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나를 울린 시 (10) - 물소리를 꿈꾸다

펜보이 2007. 6. 28. 16:04
 

 물소리를 꿈꾸다


  이정록


  번데기로 살 수 있다면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한겨울에도, 뿌리 끝에서 우듬지 끝까지

  줄기차게 오르내리는 물소리

  고치의 올 올을 아쟁처럼 켜고

  나는 그 숨소리를 숨차게 쟁이며

  분꽃 씨처럼 늙어갈 것이다

  고치 속이, 눈부신 하늘인 양

  맘껏 날아다니다 멍이 드는 날갯죽지

  세찬 바람에 가지를 휘몰아

  제 몸을 후려치는 그의 종아리에서

  겨울을 나고 싶다.  얼음장 밑 송사리들

  버드나무의 실뿌리를 젖인 듯 머금고

  그때마다 결이 환해지는 버드나무

  촬촬, 물소리로 울 수 있다면

  날개를 달아도 되나요?  슬몃 투정도 부리며

  버드나무와 한 살림을 차리고 싶다

  물오른 수컷이 되고 싶다


  예술가는 상상력으로 먹고산다.  상상력은 창작의 원천이다.  이전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세계를 꿈꾸고 그 꿈을 현실로 가져오는 일이야말로 창작이다.  예술가의 상상력이란 대체로 아름다운 세계를 지향한다.  그러나 때로는 전혀 엉뚱한 세계를 꿈꾸기도 한다.  그 엉뚱함이 예술로 승화될 때는 한 세상을 감동과 놀라움으로 채우게 된다.  그럼에도 보편적인 예술의 형태는 지순한 아름다움으로 일관한다.  예술이 우리들과 손을 잡게 되는 것은 바로 아름다움이 선사하는 감동에 있다.  마음을 울리게 하는 아름다운 창작의 세계는 감동으로써 우리에게 인사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시각적으로 분별할 수 있는 형태적인 것, 즉 시각예술로서의 미술에 있는가 하면, 귀로 느끼는 청각예술인 음악에도 있고, 그리고 지적인 이해를 통해 지각하는 문자예술인 문학에도 있다.  문학에서 아름다움은 대체로 서정성을 통해 지각된다.  주관적인 감정에 의해 전개되는 정서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서정성은 아름답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따라서 문학적인 아름다움이란 서정미로 결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서정미는 순결한 정신, 그리고 순수한 감정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순결한 마음의 눈으로 세상과 마주함으로써 서정미를 일구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시인 이정록이 세상을 보는 방식은 그야말로 순정하다.  “물소리를 꿈꾸다”라는 제목이 시사하고 있듯이 세상을 보는 방식이 참으로 순수하다.  일체의 고정관념을 떠나 아주 맑게 닦은 시적인 감수성으로 세상을 응시하면서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투시하는 감각이 예사롭지 않다.  번데기와 버드나무라는 두 개의 모티프를 통해 전개되는 이 시는 마치 그림으로 그려가듯이 조형적인 구조가 탄탄하다.  다시 말해 시의 이미지는 애매하고 모호한 구석이 없이 낱낱이 드러난다.  단순한 상상의 공간이 아닌 현실공간에서 지각할 있는 구체적인 사실로 그려지는 까닭이다.  다만 우리의 시지각으로 인지되지 않는 사실을 마치 눈으로 보고 있는 듯이 느끼도록 하고 있다.  시적인 상상력을 현실에 일치시킴으로써 꿈과 현실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현실에 바탕을 두면서도 그 현실을 뛰어넘는 조형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시적인 상상력이다.  이와 같은 그의 시적인 조형감각은 필경 창조적인 영감의 선물이리라.

