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평

미술시평 (3) - 어른이 없는 시대

펜보이 2007. 7. 2. 18:28
   

  어른이 없는 시대


  지난 20세기는 인류문명사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였다.  과학의 발달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우리 자신이 인간일 수 있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자랑스럽고 또한 스스로 대견스러울 정도였다.  특히 예측이 불가능할 만큼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20세기 과학의 총아 전자문명은 인류를 전혀 새로운 세계로 인도했다.  컴퓨터가 출현할 때만 하더라도 세계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엮는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정보통신은 단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20세기말에 이르러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정보통신 수단이 등장, 세계를 하나의 촌락의 개념으로 간단히 묶어놓았다.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정보가 실시간대로 세계를 관통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처럼 빠른 과학의 발달에 열광하고 있을 때 우리는 인간으로서 가장 소중한 것 하나씩을 잃고 있었다.  과학의 발달과는 관계가 없는, 인간조건으로서의 사회적인 환경이 급격히 나빠지게 된 것이다.  가정과 사회를 유지해오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인간관계가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집단이기주의가 창궐하는 세상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삼강오륜으로 함축되는 수 천년 역사의 동양의 전통적인 인간관계가 하루아침에 붕괴된 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예에 불과하다.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겠지만 동양사회는 유교적인 도덕률 및 윤리관으로 결속되는 독특한 혈연주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동양사회는 개인주의가 발달한 서구문화를 유입하면서 유교적인 전통에 의한 혈연주의의 인간관계가 급속히 허물어지는데 따른 정신적인 공황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없었다.  그러나 서구사회는 애초에 개인주의 및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과학의 발달을 도모하고 주도함으로써 급격한 변화에도 견디는 적응력이 갖추어진 상태였다.  반면에 자연에 동화되는 것을 이상으로 여겨온 동양인의 삶의 방식은 이성적인 합리주의에 익숙하지 못했다.  혈연주의는 이성보다는 감성적인 경향이어서 과학문명을 이끌어 가는 합리주의에 적응하자면 그에 따른 준비가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기증 나는 과학의 발달속도는 동양사회로 하여금 급속한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동양사회를 지탱해온 혈연주의의 핵심인 대가족제도가 무너지고 핵가족으로 분열하는 현상도 어쩌면 서구 과학문명을 향유하려는데 대한 인과응보의 결과인지 모른다.  얻는 것이 있으면 한편에서는 잃는 것이 있다는 평범한 세상의 이치가 적용되는 것이다.  모든 사회체제를 경쟁의 원리로 몰아가는 과학문명은 인간과의 관계에서 단절을 촉진해 왔다.  과학문명에 따른 기계적인 조직사회체제가 강화되면서 인간 개개인은 기계의 부속처럼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조직 속의 나는 존재하면서도 독립된 나는 존재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뒤늦게 이러한 현실을 깨닫고 개인을 옭아매는 사회적인 조건으로부터 벗어나 개인적인 자유 및 권리를 찾겠다는 자의식이 되레 극단적인 개인주의로 발전하고 있는 것도 현대사회의 한 현상이다.

  다시 말해 획일적이고 기계적인 조직사회의 일원으로서 충실하면서 개인적인 자유의 공간을 만들려고 하다보니, 사회와 절연된 고립된 개인주의로 가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개인은 사회와의 관계는 물론 가족과의 관계에서도 전통적인 유교사회를 지탱해온 도덕적인 질서 및 윤리적인 규범으로부터도 둔감해지게 된다.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책임과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의무가 부담스러워지게 된 셈이다.  자신이 사회로부터 억압받고 소외되고 있다는 현실을 의식함으로써 자아실현의 희망이 한낱 꿈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그렇다.  산업사회에서 개인은 단지 조직체의 일원일 따름이다.  사회생활에 적응을 잘하는 사람일수록 거꾸로 사회와의 관계를 불안하게 느낀다.  그러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만한 자기희생이 따르기 때문이다.  설령 자신의 노력으로 자아실현을 이룰지라도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의 자기희생의 대가가 너무 크다는 사실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 자기희생의 대가로 주어지는 성공이 진정한 성공일 수 없다는 회의에 빠지는 것이다.  성공의 이면에는 어떤 형태로든지 가족과 주변의 희생이 자리하고 있다고 보는 까닭이다.

