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나를 울린 시(6) - "얼음"

펜보이 2007. 6. 22. 14:44
 


 '얼음 '


  이동순


  봄의 공세에

  산골짜기의 얼음은

  일제히 산정으로 떠밀려 올라간다

  산정에 밤이 오면

  얼음은 달빛 속에서 수정 같은 이를 드러내고

  차디차게 웃는다

  우거진 산죽의 뿌리를 껴안고

  몸을 떤다

  올 테면 와라 봄이여

  너희들이 숲을 샅샅이 뒤져 나를 찾을 때

  내 투명한 유리구두는

  이미 어디론가로 떠나가고

  없을 것이니


  세상의 이치란 참으로 오묘한 것이어서 하찮은 우리의 지식 따위로는 도무지 그 정체를 알 수 없다.  누구라도 자연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저마다의 모양새로 그 존재를 과시하는 뭇 생명체들의 신비한 삶의 방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무심함 속에 묻혀버린 생명의 신비와 그를 이끄는 대자연의 질서 또는 법칙이야말로 인간의 지성이 얼마나 얄팍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그렇다.  생명의 원리를 파헤친다는 그 잘난 현대과학으로도 도저히 풀 수 없는 세상사 이치에 감탄하게 되는 일이 허다해서 어느 때는 자다가도 번쩍 그 신비에 사로잡히곤 한다.  세상에 신비한 일이 어디 한 두 가지랴만 아주 작고 단단하며 볼품없는 씨앗에서 싹이 돋고, 푸른 잎이 나오며, 형형색색의 기기묘묘한 꽃이 피어나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어디 그뿐이랴.  다시 올 것 같지 않던 계절이 어찌 그리 정확히 때를 맞춰 어김없이 되 오는지 또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런저런 일들에 감탄하다보면 그 모든 신비를 보고 느끼며 살 수 있는 인간으로 태어난 일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새삼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생긴다.

  세상살이가 제 뜻대로 안 된다싶을 때는 잠시 사는 일 자체를 접어두고 자연과 마주할 일이다.  거기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치가 별 것 아님을 문득 깨닫게 된다.  인간의 삶이란 유별난 것이 아니어서 밤이 지나면 낮이 오고,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는 그 자연의 순리, 즉 순환의 이치에 순응하는 것으로써 그 중심에 들어설 수 있음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시인은 자연이 우리로 하여금 자연적인 삶의 진실을 일깨워주듯 우리들 한가운데서 자연으로 존재한다.  시인의 감성은 아주 특별해서 우리들이 미처 보고 듣고 느끼지 못하는 자연의 일들하며 세상사까지를 낱낱이 밝혀 삶의 지표 노릇을 자청한다. 

  이동순의 시 ‘얼음’을 보면 시인이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알듯하다.  시인은 이 시에서 아주 색다른 시각으로 계절의 흐름을 살피고 있다.  오고 있는 봄을 누가 거부할 수 있으랴마는 봄의 곁에 서 있는 겨울은 호락호락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려 하지 않는다.  순환의 법칙을 순연히 받아들이지 않고 억지로나마 시간을 끌어 이 세상에 좀더 머물고자 획책한다.  여기에서 얼음은 겨울의 상징이다.  추위와 눈으로 시작되는 계절이 겨울이다.  그러나 겨울이라는 계절의 진면목은 바로 땅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얼음이다.  어쩌면 진정한 봄은 나무뿌리까지 얼리는 겨울의 결정체, 얼음이 풀려야만 비로소 명실상부한 한 계절의 주인이 될 수 있는지 모른다.

  시인은 이러한 겨울의 속성을 아주 섬세한 감촉으로 짚어가고 있다.

  “봄의 공세에/산골짜기의 얼음은/일제히 산정으로 떠밀려 올라간다”며, 계절의 순환을 그 주체인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다툼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수성하려는 겨울에 맞서 봄은 총공세를 펼치고 있다.  그 위세가 워낙 강하여 완강하게 버티던 겨울이 마침내는 산골짜기의 얼음조차 산정으로 떠밀려 올라가는 처지가 되고 있다. 

  그럼에도 겨울은 “산정에 밤이 오면/얼음은 달빛 속에서 수정 같은 이를 드러내고” 아직까지는 건재함을 과시하려는 듯 냉소를 흘린다.  열렬한 기세의 봄기운도 차가운 밤 공기가  또아리를 틀고 있는 산정에까지는 미치지 못하니, 겨울은 쫓기는 마당에서도 태연자약하게 호기를 부리고 있다.  “차디차게 웃는” 얼음의 이미지에는 어쩌면 필경은 자리를 내주어야만 할 자신의 처지에 대한 쓴웃음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미지는 “우거진 산죽의 뿌리를 껴안고/몸을 떤다”는 표현에서 슬며시 드러난다.  산죽의 뿌리를 껴안으며 몸을 떤다는 것은 마지막 안간힘이라고 볼 수 있는 까닭이다.  거역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 계절의 변화에 저항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쓸데없는 객기일 뿐이기에 그렇다.  그래도 얼음은 산죽의 뿌리를 껴안음으로써 마지막까지 스스로의 존재를 환기시키고자 한다. 

  “올 테면 와라 봄이여”

  여기에서는 이제 마지막 결전을 눈앞에 둔 병사처럼 단호하다.  이처럼 비장한 각오로 봄에 맞서는 얼음의 존재가 처연하기만 하다.  더 이상 물러설 데 없는 곳에 이르렀으니 어떤 식으로든지 결판을 내야하는 그 운명적인 시간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봄은 기어이 오고 말 것임을 알고 있으니까.  이처럼 얼음의 적대적인 시각을 통해 우리는 시간과 운명의 존재를 거부하는 듯한 우리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의 묘미는 이처럼 일전을 앞둔 결연한 모습을 보이던 얼음이 돌연 태도를 바꾸어 봄을 속이는 전략으로 돌아서는 그 절묘한 반전에 있다. 

  “너희들이 숲을 샅샅이 뒤져 나를 찾을 때/ 내 투명한 유리구두는/이미 어디론가로 떠나가고/없을 것이니”

  봄의 공세에 정면으로 맞서봤자 그 결과가 빤히 드러나는 마당에 감쪽같이 봄을 속임으로써 다른 차원의 승리감을 맛보겠다는 얼음의 전략이 비겁하다기보다는 마냥 귀엽기만 하다.  운명에 맥없이 복종하느니보다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하는 그 도전적인 삶의 자세가 반드시 나쁜 것일까.  봄에 자리를 내주되 순순히 내주지 않고 마지막까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는 얼음의 속성은 우리 인생살이와 다를 바 없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계절의 변화를 자연의 이치에 따르는 순연한 흐름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인간사의 한 드라마에 비유함으로써 전혀 다른 감흥을 맛보게 한다.  시인의 눈을 빌어 자연을 보면 복잡하고 오리무중처럼 여겨지는 세상사를 푸는 비밀의 열쇠가 아주 가까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신항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