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집

나비 꿈 (29) - 성에

펜보이 2007. 7. 6. 22:38
 

  성에 冰花

 

  깊고 깊은 산골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총각이 있었다. 총각은 나무를 베어다 숯을 굽고 있었다. 총각은 건강하고 미남이었지만 산골에서만 살아온 탓에 글 한자도 읽을 수 없었다. 총각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숯가마에서 숯을 굽는 일이 전부였다. 고개를 몇 개나 넘어가야 하는 먼 읍내 시장에서 숯을 팔아 어머니를 봉양하고 있었다.

  돈도 없었다. 숯을 내다 팔아보았자 겨우 두 식구 살아가기에도 빠듯할 정도였다. 그래도 총각은 큰 욕심 내지 않고 그나마 굶지 않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겼다. 총각은 점차 나이가 들어 장가를 가야 될 때에 이르렀다. 그러나 깊은 산골에서 숯이나 만들고 있는 총각에게 시집오려는 처녀는 없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총각은 혼기를 놓치고 노총각이 되었다. 노총각은 이제 장가가는 일은 아예 잊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도 노총각은 사흘 후에 열리는 읍내 장에 내다 팔 숯을 굽고 있었다. 아주 잘생긴 참나무를 베어다가 가마에 쟁여 넣고는 불을 붙여 숯을 굽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숲 속으로 산과일을 따러 내려오던 선녀 하나가 이 광경을 보았다. 선녀는 숯을 굽고 있는 노총각의 시름을 달래주고 싶었다. 그래서 어여쁜 처녀 모습으로 단장하고 숯을 굽고 있는 노총각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공손히 인사를 하고는 ‘추워서 그런데 잠시 불을 쬘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노총각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눈부시게 아름다운 처녀를 보면서 꿈이 아닌가 싶었다. 노총각은 황급히 일어나 처녀를 숯가마 옆에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처녀는 말없이 한 동안 숯이 익어 가는 숯가마 옆에서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노총각은 너무도 황홀했다. 처녀에게서 풍기는 야릇한 향은 숨을 막히게 할 정도였다.

  얼마가 지났을까. 처녀는 ‘몸을 따뜻이 녹일 수 있도록 해주어 고맙다’며 춤으로 보답하겠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처녀는 숯가마를 돌며 천천히 춤을 추기 시작했다. 노총각으로서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치 선녀가 춤을 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춤추는 처녀를 자세히 보니까 맨발이었다. 노총각은 얼마나 발이 시려울까 싶어 숯가마에서 따뜻한 재를 퍼다가 춤추는 처녀 발밑에 깔아주었다. 처녀는 따뜻한 재 위에서 나비가 날아다니듯 아름답게 춤을 추었다.

  노총각이 춤에 취해 잠시 넋을 놓고 있을 때 처녀는 춤을 멈추더니 홀연히 숲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노총각은 처녀가 눈앞에서 사라진 사실을 알아차렸다. 노총각은 아무리 생각해도 백일몽을 꾼 기분이었다. 노총각은 집에 돌아와서도 처녀의 아리따운 자태가 머릿속에 맴돌아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음 날 노총각은 새벽같이 한달음에 숯가마로 갔다. 꿈이 아닌가 확인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결코 꿈이 아니었다. 아, 숯가마 주변에 깔린 검은 재 위에 또렷이 드러난 처녀의 발자국에는 신기하게도 꽃보다 아름다운 갖가지 모양의 하얀 얼음 꽃이 얇게 덮여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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