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나를 울린 시 (9) - 겨울 강 가에서

펜보이 2007. 6. 27. 14:14
 


 겨울 강가에서


  안도현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 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세상 어느 것 하나 무심히 생긴 것은 없다.  저마다의 필연적인 연유를 가지고 존재한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평등하다고 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존재의 필연성이야말로 이 세상 자체를 성립시키는 요인이다. 

  예로부터 수많은 문인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어온 강은 그 존재이유가 너무도 선명하다.  이 세상의 온갖 생물체가 필요로 하는 물을 실어 나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큰 나무며 작은 꽃나무 그리고 땅바닥에 낮게 엎디어 사는 풀뿌리까지 적셔주는 것이다.  이렇듯이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물길이 다름 아닌 강의 존재성이다.  그러나 강이 존재하는 방식을 보면 예사롭지 않다.  단순히 물길로서의 의미만으로 한정하지 않는다.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강의 태도는 세상의 이치에 순연히 복종하는 듯하다.  가로막고 나서는 자가 있으면 기꺼이 비켜간다.  도무지 세상사 거슬리는 일이 없다는 투다.  그러면서도 여기저기에서 끼어드는 작은 물줄기를 일일이 거두어 들여 마침내 큰 바다에 풀어놓는다.  드넓은 바다의 생물들을 키우려는 것이다.

  그러나 안도현 시인이 보는 강은 그런 자연의 법칙에만 순응하는 모습에서 벗어나 있다.

강은 스스로 사고하고 자의적인 행동을 할 줄 아는 인간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자신과 어떤 투로든지 연관성을 가진 또 다른 존재와의 따뜻한 제휴를 모색하는 강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존재성을 스스로에게 환기시키고자 한다.  그냥 스쳐 가도 그뿐인 자연의 어떤 현상조차도 가볍게 보지 않는다.  자신과 어떤 식으로든지 연관성이 있는 존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거꾸로 그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는 연역의 논리를 가지는 것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삶에 대한 관심이다.  강은 삶이 얼마나 쓸 만한 가치가 있고 아름다운 일인지를 이웃하는 자연, 즉 또 다른 자연현상을 통해 확인하려는 것이다.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강의 눈(眼)을 빌려 눈(雪)을 어린아이로 보는 시인의 눈(眼)이 얼마나 투명한가.  이로부터 시인의 눈은 강의 눈 뒷켠으로 물러선다.  강은 겨울을 겨울답게 그려내는, 눈 내리는 풍경이 결코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는다.  ‘어린 눈발들이’ ‘강물 속으로 뛰어 내린다’는 도입부부터 강의 시적인 상상력은 일상성을 건너뛴다.  그토록 어린 눈발들이 하필이면 내리는 즉시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강물 위에 내리든 산에 내리든 눈이 내린다는 것은 누가 어쩌지 못할 자연현상이건만 강은 그러한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철없는 아이들처럼 무심히 뛰어내리는 ‘어린 눈발들’을 그저 속절없이 보고 있을 수가 없어 궁리 끝에 ‘이리저리 자꾸 뒤척이고’ 있다.  혹시 물줄기의 흐름이라도 바꿔보면 어린 눈발의 모양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을까싶어 몸을 뒤척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수고가 쓸모없는 짓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여기에서 시인은 세차게 흐르는 강물소리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세찬 강물소리는 여울목을 지난다던가, 아니면 바람이 부는 탓이라는, 엄연한 자연현상의 결과임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어린 눈발이 무심히 강물로 뛰어내려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운 나머지 몸을 뒤척임으로써 생기는 소리가, 바로 강물소리라고 단언하는 시인의 시적인 상상력이라니...  강물소리와 소리 없이 강물 위에 뛰어내려 소멸하는 눈발을 그럴싸하게 연관 짓는 시인은 자연현상에 전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강은,/어젯밤부터/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린 눈의 무심한 투척을 보다 못해 몸까지 뒤척여가며 그 모습을 온전히 지켜주고 싶었지만, 그러한 노력이 단지 ‘세찬 강물소리’로 끝나고 말았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그러고 나서 강은 밤새 궁리 끝에 기어이 절묘한 방법을 착안해내는 데 이른다.

  강은 밤잠을 이루지 못하면서까지 어린 눈발을 살려주고 싶어 하는 데도 불구하고 정작 어린 눈발은 ‘철없이 철없이’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기를 멈추지 않는다.  어린 눈발의 철없는 모습에 비해 강은 얼마나 의젓하고 의연한가.  여기에서 강은 모든 생물체를 키우는 대지가 된다.  아니 눈발을 어린애로 보는 어머니가 된다.  어머니의 심정으로 천진무구한 어린 눈발을 응시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시각은 새삼 존재에 대한 성찰의 눈을 상징한다.  모성본능으로 세상을 응시하는 대지의 그 넉넉한 시야는 세상을 온통 아름다움으로 변화시키는 마술사와 다름없다.

  강은 급기야 ‘어린 눈발’을 제 몸으로 받아내는 방법을 강구해내었다.  바로 발밑이 존재를 삼키는 허무의 강이든 말든 그저 장난삼아 뛰어내리는 그 무심함, 그 순수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마침내 자신의 몸을 얼리기로 한다.  스스로가 언 몸이 되어서야 비로소 어린 눈발의 안전한 하강, 즉 객관적인 존재확인을 가능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강물을 얼리는 행위는 순수한 모성의 본능이자 삶의 지혜를 상징한다.  강물이 어는 이유 또한 단순히 영하의 차가운 날씨 때문이 아니라, 강 스스로의 자각에 의해 ‘어린 눈발들’을 온 몸으로 받아내기 위해서이다.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는 구절이 주는 명료한 이미지는 그 어떤 완고한 고정관념도 허물 수 있는, 이 시가 지닌 힘인 동시에 설득력이다.

  이것이야말로 시인이 보는 세상의 진실이다.  물상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는 자연현상만으로는 부족하다.  강물소리와 강물이 어는 이유가 철없이 뛰어내리는 어린 눈발을 온전히 받아내기 위해서라는 전혀 다른 시각을 통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가를 일깨워주는 것이다.  (신항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