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나를 울린 시 (11) - 지붕

펜보이 2007. 6. 29. 17:01
 


  지붕


  박형준


  바람이 몹시 부는 날

  지붕이 비슷비슷한 골목을 걷다가

  흰 비닐에 덮여 있는

  둥근 지붕 한 채를 보았습니다.


  새가 떨고 있었습니다.

  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다가

  날개를 접고 추락한 작은 새가

  바람에 떠밀려가지 않으려고

  흰 비닐을 움켜쥔 채

  조약돌처럼 울고 있었습니다.

  

  네모난 옥상들 사이에서

  조그맣게 웅크린

  우는 발로 견디는

  둥근 지붕.


  사람들은 이 시대 도시인의 삶은 너무 삭막하고 각박하다고 말한다.  개개인의 삶의 공간이 유폐됨으로써 서로간의 인간적인 교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각박하고 메마른 도시인의 삶의 여건은 누가 강제적으로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라, 거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 인간의 자의적인 선택이라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비싼 땅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고안된 아파트 또는 다세대 형식의 주택구조가 이웃 간의 단절을 획책하고 나선다.  단독주택의 경우에도 타인으로부터 사생활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높은 담을 둘러침으로써 요새화해 놓고 있다.  그러고도 이웃 간의 따뜻한 정을 기대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우스운 일이다. 

  그러기에 도시인은 이웃에 무슨 큰 일이 일어나도 알 수 없고, 설령 안다 해도 그냥 모르는 체 지나치기 일쑤이다.  그처럼 차가운 감정을 가지고 사는 것이 도시인이다.  그런 도시 속에서 시골사람처럼 따뜻한 인간적인 정에 목말라하는 사람은 심신을 크게 상하게 마련이다.  그렇다.  마음이 여린 사람은 살기 힘든 곳이 현대적인 도시공간이다.  물론 가난한 사람들은 도시의 물질적인 공세 및 화려함에 치여 더욱 살기 힘들다.  없는 사람의 열등의식을 심화시키는 곳이 바로 도회지이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다.

  “지붕”은 도시의 그늘을 상징하는 시이다.  박형준 시인이 본 도회지 풍경은 우리에게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도시의 일상적인 삶의 정경일 따름이다.  새로 지어지는 집 사이에서 점점 축소돼 가는 가난한 이웃의 삶의 형편을 우리는 그저 무심히 지나친다.  우리는 그로부터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느끼지 못하는 까닭이다.  늠름하게 치솟는 아파트 단지 곁에서 납작하니 눌러앉은 허름한 블록 집 및 판자 집의 그 초라함을 우리는 그저 안쓰럽다는 정도로만 보아 넘긴다.  한마디로 남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조차 없이 메마른 인간이 되어 바쁘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우리도 더러는 하늘을 치받고 선 높다란 빌딩으로 상징되는 현대도시를 보면서 비정한 세상과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위압하듯 떡 버티고 선 빌딩 사이를 거닐 때면 인간이라는 존재의 왜소함에 스스로 위축되는 것이다.  하늘을 조각내는 빌딩들이 줄지어 선 거대도시에서 그나마 존재성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하지만 돈이 없으면 차가운 철근 콘크리트조의 거대빌딩의 그림자에도 그만 주눅들기 십상이다. 

  이렇듯이 도회지의 어두운 이미지를 시인은 눈물겨운 서정적인 이미지로 그려내고 있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지붕이 비슷비슷한 골목을 걷다가/흰 비닐에 덮여 있는/둥근 지붕 한 채를 보았습니다.’

  바람이 부는 도시는 사막이나 다름없이 삭막하기 짝이 없다.  콘크리트 건물로 상징되는 회색 빛 도시의 그 냉랭함에다 문을 꼭꼭 처닫은 도시 풍경은 그야말로 황폐한 인상이다.  거기에다가 거친 바람까지 불어대면 도시는 죽은 자의 집처럼 모든 살아 있는 존재를 배척하는 듯이 보인다.  ‘지붕이 비슷비슷한 골목’이라는 구절은 효율적인 공간 활용을 명분으로 획일화시킨 도시의 집들에 대한 인상을 상정한다.  개성이 없는 도시의 집들이 연이어 선 골목길을 가다가 돌연 ‘흰 비닐에 덮여 있는/둥근 지붕 한 채’를 보게 된다.  이와 같은 풍경은 새로운 사실이 아닌데도 시인에게는 충격적으로 보인다.

  낯선 경험처럼 느껴지는 이런 유형의 감상은 잠재적인 자의식의 발동인 동시에 무딘 감성을 향한 반기이다.  획일적인 풍경에 느닷없이 끼어드는 ‘흰 비닐’로 덮인 ‘둥근 집 한 채’는 시인의 눈에는 경이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단지 가난한 이의 집이라는 현실적인 조건에 대한 수긍이 아니라, 그로부터 세상의 그늘을 보면서 불현듯 시심을 일깨우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황으로 보아 ‘흰 비닐’은 비 막이 천막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가난한 이들이 사는 판잣집 또는 초가집을 연상하게 된다.  그런데 그 비닐로 덮인 집에 작은 새가 오버랩 된다.  도시 한 가운데 섬처럼 떠 있는 ‘흰 비닐로 덮인 둥근 집’에 작은 새의 이미지가 겹쳐지면서 전혀 새로운 정서로 바뀌는 것이다.

  ‘새가 떨고 있었습니다./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다가/날개를 접고 추락한 작은 새가/바람에 떠밀려가지 않으려고/흰 비닐을 움켜쥔 채/조약돌처럼 울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이어지는 두 번째 연은 ‘흰 비닐에 덮여 있는 둥근 지붕’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날개를 접고 추락한 작은 새’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작은 새는 도회지의 세파에 그만 낙오하고 만, 힘없는 사람을 의인화하고 있다 ‘바람에 떠밀려가지 않으려고/흰 비닐을 움켜쥔’ 작은 새는 필시 섬약하고 여린 존재이다.  치열한 도시의 경쟁적인 삶에서 그나마 떨어져 나가지 않으려는 안간힘이 ‘흰 비닐’을 움켜쥐게 하고 있다.  ‘흰 비닐’ 자체도 견고한 지붕이 아니라, 임시적일 뿐이다.  내일을 보장받지 못하는 가설의 ‘흰 비닐 지붕’이라도 놓치고 나면 더 이상 도시에서 살아나갈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조약돌처럼’ 울고 있는 작은 새는 돌풍이라도 불면 한 순간에 걷히고 말 ‘흰 비닐’의 가여운 운명에 비유된다.  하잘것없는 비닐 한 장이 그를 움켜쥐고 있는 작은 새에게는 생명의 줄이나 다름없다.  ‘흰 비닐’은 단순히 비를 피하기 위한 용도에 그치지 않는다.  도시의 삶을 지탱해주는 유일한 버팀목인 것이다.  그러기에 안간힘을 다해 그 비닐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움켜쥐고 있는 것이다.  비닐이 날아가면 그 어떤 희망적인 미래도 함께 사라지고 만다는 절망적인 위기감이 우리를 비감으로 몰아간다.

  ‘네모난 옥상들 사이에서/조그맣게 웅크린/우는 발로 견디는/둥근 지붕’이라는 마지막 연은 ‘흰 비닐’에 덮인 둥근 지붕이 놓여 있는 상황이 한 눈에 드러난다.  ‘조그맣게 웅크린/우는 발’의 그 나약한 모습은 어느 특정인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인지 모른다.  그래, 조금이라도 가슴에 사랑의 온기가 남아 있는 사람이라면 이 구절을 안으면서 어찌 울지 않을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