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평

미술시평 (1) - 영생을 약속하는 예술

펜보이 2007. 6. 28. 16:30

 

  영생을 약속하는 예술


  인간이 종교를 가지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내세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만일 인간의 삶이 현실로 종지부를 찍게 된다면 내세를 확약하는 종교는 존재성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종교는 내세를 담보로 하는 인간정신의 늪인 까닭이다.  종교는 일종의 정신적인 행위이다.  그런데도 종교는 이성과 객관성을 초월한다.  다시 말해 이성적인 판단과 객관적인 검증이 허용되지 않고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순연한 복종만이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복종의 논리 중심에는 바로 현실적인 생명의 한계를 내세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영생에 대한 약속이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실적으로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정해진 생명의 시계를 가지고 태어난다.  영생하고 싶다는 본능적인 욕구에도 불구하고 그 생명의 시간을 의지대로 조정할 수가 없다.  생명의 시간을 조정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인간의 한계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 밖의 문제인 것이다.  생명을 받고 이 세상에 태어나 일정한 시간을 살다가 죽는다는 것은 조물주의 커다란 장부 속에 이미 정해져 있는 사실이다.  인간의 두뇌가 아무리 명석하다고 할지라도 생명체에게 부여된 소멸이라는 의식을 피해갈 수가 없다.  인간의 신체적인 구조 속에 생명의 시계가 장치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 시계를 움직이는 태엽이 다 풀어지면 생명의 시간도 끝나게 된다.  그러나 종교는 그 생명의 시간이 끝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죽음은 곧 다음 세상으로의 홀가분한 이동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인간은 현실적인 모든 미해결의 문제를 내세로 미룬다.  내세에서는 현실에서 미진한 모든 일들이 단숨에 해결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내세를 확신하면서도 독립된 생명체로 존재해온 현실적인 삶의 가치에 대해서는 무심하다.  바꾸어 말해 죽은 다음에 이어지는 저 세상만을 고대할 뿐 자신이 떠나고 난 현실의 자리, 즉 죽음 이후의 현실적인 자리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  현실을 떠난다는 것은 내세와의 단순한 자리바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이 세상은 내가 존재하기 이전이 이미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가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이 세상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과 나와의 관계는 바로 이것이다.  그러기에 내가 죽으면 나와 더불어 이 세상도 존재치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내가 죽은 다음의 현실적인 내 자리 따위가 무슨 대수랴.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종교에서 볼 때 허무주의에 다름 아니다.  아니, 종교적인 차원의 관점이 아니더라도 그것은 너무도 안일한 생각이다.  한마디로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답지 못한 생각인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자의식이 없다는 것은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책임을 외면하는 일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백년 가까이 산다고 했을 때 인간은 그 기간동안 한 독립된 인격체로서 많은 일들을 하게 된다.  그 일들이란 모두가 사회생활과 결부된 것들이다.  무엇보다도 인간으로서의 가장 큰 일은 종족번식이라는 생명체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내가 부모에 의해 태어날 수 있었듯이 나로 인한 또 다른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번식행위를 의무적으로 치러야 한다.  이러한 행위는 이 세상에 태어난 나 자신의 존재성에 대한 명백한 증거이다.  생명의 고리를 이어간다는 것은 생명체로 태어나도록 해준 사실에 대한 엄숙한 약속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종족번식의 의무를 완수하는 것으로써 책임을 다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인 동물로서의 인간은 인간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그 역할이 자신에 의해 선택적으로 이루어지든, 아니면 사회가 강제적으로 맡기든 간에 일단 그에 대한 소임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사회에 편입된 데 대한 의무인 까닭이다.

  예술가는 인간사회가 만들어낸 아주 특수한 존재이다.  단순히 먹고살기 위한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예술가야말로 인간의 이상적인 삶의 한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예술은 일상사와는 다른 차원의 감성적인 행위에 결과한다는 점에서 현실로부터 초월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예술가의 행위 자체가 사회적인 규범으로부터 얼마간 벗어날 경우에도 사회가 그를 용인하는 것은 그 초월적인 지위에 대한 인정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초월적인 지위는 초법적인 것은 아니다.  단지 법 테두리를 갖기 이전 단계의, 사회의 묵시적인 합의의 한 형태일 따름이다.  이처럼 사회적인 규범으로부터 초월적인 지위를 누리는 예술가의 입장에서는 그 자체를 특권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무조건적인 혜택은 없다.  사회로부터 초월적인 지위를 인정받는 그 이면에는 그에 상응한 사회적인 기대치가 자리한다는 사실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초월적인 지위가 오히려 예술가에게는 속박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는 이를 속박으로 생각하지 않고 예술가에 대한 적절한 사회적인 예우일 뿐이라고 여긴다.

  오늘 우리 사회는 예술가들로 넘치고 있다.  그리고 어디서나 예술가는 대접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예술가를 단지 장인으로 취급하던 시절에 비하면 그야말로 천지개벽이라고 할만한 변화이다.  이렇듯 예술가를 대우하는 사회적인 인식의 변화는 예술가가 범람하는 세상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예술가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에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보다 현실적인 눈으로 예술가를 보게 된 것이다.  초월적인 지위를 인정하는 대신에 사회에 대한 기여를 기대하는 것이다.  희소가치가 줄어든 탓일까.  아니다.  예술가에게는 이 세상을 아름답게 꾸밀 수 있는 전권이 부여된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는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미의 질서를 세워야 한다는 요구가 선행한다.  다시 말해 창작이라는 전혀 새로운 미의 세계를 구현해야 한다는 단서조항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요구에 응답하지 못하면 예술가로서 누릴 수 있는 초월적인 지위는 주어지지 않는다. 