  ‘번데기로 살 수 있다면/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는 첫 구절에서 번데기를 의인화하고 있다.  이러한 발상이야말로 놀라운 시적인 상상력의 실체이다.  번데기가 되고자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버드나무 줄기를 타고 오르내리는 물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번데기가 되어 껍질 속에 움을 틀면 아주 가까이 버드나무의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으리라는 상상력은 순간적인 발광체와 같아 눈이 시실 지경이다. 

  ‘한겨울에도, 뿌리 끝에서 우듬지 끝까지/ 줄기차게 오르내리는 물소리’를 듣는 재미로도 능히 한 세상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치의 올 올을 아쟁처럼 켜고/나는 그 숨소리를 숨차게 쟁이며/분꽃 씨처럼 늙어갈 것이다’며 오직 버드나무 가지를 오르내리는 물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생의 의미는 충분하다는 깨달음이 이 시의 동기가 된다.  버드나무 껍질 속이라는 제한된 아주 좁은 공간이 결코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물소리’, 즉 삶의 ‘숨소리’를 귀담아 듣는 일만으로도 몹시 바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고치’도 만들고 어느새 ‘쪼글쪼글하게 골이 패인 분꽃 씨처럼 늙어갈 것’이니, 그 일만으로도 자족할 일이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비록 ‘고치 속’이라는 좁다란 공간에 갇히는 신세가 되어 이리저리 부딪쳐 날개에 멍이 들지라도 그게 무슨 대수랴 싶은 것이다.  ‘맘껏 날아다니다’가 ‘날갯죽지’가 멍이 들면 날개를 접어둔 채 ‘세찬 바람에 가지를 휘몰아/제 몸을 후려치는 그의 종아리에서/겨울을 나고 싶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추운 겨울이면 나뭇가지들도 물을 실어 나르기를 멈추었으니, 땅 속의 버드나무 뿌리는 또 어떻게 겨울을 날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한다.  그래서 버드나무 ‘종아리에서’ 겨울을 나며 은밀히 훔쳐보고 싶다는 뜻이다.  그렇다.  ‘얼음장 밑 송사리들/버드나무의 실뿌리를 젖인 듯 머금고/그 때마다 결이 환해지는 나무’는 바로 고치, 즉 시인이 훔쳐보고 싶은 버드나무의 또 다른 비밀이다.  나뭇가지는 겨울 추위에 물을 실어 나르지 않지만 뿌리는 땅 속에서 여전히 생명의 작용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버드나무의 ‘실뿌리’가 송사리들의 ‘젖’이 되는 비약적인 상상력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시인의 깔끔한 감성의 촉수와 만난다.

  ‘결이 환해지는 버드나무’를 보는 그 기쁨에 그만 ‘촬촬, 물소리로 울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소극적인 존재로서의 이미지를 탈피할 수 있음을 자각한다.  더 이상 숨어 지내지 않고 생의 욕망을 지닌 당당한 존재로 나서겠다는 선언이다.  어쩌면 번데기는 물속에서 송사리에게 젖은 물리는 버드나무를 보면서 모성을 발견했는지 모른다.  버드나무의 모성을 통해 그 자신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던 남성이 불현듯 불거져 나오게 된 셈이다.  그리하여 버드나무에 ‘세들어’ 사는 입장에서 뛰쳐나와 당당히 버드나무를 상대하는 남자의 본성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이다.

  ‘날개를 달아도 되나요? 슬몃 투정도 부리며/버드나무와 한 살림을 차리고 싶다’에서 시인은 의인화된 번데기를 탈각하여 인간으로 되돌아오는 꿈에 사로잡힌다.  버드나무에 세 들어 사는 신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존재가 된다.  ‘물오른 수컷이 되고 싶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버드나무가 지닌 그 생육의 신비한 조화의 비밀을 캐냄으로써 거기에 대응하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은 생명의 건강성을 말해준다.  시인의 상상력은 평범하게 보일 수도 있는 생명의 작용에 돋보기를 들이댐으로써 이처럼 아름답고 신비한 마술에 취하도록 한다.  (신항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