  우리 미술계를 돌아보자.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미술계에는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 그리고 동료끼리의 유대 및 연대의식이 강했다.  중진 원로의 위치에 있는 작가들은 후배와 제자들로부터 존경받는 입장이었다.  어디를 가나 중진 원로들의 위치는 확고히 확보되어 있었다.  중진 원로들의 언행 하나하나는 후배와 제자들의 귀감이 되었고, 그들이 쌓아온 예술세계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시 미술시장은 최대의 활황기였다.  88서울올림픽 직전에는 올림픽 특수에 힘입어 주식시장이 크게 성장, 주식투자로 돈을 번 개인들이 많았다.  서울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한국의 이미지는 크게 개선되었다.  이러한 대외적인 이미지 상승에 따라 경제 전반에 걸쳐 온통 희망적인 분위기가 팽배했다.  대단위 신도시 건설 및 해외 건설공사 등 건축경기도 활성화되었다.  수출 또한 계속 증가추세에 있었다.  자연히 실물경제가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돈이 넘쳐 났다.  그런데 서울올림픽이 끝남과 때를 맞추듯 주식시장은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많은 현금이 마땅히 갈 데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 있을 때 일본이 주도하는 세계미술시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고흐의 그림 한 점이 수 백억 원대에 팔리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넘쳐나는 돈이 유동자산으로서의 미술품 구입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듯 한국미술시장도 가파른 상승세를 탔다.  주식에서 돈을 번 사람들이 미술품에 투자하기 시작한 것이다.  과열된 미술시장은 순식간에 투기장이 돼버렸다.  유명작가들의 작품은 선금을 주더라도 제때에 구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일부 중진원로들은 주문이 밀렸다.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자 중견급 작가들의 작품까지 덩달아 가격이 뛰고 또 잘 팔려나갔다.  그야말로 미술가들에게는 엘도라도가 딴 곳에 있지 않았다.  이 당시 중진 원로들은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  어디를 가나 깍듯한 대우를 받았다.  한마디로 꿈과 같은 세월이었다.  물감은커녕 종이조차 넉넉하지 못해 작업하고 싶은 욕구를 해갈할 수 없었던 시절을 생각하면 천지개벽과 같은 변화였다.

  그런 세월이 영원히 계속될 듯 싶었고, 또 그러기를 바랐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무상한 것이다.  어느 한 곳에 정체되지 않는 것이 세상의 흐름이다.  실제로 그랬다.  그처럼 꿈같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미술시장의 호경기는 불과 삼 년 남짓밖에 가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이 때야말로 중진 원로들의 황금기였다.  중진 원로들의 존재가 가장 돋보이던 시기였다.  그후 과열된 미술경기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거품이 빠지는 상황으로 바뀐 것이다. 

  이러는 사이에 미술계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비롯하여 비디오 아트로 대표되는 각종 하이테크 아트, 설치, 사진 등 새로운 경향의 실험적인 작업이 등장하면서 전통적인 평면회화의 영역이 점차 좁아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때를 맞추듯 이러한 새로운 경향은 전통적인 평면회화를 고수해온 중진 원로들의 입지를 좁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더구나 급격히 식어 가는 미술경기는 이미 오를 대로 오른 중진 원로들의 작품 가격을 지탱하기조차 힘든 상황으로 몰고 갔다.  급기야 1998년도 IMF가 시작되면서 성장일변도로 치닫던 한국경제가 순식간에 허물어지는 상황에 들어갔다 미술품의 주요 콜렉터를 이루던 전문직종과 중소기업이 일시에 몰락, 미술품 가격이 급락하는 현상까지 일어났다.  미처 수요를 대지 못하던 중진 원로들의 작품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고 가격은 급락했다.  작가에 따라서는 호황기에 비해 70-80%까지 떨어졌지만 실제로는 환금조차 힘들었다.  이후 중진 원로들의 모습이 미술계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최근 수년 동안은 일부 중진 원로들의 근황마저 알 수 없는 형편이 됐다.