  오늘의 세상은 과거처럼 예술가의 괴팍한 행위를 무조건 용인하는 시대가 아니다.  예술가로서의 책무만을 따지는 것이다.  그러한 책무를 다했을 때만 초월적인 지위를 용인하고 찬사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미술인들 상당수는 이러한 변화하는 사회적인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미술가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초월적인 지위를 인정받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생각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다.  진정한 예술가와 그렇지 못한 예술가를 구별할 줄 아는 냉철한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누가 진정한 예술가 여부를 구별할 수 있느냐고 물을 것이다.  소위 미술을 비평하는 전문가 집단인가, 아니면 언론 또는 화상인가.  그도 저도 아니라면 미술을 돈과 바꾸는 애호가들인가.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회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다면 세상의 가치평가 기준에 왜곡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때로는 황금의 위력에 눌려 세상의 가치를 잘못 평가하는 수도 없지 않다.  가령 로비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고 있는 불공정 게임이 그러한 부정적인 경우에 속한다.  무엇보다도 교묘한 상업적인 술수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는 불공정 게임이야말로 세상의 가치 평가 기준을 흐려놓는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사회는 반드시 불공정 게임의 승리자를 가려내는 자체 정화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비록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일지언정 옳고 그름을 분별해내는 비평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사회적인 장치가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준엄한 역사적인 심판이 그것이다.  불공정 게임의 희생자들이 그래도 세상에 대해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도 역사적인 심판이라는 자체 정화장치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현대에 와서 여러 예술 장르 중에서도 미술은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화랑이나 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가 이를 반영한다.  무엇보다도 돈을 지불하며 미술품을 구입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현상은 미술(예술)에 대한 사회의 상징적인 애정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미술품 구입이야말로 예술가만의 정신적인 산물로서의 특별한 가치를 인정하는 실질적인 표시이기에 그렇다. 

  미술품을 구입하는 것은 예술적인 가치에 대한 막연한 환상과 관련이 있다.  구입하는 사람 스스로의 안목에 의해서든, 아니면 제삼자에 의한 평가를 전적으로 신뢰하든 간에 예술적인 가치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구매 동기를 유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술품을 구입하는 사람의 대다수는 자신의 선택에 신뢰감을 부여한다.  그러나 미술품의 예술적인 가치에 대한 평가는 실시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미술품의 가치 평가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기준이 적용되어야만 하는 까닭이다.  미술품에 대한 가치는 시대적인 상황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무엇보다도 창작의 윤리성이 예술적인 가치를 결정짓는 제일의 조건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거기에는 조형적인 새로운 해석을 포함하여 작가의 사상이나 사회성 따위의 문제가 포함되는가 여부도 중요한 조건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조건을 살핌으로써 예술적인 가치여부가 판단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보통 사람들이 미술품의 가치를 분별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다만 타고난 감성에 의해서든 노력에 의해서든 미술품의 진정한 가치를 분별할 줄 아는 눈 밝은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들 소수의 눈 밝은 사람들은 미술품의 가치여부에 대한 평가 자리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현상은 미술가들 자신조차 예술적인 가치에 대한 분별력이 의외로 미약하다는 점이다.  아울러 미술가들 대다수는 자신의 작업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자신의 작업에 대한 막연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기는 일반인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한 환상이 지속적인 작업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어느 면에서 예술적인 가치가 있는 작업을 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미술가 자신들의 창작행위와 그 결과물을 돈과 바꾸는 행위에는 죄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만일 자신의 작품이 도무지 평가할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작가가 있다면 더 이상 작업을 지속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환상이 미술가를 양산한다.  미술가는 비록 현 시점에서는 자신의 작업이 기대치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언젠가는 누구나 찬탄을 금치 못하는 훌륭한 작품을 생산해 낼 수 있다는 끊임없는 자기암시 속에서 작업하기 마련이다.  그러한 자기실현에 대한 환상이야말로 창작의 에너지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자기실현에 대한 환상은 종교적인 믿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내세는 아닐지라도 내일에 대한 희망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긴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참으로 세상을 넓게 그리고 멀리 보는 작가는 내세를 믿지 않는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내세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한 작가로서의 생명이란 바로 생명체로서 존재할 수 있는 지구 안에서 끝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참다운 예술가는 영속적인 생명력이 담긴 예술품을 만들어내고자 혼신을 다한다.

  예술의 생명력은 인간을 포함한 유한한 생명체와는 분명히 다르다.  예술에는 영원성이라는 것이 있다.  종교적인 차원의 인간생명이 무한하듯이 예술의 생명력 또한 무한한 것이다.  적어도 인간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특정인간, 즉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은 그 생명력이 영원할 수도 있다.  그 영원한 생명력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예술가 스스로가 창조해낸 초월적인 지위인 것이다.  

  예술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는 작가는 자신의 사후평가를 가장 두려워한다.  다시 말해 역사적인 심판을 무서워하는 것이다.  자신이 떠난 자리에 남겨지는 작품들은 세상의 온갖 냉엄한 비판적인 시각을 피할 도리가 없다.  여기에서 자기생명력을 부여받지 못한 작품은 생명체가 한 줌의 흙으로 소멸하듯이 역사의 시간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이러한 결과는 전적으로 예술적인 가치로서의 영원한 생명력을 담지 못한 작가의 책임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예술가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가혹한 심판이야말로 역사의 무관심이 아닐까.  이를 참으로 두려워하는 작가만이 예술이라는 거룩한 이름과 함께 영생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항섭:미술평론가)

                                                               

<"미술신문" 2000년 8월5일자(제24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