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나를 울린 시(7) - "찌르레기의 노래 3"

펜보이 2007. 6. 22. 14:45
 

'찌르레기의 노래 3 '


  이가림


  지상의 오막살이 집 한 채

  그 아궁이에 기어드는 가랑잎같이

  그대 따스한 슬픔에

  내 언 슬픔을 묻을 수 있다면

  이 세상 밤길뿐이었던 나날들

  언제나 캄캄했다고

  말하지 않으리


  우리가 정녕

  생의 거미줄에 매달린

  하나가 되기 위한 두 개의 물방울같이

  마주보는 시선의 신비로 다가간다면

  번갯불 번쩍 내리쳤다 스러지는

  그 찰나

  그 영혼 속에서

  별 머금은 듯 영롱한

  눈물의 보석 하나

  아픈 땅에

  떨굴 수 있으리


  지상의 오막살이 집 한 채

  그 아궁이에 기어드는 가랑잎같이

  오늘밤

  화알활 피어나는

  그대 모닥불 품에

  내 사그라져 가는 영혼의 숯을

  태우고 말리


  아름다운 시선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 세상은 온통 아름다움뿐이다.  어느 것 하나 어여쁘지 않은 것이 없다.  사람들의 발길에 무심히 밟히는 아무리 하찮은 풀잎일지라도 가만히 눈여겨보면 그 신비한 형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은 온통 긍정의 산물이기에 그렇다.  세상에 무심히 만들어진 존재란 없다.  저마다의 필요성에 의해 생명의 숨결이 깃들이게 된 것이다.  생명체가 아닌 존재일지언정 그 고유의 형질 속에 숨겨진 필요성은 반드시 따로 있게 마련이다.  어쩌면 무생물은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는 터전이 되어주는 것으로 그 필요성을 정당화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단언하건대 이 세상에 용도 폐기된 존재는  없다.  어떤 이유에서건 나름의 존재성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  저마다의 명료한 존재이유야말로 이 세상을 가능케 하는 긍정의 증거이다. 

  시인 이가림이 보는 세상도 아름답다.  찌르레기라는 조그만 철새를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비록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아름다운 모양새는 아닐지라도 시골집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찌르레기는 인간에게는 아주 이로운 새이다.  물론 인간에게 이로움을 주는 것이 그 본디 존재이유는 아닐 터이나, 찌르레기가 농사에 해로운 벌레를 잡아먹고 산다는 사실만을 놓고 본다면 꼭 필요한 존재이다.  멋진 발성을 가진 새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단조로운 찌르레기의 노래일지라도 철이 바뀌어 떠나고 나면 허전해지는 우리의 감정 속으로 새삼 그 존재성을 들이민다.  ‘찌르륵 찌르륵’만을 되풀이하는 평이한 구어체의 노래일망정 우리 곁에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의 차이는 엄청 크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찌르레기의 존재성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찌르레기의 노래 3”은 아주 보잘 것 없는 가랑잎 하나가 어떠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 실증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지상의 오막살이 집 한 채/그 아궁이에 기어드는 가랑잎같이’라는 표현이 주는 범상치 않은 의미가 이 시의 엄숙성을 시사한다.  ‘지상의 오막살이’는 그것이 아무리 작은 집일지라도 엄연히 지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살림집을 말한다.  동시에 하잘 것 없는 집이라는 뜻도 있다.  그 하잘 것 없는 집을 덥히기 위해 스스로 ‘기어드는 가랑잎’은 불쏘시개로서의 존재성으로 그 가치를 획득한다.  물론 그 이전에 생명체의 한 부분으로서 나무를 가장 나무답게 만드는데 한몫을 했다.  그러다가 생명체로서의 시한이 다하여 낙엽이 되었을 테고, 마침내는 불쏘시개로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한다.  불에 사그라지고 말 터이지만 재가 되어 다음 나무를 무성히 가꾸는 거름으로서 그 새로운 존재성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마침내는 다음 나무로 환원하는 것이리라.

  ‘오막살이 집 한 채’를 덥히기 위해 존재의 소멸까지도 감행하는 가랑잎을 보며 우리는 엄숙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이 ‘그대 따스한 슬픔에/내 언 슬픔을 묻을 수 있다면’ 설령 지나온 시간이 견디기 힘들만큼 어려웠다 해도 세상살이가 반드시 절망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자각이다.  기쁨이 아닌 슬픔마저도 따스하게 받아들여주는 사람이 있는 세상이라면 그래도 견딜만 했다고 말하겠다는 시인의 고해가 절절하다.

  ‘우리가 정녕/생의 거미줄에 매달린/하나가 되기 위한 두 개의 물방울같이/마주보는 시선의 신비로 다가간다면’에서는 아슬아슬한 위태로움의 연속인 삶의 행로 속에서 ‘서로가 하나가 되기 위한’ 즉, 사랑이라는 그 신비로운 체험을 역설한다.  ‘마주보는 시선의 신비’는 사랑의 힘이 가지고 있는 불가해성을 뜻한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마력에 이끌리는 것이 바로 지상의 사랑이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본능으로 인지하는 사랑의 힘의 위대성을 시인은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어떠한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능히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이란 다름 아닌 사랑일진저, 그러한 사랑과 마주한다면 비록 번개불처럼 찰나에 지나지 않는 생이어도 한 존재로서의 의미는 충분히 달성하는 것이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눈물의 보석’은 사랑이 있는 삶에 대한 고마움, 다시 말해 생명체로 태어나 사랑할 수 있었다는 데 대한 보은의 눈물일 수 있다.  한 생명으로 태어나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그래서 온갖 고초가 따라 다니는 지상의 삶, 그 ‘아픈 땅’에도 진정한 감사의 눈물을 떨굴 수 있다는 것이다.

  시인의 시선을 빌리자면 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성은 사랑이다.  그러나 그 사랑은 처연하다.  그리고 비장하기까지 하다.  ‘거미줄에 매달린’ ‘두 개의 물방울’은 곡예하듯 위기감을 느끼게 한다.  거미줄에 매달린 하나의 물방울이 다른 하나의 물방울과 합쳐진다는 것은 곧 지상으로의 낙하, 즉 죽음을 의미한다.  이렇듯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하나가 되기 위해 사랑을 감행하는 그 결연함이야말로 생의 진정성이 아닌가.  그럴만한 사랑이라면 거미줄에서 떨어져 완성된 하나의 물방울로 산화하는 길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각 속에서 ‘오늘밤/화알활 피어나는/그대 모닥불 품에/내 사그라져 가는 영혼의 숯을/태우고 말리’라고 결연히 외친다.  나의 모든 것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그 뜨거운 사랑에 육체는 물론이려니와 영혼의 숯까지도 남김 없이 태움으로써 지상의 사랑을 완성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시인은 아가페 따위의 지순한 사랑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흔하디 흔한 멜로드라마 류의 사랑타령도 아니다.  사랑의 진정성을 말하려는 것이다.  더불어 삶의 아름다움을 말하려는 것이다.  사랑의 위대성을 안다면 구애하는 찌르레기의 노래를 어찌 평범하고 단조로워 싱겁다고 말할 수 있으랴. (신항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