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나를 울린 시 (12) - 두만강 푸른 물

펜보이 2007. 7. 1. 09:19
 

두만강 푸른 물


  이대흠


  파고다 공원에 갔지 비오는 일요일 오후 늙은 섹소폰 연주자가 온몸으로 두만강 푸른 물을 불어대고 있었어 출렁출렁 모여든 사람들 그 푸른 물 속에 섞이고 있었지 두 손을 꼭 쥐고 나는 푸른 물이 쏟아져 나오는 섹소폰의 주둥이 그 깊은 샘을 바라보았지 백두산 천지처럼 움푹 패인 섹소폰 속에서 하늘 한 자락 잘게 부수며 맑은 물이 흘러나오고 아아 두만강 푸른 물에 님 싣고 떠난 그 배는 아직도 오지 않아 아직도 먼 두만강 축축한 그 섹소폰 소리에 나는 취해 늙은 연주자를 보고 있었네 은행나무 잎새들 노오랗게 하늘을 물들이고 가을비는 천천히 늙은 몸을 적시고 있었지 비는 그의 눈을 적시며 눈물처럼 아롱졌어 섹소폰 소리 하염없을 듯 출렁이며 그 늙은 사내 오래도록 섹소폰을 불었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유난히도 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그만큼 흥이 많은 민족인지 모른다.  노래는 억압된 자의 것이 아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노래는 자유로운 자의 것이다.  노래는 낙관적이고 낭만적인 감정의 표현이기에 그렇다.  물론 흑인영가처럼 억압된 상황에서도 노래가 만들어진다.  그렇다고 해도 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노래라는 생각이다. 

  노래라는 형식이 있기 아주 옛날 옛적부터 인간은 자기 흥에 겨울 때는 혼자소리로 흥얼흥얼거렸음직하다.  그 흥얼거림에 의사전달의 수단으로 말이 보태지면서 비로소 노래가 되었을 터인데, 여기에서 노랫말은 아주 중요한 소통의 기능을 한다.  어쩌면 상대를 향한 설득력 및 호소력이라는 점에서는 일상적인 대화보다도 한 차원 위에 있는지 모른다.  더구나 노래는 많은 사람을 동일한 감정으로 이끌어 가는 강력한 결속력을 가지고 있다.  대중가요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한 시대의 감정을 주도하기도 한다.

  시인 이대흠의 “두만강 푸른 물”은 지난 반세기 가까이 우리 민족의 심금을 울려준 대중가요의 정서를 현실적인 상황에 일치시킴으로써 전혀 새로운 감흥을 일으킨다.  이 시는 어느 면에서 김정구의 흘러간 대중가요가 만들어 놓은 정서보다 훨씬 깊고도 아득한 슬픔으로 젖어든다.  김정구의 ‘두만강’은 옛 시절의 임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노랫말이 가리키고 있듯이 분단의 아픔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노래였다.  전형적인 대중가요의 요건을 갖추는 한편, 시대상황을 적절히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국민적인 가요로 사랑 받고 있다.

  이대흠의 “두만강 푸른 물”에서는 분단의 현실적인 아픔이 감춰지고 있다.  반면에 대중가요 ‘두만강’이 만들어 놓은 비극적인 분단의 아픔에 대한 애절한 정서를 바탕에 깔고 있다.  이처럼 간접적인 어법은 되레 헤어진 임을 그리워하는 따위의 대중가요의 직설적인 어법과 다른 호소력으로 우리를 하염없는 슬픔의 강으로 몰아간다.  노랫말 없이 섹소폰 소리가 만들어내는 그 애잔한 멜로디 때문인가.  아니다.  목메어 그리워하다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모든 것을 체념해버린 뒤의 그 썩어 문드러진 감정이 지어내는 소리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세상의 모든 슬픔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생이별은 그야말로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다.  그런 억장 무너지는 상태로 반세기를 넘기고도 끝내 기다림을 접을 수밖에 없는 이의 체념보다 더 무거운 슬픔이 어디 있으랴.  모르긴 모르되 ‘늙은 섹소폰 연주자’는 분단의 비극을 몸소 겪고 있는 장본인이지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귀가 아프도록 들어온 유행가 한 곡조가 어찌 그처럼 출렁이는 물결처럼 모여드는 사람들의 심금을 파고들 수 있으랴.

