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평

미술시평 (2) - 낭만에 대하여

펜보이 2007. 6. 29. 16:44

  

 낭만에 대하여


  세상이 점차 복잡해지고 있다.  폭발적인 인구증가는 지구가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이미 넘어서고 있다는 얘기가 실감날 정도이다.  하지만 인구가 급증하는 것은 차라리 자연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과학문명의 눈부신 발달에 따라 파생되는 갖가지 문명의 이기들이 세상을 복잡하게 만드는 데 있다.  생활의 안락함과 편리함을 내세워 만들어내는 문명의 이기들은 오히려 인간 삶을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차량이야말로 대표적인 문명의 이기이면서 지구를 복잡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다.

  세상이 복잡해지면 인간의 감정은 메마르고 인심은 각박해지게 마련이다.  여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만큼 살기가 힘들어진다는 얘기다.  문명의 이기들로 하여금 복잡해지는 만큼 인간관계 또한 복잡해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사회의 구성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들 간의 관계는 복잡하게 얽히게 마련이다.  이렇게 되면 네 것, 내 것을 가르는 일이 생기게 된다.  소유의 관계를 분명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한정된 땅덩어리 안에서 인구가 많아지면 그에 반비례하여 개개인이 차지할 수 있는 땅의 면적은 당연히 좁아질 수밖에 없다.

  어쩌면 시간이 흐를수록 인심이 각박해지고 있는 현상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지 모른다.  물론 개개인이 차지할 수 있는 땅의 면적이 좁아진다고 하여 당장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교통체증과 같이 한정된 공간에 수용범위를 넘어서는 물량증가는 생활의 불편함을 가져오게 된다.  생활이 불편지면 그 원인을 찾게 되고, 그 원인이 인구증가에 있다고 판명된다면 이때부터 사람들은 인구가 많다는 사실에 심리적인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  이로 인해 내가 차지할 수 있는 공간 또는 소유할 수 있는 물질의 양을 늘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러한 형태의 소유개념이 보편화된 현대사회에서 인심이 사납게 느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인심이 각박해지는 곳에서는 여유 있는 인간관계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지난 시절을 돌아볼 때 가진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오히려 인심이 후했었다.  ‘콩 한 알도 나누어 먹는다’는 옛말이 있듯이 가난한 시절의 우리네 인심은 소유개념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었다.  그런데 먹을 것이 많아지고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커지는 현대에 와서 되레 인심이 각박해지고 인정이 메마르게 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러한 현실은 앞에서 말했듯이 복잡해지는 사회구조로 인해 소유욕이 그만큼 커지게 된 현상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우리 미술계만 하더라도 갈수록 각박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도무지 여유가 없는 인간관계가 서먹하게 만들고 있다.  해방 직전과 한국전쟁 직후는 우리에게는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물질적인 빈곤은 당장 세끼 끼니를 해결하기도 힘에 부치는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없는 가운데서도 이웃의 끼니를 걱정하고 그나마 조금이라도 형편이 나은 사람들은 그야말로 ‘한 알의 콩이라도 나누어 먹어야’ 마음 편한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가난과 관련한 에피소드는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적시며 막연한 그리움을 심어주곤 한다. 

  최근 문학사상사에서 나온 원로화백 백영수회상록 ‘성냥갑 속의 메시지’는 그처럼 어려운 시절 우리 예술가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는가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비록 개인적인 체험과 관련한 그 주변 예술가들의 삶의 모습에 한정하고 있으나 거기에는 끈적이는 인정이 담겨 있다.  적어도 세상이 복잡해지기 이전까지, 아니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기 이전까지는 나보다는 남을 더 걱정해주는 인간적인 정이 남아 있었다.

