것이 어떠한 형태가 되었든지 간에 작가가 사회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기회이다. 바꾸어 말해 작가들이 외부세계와 접촉할 수 있는 대외창구인 것이다. 따라서 전시회를 하지 못하면 작가로서의 존재를 잃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런저런 명목으로 군소 모임을 제한 없이 만드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위기감의 발로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한국에는 수십 개의 미술관과 수백 개의 화랑이 있다. 그러나 이들 미술관과 화랑에서 마련하는 기획전은 작가 숫자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더구나 이들 미술관 및 화랑에서 기획하는 개인전 및 단체전에 초대받는 작가는 한정되어 있다. 이른바 유명 인기작가들에게만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여기에 들어가지 못하는 작가들은 개인발표전을 제외하면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는 셈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개인발표전을 자주 가지면 될 듯 싶지만 그것도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개인발표전은 한 번에 천 만원 내외의 큰돈이 들어가기에 의욕과 의지만 가지고 될 일이 아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무슨 방법으로든지 전시회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만들지 않으면 안될 상황인 것이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비교적 손쉬운 방법이 바로 동인활동인 것이다. 동인활동은 혼자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여러 사람이 힘을 모아 해결할 수 있다. 동인활동을 하게 되면 적어도 일년에 한 차례는 의무적으로라도 전시회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됨으로써 일단 작가의 대외적인 활동무대가 된다. 이러한 장점 때문인지 작가에 따라서는 이런저런 모임에 참여하는데 아주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어느 작가의 경우에는 여러 형태의 단체전에만 한 해에 수 차례 참가하는 것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

  이렇듯 목적이 어떻든 간에 단체활동에 적극적인 모습을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전시회 참가는 동인활동의 본래적인 취지와는 거리가 있다. 동인활동으로서의 모임이 성립되어야 하는 일정한 조건과는 다른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바람직한 동인활동이란 새로운 조형적인 이념 및 사상을 구체화하고 실천에 옮기는데 필요한 집단적인 목소리를 내는데 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이 바로 조형적인 새로운 이념 및 사상을 대외에 천명하고 평가받을 수 있는 전시회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인상파 화가들의 집단적인 행동에서 볼 수 있듯이 같은 뜻을 가진 작가들이 집단화했을 때 대 사회적인 메시지는 강하게 부각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새로운 이념이나 사상일지라도 혼자의 목소리로는 반향이 적을 수밖에 없다. 새로운 이념이나 사상은 개인보다는 여러 사람이 함께 참여함으로써 보다 선명한 이미지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동인활동이 필요한 것이다. 만일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미학에 동조하는 작가가 한 두 명으로 그쳤다면 점묘법이라는 전혀 새로운 관점의 조형어법은 빛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많은 작가들이 동시에 새로운 이념에 공감하고 동조하여 집단적인 전시를 통해 그 세를 과시함으로써 그들의 주장이 사람들에게 명료하게 인식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 한국미술계는 이념의 부재시대라고 할 수 있다. 서구미학만을 추종해온 결과이다. 20세기 후반 현대미학의 생산기지인 뉴욕에서 더 이상 새로운 미술운동이 일어나지 않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언제나 뉴욕만을 바라보고 그 흉내내기에 바빴던 한국미술계의 자가당착인 것이다. 광주비엔날레가 서구미학의 전진기지로 전락한 현실이야말로 주체의식을 상실한 한국현대미술의 현주소를 그대로 반영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미술계는 서구미학의 실험장이거나 전초기지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왔다. 그러는 사이에 전통미술은 서서히 퇴조하고 있었다. 그 여파는 대학교육에도 그대로 미쳤다. 학부제 실시 후 한국학과가 없어지는 현상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세계화 또는 국제화라는 미명 아래 전통적인 가치, 민족적인 정서는 설 땅을 잃어가고 있다. 이러한 한국문화의 한 현상을 서구문화의 종속화라고 단정한다면 지나칠까. 뉴욕이 21세기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면서도 새로운 미술의 이념 및 사상을 생산해내지 못하는 현상에 대해 그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모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도 한국미술계의 동인활동은 아무런 대안 없이 그저 연례행사를 치르거나 친목회에 만족하고 있다. 답답한 현실에 대한 어떠한 자각도 없어 보인다. 자발적인 노력에 의한 새로운 미학에 대한 논의나 탐구는커녕 전통미학에 대한 관심조차 갖지 않고 있다. 말로는 ‘한국성’이니 ‘자생미술’을 떠들어대지만 서구미학과 확연히 구별되는 조형적인 이념 및 사상을 구현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동인활동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단지 전시회에 참여할 기회를 넓히기 위해 모임을 만들다보니 이념이나 사상에 대한 자각 및 관심을 가질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창작의 윤리성을 상실하고 있는 모임으로 그치고 있다.

  이런 식의 비생산적인 동인활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념이나 사상이 없는 그룹전이 무슨 의미인가. 설령 새로운 이념 및 사상이 아닌 기존의 미학에 순종하는 형태의 전시회일지라도 무언가 개별적인 노력의 흔적은 보여야 한다. 다시 말해 사실주의를 추종하는 작가들의 전시회일지언정 사실주의 미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 따위의 이론적인 재생산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이론적인 재생산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해마다 똑같은 형태의 작업을 내놓는 그룹 전시회라면 차라리 잠정적으로 중단하거나 아니면 전시회 형태만이라도 바꾸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자기반성이 없는 창작은 이미 생명력을 잃은 미술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부단한 자기반성 및 자기부정이야말로 창작의 첫걸음이자 윤리성이기에 그렇다. (신항섭)

                                                                                                         

<"미술신문" 2000년6월5일(제24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