  간혹 들리는 얘기에 의하면 어떤 원로 작가는 수 년 이래 소품 한 점도 팔아본 일이 없다고 한다.  그림이 팔리지 않으니 주머니가 옹색한 나머지 아예 인사동 근처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얘기다.  일부 원로들은 그래도 후배 및 제자들의 전시회가 열리는 날에는 어김없이 오픈식에 참석하여 테이프 커팅으로 건재를 과시하기도 하지만, 90년대 초 한창 잘나가던 원로들 일부는 인사동에서 모습을 본지 참으로 오래됐다.  인사동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미술협회의 커다란 연중행사인 미술대전을 비롯하여 각종 공모전에서 단골로 등장하던 심사위원 명단에서도 중진 원로들의 이름이 사라진지 오래다.  공모전 심사위원 면면을 보면 40대 작가가 주류를 이룬다.  예전 같으면 한창 공모전 준비에 바쁠 작가들이 어엿한 심사위원 자격으로 중진 원로들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미술관 및 상업화랑에서 열리는 기획전에서도 중진 원로들의 작품을 찾아보기 어렵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중진 원로들이 설자리가 없는 것이다.  미술계의 분위기가 그렇게 변하고 있다.  잘 나가던 때 문전성시를 이루던 화상 후배 제자 기자도 화실을 찾는 일이 거의 없다.  한마디로 오늘의 한국 미술계에는 중진 원로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어른이 없는 사회가 된 것이다.  노인이 푸대접받는 것은 우리 사회 전체적인 현상이긴 하다.  미술계라고 특별히 달라야 된다는 의무조항이 있을 수 없다.  사회현상의 하나로 받아들이면 그뿐인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간단히 생각해도 되는 것일까.

  어쩌면 어른이 없으면 간섭하는 사람이 없으니 홀가분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일이 꼬이고 답답할 때면 어른의 지혜와 슬기가 필요하다.  경험보다 확실한 스승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최근 미협의 분란 사태만 해도 그렇다.  잘 잘못을 따지고 바로잡을 수 있는 준엄한 존재로서의 중진 원로가 없다는 사실도 한 원인인지 모른다.  속된 표현으로 교통정리를 할 수 있는 경찰이 없기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오랜 세월에 걸쳐 쌓은 경험은 지혜와 슬기를 만들어낸다.  미협의 분란 사태가 어디 법으로 판정해야 될 일인가.  이럴 때 존경받는 중진 원로가 있다면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는 방도가 강구될 것이다.  굳이 법의 잣대로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도 슬기롭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에 그렇다.  하지만 미술계 스스로가 중진 원로들을 문전박대하고 있으니 어디서 지혜를 구할 것인가.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서만 중진 원로의 존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잠시 우리 미술계를 둘러보자.  한국을 대표할만한 작가가 과연 누구인가고 물었을 때 선뜻 ‘아무개다’라고 내세울 수 있는 원로가 있는가.  이 얼마나 얼굴 화끈거리고 쓸쓸한 일인가.  정녕 그만한 인물이 없어서일까.  그렇지 않다.  한국적인 정서를 기반으로 하여 자기 형식을 만들어낸 작가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 미술인 스스로가 원로들의 작품세계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함으로써 한국미술을 대표할 수 있는 원로가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세계적으로 인정받아야만 반드시 훌륭한 작가라는 시각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우리 민족의 정서를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다면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는 소중한 것이다.  내 것의 소중함을 일러주는 이도 없을 뿐더러 이를 자각하지 못하는 미술계 풍토가 한국미술을 대표할 수 있는 작가를 옹립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어른이 없는 시대의 이 어지러움과 허전함을 어찌할 것인가.

  이러한 우리 현실이 20세기 전자문명을 리드하면서 세계문화를 통합하려는 서구적인 가치의 생산물이라고 한다면 논리의 비약일까.  서구가 그렇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서구의 문화전략에 동조해온 결과가 아닐까.  머지않아 인위를 거부하며 자연과 동화되는 삶을 이상으로 여겨온 동양적인 가치가 온당한 평가를 받을 날이 오리라고 본다.  자연을 파괴하는 과학의 발달에 정면으로 맞서는 세계적인 환경운동의 귀착점이 동양적인 가치와 일치하는 바가 많기에 그렇다. (신항섭)

                                                    

<"미술신문" 2000년 4월20일자(제24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