  당장 내일 끼니 걱정을 하는 처지일지라도 내 주머니에 몇 푼이 있으면 친구 또는 선후배 예술인들을 위해 아낌없이 내놓는 인정은 마치 한 폭의 수채화 같다.  그 시절 예술가들에게는 차 한잔으로 하루를 죽이며 막걸리 한잔에 취해 혼란한 세상을 지탱하는 듯한 예술가로서의 자부심만이 유일한 자산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예술에 대한 진정한 열정을 불태울 수 있었던 것이다.  생활의 어려움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예술의 순수성이야말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변치 않는 희망적인 메시지임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참으로 인간다운 정이 있었고 삶의 고달픔을 쓴 약으로 받아들이는 낭만이 있었다.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그 낙관적인 사고방식이 바로 예술가를 일반인과 구별지어주는 자유정신의 표상, 즉 낭만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이제 먹고사는 문제만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시절 인심이나 인정은 먹고살기 어려운 시절만도 못하다.  복잡한 세상으로 변하면서 인심은 사나워지고 인정은 메마르고 있다.  남의 행복이 나의 불행으로 여겨지고, 나의 불행이 남의 행복으로 보이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미술계도 각박한 여느 세상 인심과 다르지 않게 변하고 있다.  같은 길을 가는 동료가 어느새 경쟁상대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른바 도반이라고 할 수 있는 동료가 잘되는 것이 내 앞길을 가로막는 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예술가는 무엇인가.  예술가가 일반인들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단적으로 말해 예술가는 낭만을 파는 사람이다.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예술가상은 바로 그런 것이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관심이 없거나 어눌하여 어딘가 어설프고 안쓰럽게 보이는 존재, 그래서 힘겨워 하면 무언가 힘이 되어 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그런 존재가 예술가상이 아니었던가.  일반인들이 사회적인 규범이나 윤리에 얽매인 나머지 인간적인 속성을 숨기고 살아야 하는 반면에 그런 사회적인 조건에 크게 개의치 않고 보다 자유로운 언행으로 자신의 존재를 관철하는 예술가의 자유분방함이 오히려 멋으로 간주된다. 

  어디 그 뿐인가.  예술가는 일반인들과 다른 언행으로 말미암아 적당히 신비한 존재로 비치는가 하면 그러한 모습이 막연한 환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기에 일반인들은 때로는 사회적인 조건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본능적인 욕구를 예술가의 자유분방한 삶의 모습을 보며 해소하는 방법을 찾기도 한다.  따라서 어지간한 정도의 예술가의 비정상적인 언행은 쉽게 용인될 수 있었다.  사회가 예술가에게 보내는 관대함은 차라리 자유분방한 삶의 방식에 대한 진정한 동경심의 발로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일반인들 또는 사회가 용인하는 예술가의 자유분방함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  이는 한마디로 예술가들 사회에 한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술가들 사이에서 생길 수 있는 일들에 한하는 것이다.  만일 일반인들을 상대로 하여 사회적인 규범과 윤리를 벗어나는 언행을 한다면 그것은 용서될 수 없는 일이다.  하기야 현대와 같은 소유개념이 자리하지 않았던 가난한 시절에는 일반인이나 예술가들이 크게 다를 바 없었기에 예술가의 어지간한 탈선은 크게 문제삼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개인주의가 극도로 발달한 사회에서는 그것이 비록 예술가의 언행일지라도 사회적인 규범 및 윤리관으로부터 벗어나면 인격파탄자가 되기 십상이다.

  실제로 예술을 빙자한 예술가의 탈선행위가 사회적인 가십거리가 되는 일은 흔치 않다.  예전 같으면 그저 한바탕 웃음으로 넘기고 말 사소한 일쯤은 예술가이기 때문에 용인되는 분위기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예술가가 낭만을 파는 시대는 그렇게 지나가고 말았다. 

  이처럼 예술가에 대한 신비와 환상과 꿈과 동경과 낭만이 사라진 현실은 예술가들이 자초한 일이다.  일반인과 비교하여 구별지을 수 있는 그 무엇도 찾아보기 힘든 것이 이즈음 예술가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배금주의에 고개를 숙인 예술가들이 당당히 행세하는 세상이 되었다.  예술을 돈 버는 수단의 하나로 받아들이는 것은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보편화된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배금사상에 젖어 있다고 할지라도 예술가만은 그러한 시대분위기에 초연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일반인들의 생각이다.  예술가는 꿈과 이상을 먹고사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기에 그렇다.

