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나를 울린 시 (8) - 길

펜보이 2007. 6. 26. 11:16
 

'길'


  윤제림


  꽃 피울려고 온몸에 힘을 쓰는 벚나무들, 작전도로 신작로 길로 살 하나 툭 불거진 양산을 쓰고 손으로 짰지 싶은 헐렁한 스웨터를 입고, 곰인형 가방을 멘 계집애 손을 붙들고 아낙 하나가 길을 간다.  멀리 군인트럭 하나 달려오는 걸 보고, 흙먼지 피해 일찍 피어난 개나리꽃 뒤에 가 숨는다.  흠칫 속도를 죽이는 트럭, 슬슬 비켜가는 짐칸 호로 속에서 병사 하나 목을 빼고 외치듯이 묻는다.  “아지매요, 알라 뱄지요?”  한 손으로 부른 배를 안고, 한 손으론 입을 가린 아낙이 수줍게 웃는다.  금방이라도 꽃이 피어날 것 같은 길이다.

  길은 인간에게 숙명과 같은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길이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까닭이다.  인간은 길을 통해 존재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어쩌면 인간의 역사는 길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른다.  길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오가는 데 필요한 땅위의 선이다.  오고간다는 것은 사람끼리의 교류 또는 소통을 의미한다.  교류나 소통은 사람과 사람간의 어떤 관계를 시사한다.  사람간의 관계는 바로 사회생활의 시작이다.  따라서 길은 사회생활을 가능케 하는 그 출발점인 셈이다.  

  그러면서 길은 한 개인에게는 생과 사를 잇는 줄이기도 하다.  시간과 함께 하는 줄은 생명을 상징하면서 예정된 길을 따르게 된다.  길을 따라 떠남으로써 비로소 사회적인 동물로서의 한 인간의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이다.  걸음마를 시작하여 이웃으로 나들이 가는 것이야말로 최초의 사회생활이다.  그로부터 인간은 수없이 길을 걷게 된다.  여기에서 길은 나와 이웃, 나와 사회, 나와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가 된다.  이처럼 길이 나로부터 확대되고 확장될수록 한 개인의 삶은 다양해지게 마련이다. 

  윤제림 시인은 이러한 인간의 길을 색다른 시선으로 응시한다.  시인은 자신의 길이 아닌 남의 길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본다.  작전도로를 달리는 군인 트럭과 그 길을 걸어가는 모녀의 모습을 극적으로 대비시킴으로써 예기치 못한 정황을 연출한다.  서로 아무런 상관없는 듯한 트럭을 탄 군인과 나들이 가는 모녀 사이에서 아주 따뜻한 의미의 인간적인 소통이 한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처럼 짤막한 사건을 통해 우리는 새삼 삶의 아름다움을 음미하게 된다.

  ‘꽃 피울려고 온몸에 힘을 쓰는 벚나무들,’이라는 구절에서는 단순히 생의 기운을 뿜어내는 봄의 기상을 느끼는 것 이외에 성적인 연상을 가능케 한다.  그것은 나중에 오게 되는 ‘부른 배’와 연결되는 시적인 복선으로서의 기교일 터이다.  꽃을 피우려고 한다지만 그것은 약동하는 젊음이 가지고 있는 욕망의 은유이다.  그러한 은유는 느닷없는 병사의 등장으로 인해 구체적인 현실로 바뀐다.  ‘힘을 쓰는 벚나무’와 ‘슬슬 비켜가는 호로 속’의 병사, 그리고 배부른 아낙으로 이어지는 성적인 연상기법이 이 시를 오히려 경쾌하면서도 건강한 이미지로 귀결시키고 있다.  의표를 찌르는 은유법으로 간지러운 웃음을 흘리게 만드는 것이다.

  ‘작전도로 신작로 길로 살 하나 툭 불거진 양산을 쓰고 손으로 짰지 싶은 헐렁한 스웨터를 입고, 곰인형 가방을 멘 계집애 손을 붙들고 아낙 하나가 길을 간다.’

