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놀 黃昏
방랑시인이 고원을 걸어가고 있었다. 고원은 너무 넓어서 끝이 보이지 않았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산 하나,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았다. 다만 무릎 정도 자란 이름 모를 풀들과 들꽃들만이 땅을 덮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나무 한 그루 없으니 새 한 마리 있을 턱이 없는 데도 고원은 온통 새소리로 시끄러울 지경이었다.
방랑시인은 혹시 풀숲에 새들이 숨어 있는가 싶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소리 질러 보았지만 새는 나타나지 않았다. 방랑시인은 보이지도 않는 새소리를 진력이 나도록 들으면서 아침부터 점심때가 지나 저녁때까지 걸었다. 이른 새벽에 길을 나서기 전 간단히 요기를 했을 뿐, 점심조차 거르고 계속 걷기만 했다. 고원의 풀밭이 아무리 넓기로서니 가다 보면 양을 치는 유목민의 파오 하나쯤은 만날 수 있으려니 하고 가볍게 나선 길이었다.
하지만 막상 고원에 들어서서 걷다보니 가도 가도 지평선 뿐 사람의 그림자는 얼씬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길이 따로 있을 리 없었다. 다만 해를 방향 삼아 서쪽으로 가고 있을 뿐이었다. 하루 종일 걷기만 한 방랑시인은 몹시 지쳐 있었다. 저녁때에 이르자 더 이상 걸을 힘도 없었다. 그만 바닥에 주저 않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럴 때였다. 저만치 지평선을 가리고 있던 한 무리의 구름이 걷히고 나자 별안간 봉긋이 솟은 구릉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방랑시인은 그저 칼로 자른 듯한 지평선만 보이다가 불쑥 구릉이 나타나자 너무 반가웠다. 방랑시인은 이제 고원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남은 힘을 다해 걸음을 재촉했다. 아니나 다를까, 구릉을 마지막으로 갑자기 땅이 꺼지면서 구릉 바로 너머 아득히 절벽 아래로 마을이 납작하게 엎디어 있는 것이 아닌가.
방랑시인은 마침내 고원을 벗어났다는 안도감으로 구릉 위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기진맥진해서 눈조차 뜰 힘이 없을 지경이었다. 방랑시인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푹신한 풀 위에 눕고 보니 아주 편안했다. 온 몸이 노곤하면서 물밀듯이 단잠이 쏟아졌다. 그런데 그 때, 마치 죽은 듯이 반듯하게 누워있는 방랑시인의 코에서 한 줄기 선혈이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해님이 이를 보았다. 해님은 아무도 몰래 하얀 손수건을 꺼내 방랑시인의 코에서 흐르는 선혈을 닦아들고는 서산너머로 서서히 몸을 감추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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