  이렇게 말하면 예술가도 여느 사람과 다름없이 식솔을 거느린 가장일 뿐이고, 그 식솔들을 보살피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게 마련이지 않느냐고 반문할 지 모른다.  다시 말해 예술가라고 해서 돈에 초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항변할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자.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가들의 창작은 공산품처럼 일정한 생산적인 가치를 인정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눈에 보이는 실제가 아닌 시간의 흐름과 함께 신기루처럼 사라지거나 설령 창작의 결과물이 눈앞에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물질적인 가치기준으로 그 값을 계량한다면 공산품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그림 한 점에 들어가는 물질의 값에 노동력을 보탠다고 할지라도 그 값은 여전히 공산품에 비해 현저히 낮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  예술품이 공산품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은 가격을 인정해주는 데는 바로 일반인들이 가지지 못한 꿈과 이상이 거기에 담겨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우리는 이러한 예술가의 꿈과 이상을 정신적인 가치라고 말한다.  정신적인 가치는 물질적인 가치로 계량할 수 없는 것임은 물론이다.  사회는 이러한 사실에 공감하여 예술가의 창작과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예술가 스스로가 이러한 정신적인 가치를 물질적인 가치로 끌어내리는 일을 하고도 태연하다.  예술을 상업화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예술에도 재화의 가치가 있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재화의 가치를 앞세우는 예술이라면 그것은 이미 상업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그리고 상업화된 예술이 가는 길은 정해져 있다.  예술의 역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뜻이다.  아주 나쁜 결과를 예측한다면 예술을 더럽힌 비예술적인 역사의 주인공이 되고 말 것이다.  이런 미래를 두려워한다면 선택은 하나 뿐이다.  참다운 예술가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예술가는 낭만을 파는 직업이라고 했다.  하면, 예술가의 낭만이란 무엇인가.  사전의 정의를 빌리자면 ‘실현성이 작고 고상하며 매우 정서적이요, 이상적이고 낙천적인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다시 말해 낭만은 막연히 사회적인 규범, 즉 상궤를 벗어난 비현실적인 만행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실현성이 적으면서도 고상한 것, 또는 이상적이고 낙천적인 상태가 낭만인 것이다.  고상하고 이상적인 상태야말로 낭만이 될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예술가의 낭만은 일반인들의 그것과는 다르지 않으면 안 된다.  일반인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능력으로서의 예술을 행하는 예술가는 바로 신비적이고 환상적인 요인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한 이해가 넓어야 함은 물론 정신적인 영역으로서의 사유가 깊어야 한다.  일반인들이 미치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비전(이상)을 제시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이라고 보는 까닭이다.

  그럼으로써 일반인들이 넘볼 수 없는 신비와 환상의 울타리를 치게 되는 것이다.  신비와 환상의 울타리야말로 일반인과 구별지어주는 경계인 동시에 보호막이 되기도 한다.  그 보호막을 굳건히 하기 위해서는 낭만적인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돈을 멀리 하라는 뜻이 아니다.  다만 애써 돈을 구걸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낭만은 비현실적인 태도를 의미한다.  오늘의 현실이란 바로 황금만능주의임을 감안할 때 바로 그같은 현실에서 초연한, 그래서 고상하게 보이는 예술가의 모습을 지향하는 일이다.  이러한 모습은 예술가 스스로가 만들어가야 한다.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일반인들이 예술가의 창작에 기꺼이 돈을 지불하는 것은 바로 자신들에게 없는 낭만에 대한 동경이자 헌사라고 할 수 있다.  삶의 각박함에 찌든 일반인들은 예술가의 낭만을 통해 정서적인 안정과 정신적인 고상함을 맛보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물리적인 계산으로 일관하는 강퍅한 현실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다면 애써 모은 돈 따위는 아낌없이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예술가는 특별한 대우를 해주는 사회에 그러한 기회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신항섭)

                                                               


<"미술신문" 2000년 6월20일자 (제24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