  봄빛이 가득 쏟아지는 신작로 길, 그러나 그 길은 군대에서 만든 작전 도로이다.  어쩌면 긴장이 감돌법한 그 길로 한가한 듯이 걸어가는 모녀의 모습이 썩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 모녀의 모습은 작전도로라는 긴박한 이미지를 지우고 평화로운 정경을 만들어낸다.  ‘살 하나 불거진 양산’과 ‘손으로 짠’ 듯한 ‘헐렁한 스웨터’를 입은 ‘계집애’의 모양새는 힘겨운 삶을 시사하고 있으나 그 정경만은 평화롭다.  더구나 봄날이다.  긴 겨울 추위에서 벗어나 온갖 생명의 기운이 용솟음치는 이른 봄날 나들이 가는 모녀의 모습 그 자체로는 정겹기 그지없다.  그런데 저쪽에서 돌연 ‘군인트럭 하나가 달려오는 걸 보고’ 모녀는 얼른 ‘일찍 피어난 개나리꽃 뒤에 숨는다.’ 

  여기에서 군인트럭과 마주치는 일은 이 모녀에게는 일상적인 사실임을 알 수 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는 군인트럭을 수없이 겪어왔기에 가까이 오기도 전에 도로 뒤쪽으로 물러나 피하는 것이다.  ‘일찍 피어난 개나리’는 확실한 봄의 전령이다.  무엇이 그리 급해 철보다 일찍 피어났을까.  ‘개나리꽃 뒤에 숨는다’는 이미지는 단순히 흙먼지를 피하기 위한 행동은 아닐 듯싶다.  뒤에 등장하는 ‘병사’와의 연관성이 있는 것이다.  병사와의 연관성 또한 일상적인 것일 수 있다.  아무튼 무슨 이유에서든 철 이른 개나리꽃은 모녀의 봄나들이를 거드는 봄 풍경으로서는 제격이다

  ‘흠칫 속도를 줄이는 트럭, 슬슬 비켜가는 짐칸 호로’는 모녀와 병사 사이에 일어날 어떤 사건을 예상케 한다.  물론 병사와 모녀가 서로 아는 사이라는 암시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지나치다가 뜻 없이 던지는 농 한마디가 병사와 모녀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의 전부이다.  밑도 끝도 없이 불쑥 내던지듯 외치는 “아지매요, 알라 뱄지요?” 라는 한마디가 군인과 아낙을 매개하는 끈 역할을 한다.  그 한마디에 아낙이 수줍은 웃음으로 반응함으로써 순간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동시에 전혀 얼토당토않은 병사의 한마디는 이전까지 지탱해온 긴장을 일시에 허물면서 순간적으로 짜릿한 삶의 쾌감을 맛보게 해준다. 

  실없이 던지는 병사의 농 한마디가 이 시의 정점을 이루면서 동시에 긴장을 해소시키는 이미지의 반전으로 작용한다.  ‘한 손으로 부른 배를 안고, 한 손으론 입을 가린 아낙이 수줍게 웃는’ 모습이야말로 이 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즉 삶의 순수성에 대한 티 없는 진술이다.  단지 ‘아이를 배지 않았느냐’는 병사의 한 마디가 공연히 부끄럽게 들리는 아낙의 순수한 인간적인 모습이 사랑스럽기 짝이 없다.  이러한 아름다운 정경을 거들기 위해 ‘금방이라도 꽃이 피어날 것 같은’ 이미지로 마감하는 데서 시인의 삶에 대한 긍정을 본다.  그렇다.  이 시는 시를 음미하는 사람의 삶에 대한 의욕을 북돋우어 준다. 

  시는 인간에게는 삶의 여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길’은 숨 막힐 듯한 긴장의 연속인 현대인의 삶에 던지는 하나의 아름다운 화해의 메시지일 수 있다.  세상과의 대결구도로만 치닫는 현대인의 복잡다단하면서도 경직된 삶의 구조를 허물어뜨리는 대신, 거기에 정신 및 감정의 자유로운 유희를 감염시키는 파격이 바로 이 시가 지닌 힘이다. (신항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