  서울 파고다 공원은 3.1운동의 근원지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노인들의 휴식처가 되었다.  도심 한 가운데 섬처럼 자리한 조그마한 공간이 마땅히 갈 곳 없는 노인들의 아지트가 된 것이다.  그 곳에 가면 왕년에 한 가닥 하던 악사들이 나와 노인들의 꺼져 가는 신명을 부채질하는 광경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매사에 흥을 잃은 노인들을 상대하다보니 호응이야 그리 대단치는 않지만 내 설움 남의 설움 한데 섞어 한 곡조 엮어내는 노악사들의 연주는 음미할 만한 깊은 맛이 있다.  짐짓 흥을 밖으로 드러낼 수 없어 하면서도 발장단에 맞추어 한 시름 걷어내는 노인들의 맞장구가 있기에 악사들의 연주는 스스로 신명이 난다.

  젊은 시인은 파고다 공원을 지나다가 그런 정경과 맞닥뜨렸던 모양이다.  그렇다.  굳이 시인의 감수성이 아니더라도 세상살이가 무엇인지 잠시라도 생각해 본 이라면 거리의 노악사가 멋드러지게 불어제끼는 유행가 한 소절을 무심히 지나칠 수 없으리라.  더구나 비 내리는 날의 그 축축한 섹소폰 연주라니, 그 상황을 어찌 못본 체 할 수 있으랴.

  ‘비오는 일요일 오후 늙은 섹소폰 연주자가 온몸으로 두만강 푸른 물을 불어대고 있었어 출렁출렁 모여든 사람들 그 푸른 물 속에 섞이고 있었지’

  발을 멈춘 것은 시인 자신뿐이 아니었다.  섹소폰의 애절한 음조에 자신도 모르게 이끌린 사람들이 물결을 이루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빗물 같은 무엇이 사람들의 가슴을 적셨기 때문이리라.  시인은 여기에서 섹소폰 소리를 좇아 모여든 사람들을 출렁이는 물결로 표현한다.  섹소폰 소리가 두만강 푸른 물이 되는 것이다.  두만강 푸른 물의 근원을 백두산 천지로 상정함으로써 섹소폰을 ‘움푹 패인’ 백두산 천지로 연상하는 시인의 상상력은 섹소폰 소리에 취해 모여드는 사람들을 출렁이는 두만강 푸른 물로 연결시킨다.  섹소폰의 움푹 패인 주둥이는 맑은 물이 하염없이 솟아나는 샘으로, 그리고 그 주둥이에서 나오는 애조 띤 음조는 유장하게 흐르는 두만강 푸른 물로 변환한다.  이러한 이미지 변환이야말로  예사롭지 않은 시적인 감수성의 한 증표이다.  더구나 ‘섹소폰 속에서 하늘 한 자락 잘게 부수며 맑은 물이 흘러나오고’라는 구절은 시적인 언어의 연금술이란 바로 이런 것임을 보여주는 하나의 본보기로서 족하다.  섹소폰의 축축한 음률이 맑은 물이 되는 이런 비약은 시의 고유한 영역이다. 

  ‘아아 두만강 푸른 물에 님 싣고 떠난 그 배는 아직도 오지 않아 아직도 먼 두만강’이 말하고 있듯이 유행가 ‘두만강’의 그토록 사연 깊은 정서를 그 자신의 시적인 주제에 교묘하게 일치시키는 발상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흔히 우리를 한 많은 민족이라고 한다.  구태여 지난 역사를 일일이 들추지 않더라도 분단 상황이라는 가장 현실적인 민족적인 비극 그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럼에도 반세기라는 시간은 우리의 감정을 무디게 버려놓았다.  하지만 분단의 아픔은 여전히 우리들 삶 도처에서 이처럼 불현듯이 생경하게 존재한다. 

   ‘두만강’이라는 색소폰 음색으로 바꾸어 냄으로써 어쩌면 식상했을 법도 한 흘러간 가요가 그처럼 새삼스럽게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매듯이 ‘두만강 푸른 물’ 또한 시적인 언어의 변용은 우리를 전혀 새로운 감동의 물결 속으로 인도하고 있다. 

  ‘가을비는 천천히 늙은 몸을 적시고 있었지 비는 그의 눈을 적시며 눈물처럼 아롱졌어 섹소폰 소리 하염없을 듯 출렁이며 그 늙은 사내 오래도록 섹소폰을 불었네’  (신항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