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 이야기

오디오 이야기 (6) - 오디오는 왜 하는가?

펜보이 2007. 6. 25. 11:46
 

오디오는 왜 하는가?

 

신항섭(미술평론가)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의 하나는 조직적인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다. 물론 일부 동물에서도 집단적인 조직력을 엿볼 수 있다. 가령 전남 천고암천에서 겨울을 나는 수십만 마리 가창오리떼가 일사불란하게 비상하는 광경을 보면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거대한 조직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단 한 마리도 조직적인 비상에서 이탈하지 않는다는 것은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가창오리 무리의 비상은 맹금류에 대한 공격적인 시위라고 한다. 강자에 대한 약자의 집단적인 힘의 과시인 셈이다. 이는 동물도 사회적인 활동을 한다는 단적인 증거이다. 물론 개미 또한 인간사회와 유사한 집단적인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은 곤충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개체독립성이 강하다. 다시 말해 인간 개개인은 사회를 지탱케 하는 최소한의 조직으로부터도 구속받기 싫어하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사회활동에 순응한다. 조직사회가 형성되지 않으면 자유의지가 강한 개체간의 대립과 투쟁을 막을 길 없어 결과적으로는 공멸하리라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소속된 사회의 일원으로 순응하면서도 항상 사회를 속박의 대상으로 여긴다. 이러한 태도는 진정한 개체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고 있음을 반증한다. 개체독립의지란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의지를 의미한다.

그런데 개체독립의지 또는 자유의지가 아무리 강할지라도 사회조직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인간사회란 더불어 살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집단적인 조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회조직에서 이탈하면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을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사회로부터 절연된 완전한 개체독립을 실현하고자 꿈꾸면서도 그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렇게 길들여져 가는 탓이다.

그렇다고 해서 개체독립에 대한 방편이 완전히 차단된 것은 아니다. 혼자만의 독립된 삶을 누릴 수 있는 방편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취미생활이다. 인간은 사적인 취미생활을 통해 사회적인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홀로 자유로운 시간을 가지는 권리를 누린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취미생활이란 여럿이서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만이 즐길 수 있는 개인적인 시간 및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형태에 한한다.

사적인 취미생활이야말로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한 자유를 행사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취미생활이란 혼자만의 삶의 기쁨을 만끽하고자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가치관의 발로이다. 개인적인 취미는 조직적인 사회생활에서 오는 그 어떤 간섭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는데, 이는 순전히 자의적인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자유의지의 결과라는 뜻이다.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함에 따라 진정한 개체 독립의 실현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취미는 어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행위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 그로부터 삶의 기쁨과 행복을 맛보도록 하는데 아주 긴요한 방법이다. 취미생활은 한 독립적인 인격체로서의 주체성을 확립해 가는 방법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사회생활이라는 틀 안에서는 주체성이 강한 개별적인 인격을 보장받기가 어렵다. 조직사회란 어떤 경우일지라도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유의지를 허용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여기에서 개인의 인격은 무시되기 일쑤이다. 이러한 외적인 억압은 자유의지가 강한 인간에게는 견딜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조직에서 이탈하지 못하는 것은 역시 인간사회는 공동체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잠시나마 외적인 억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아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취미활동인 것이다.

취미생활은 자주적인 의지에 의해 선택되는 일종의 개인적인 행복권이다. 개인적인 취미생활은 사회적인 묵계이다. 누가 침범할 수도 침범해서도 안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한다. 그러기에 조직적인 활동에서 벗어나 즐기는 개인적인 취미생활을 통해 인간은 비로소 한 독립적인 인격체로서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비록 그것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제한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오디오도 일종의 취미생활이다. 오디오 취미는 아주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이다. 오디오는 실제로 연주되는 음악을 저장해 놓은 레코드나 시디, 또는 자기테이프 따위의 소스를 재생하여 음악을 즐기는 취미인 것이다. 오디오라는 재생장치가 놓이는 곳은 일반적으로 가정의 거실이나 서재 또는 독립적인 음악실에 한한다. 즉 가족이 기거하는 주거공간에 놓이는 것이다. 그래서 사적인 취미생활이라고는 하지만 완전한 독립을 보장받기 어렵다는 환경적 요인이 때로 장애가 되기도 한다. 그렇더라도 오디오와 마주한 채 음악감상을 하는 순간만큼은 혼자만의 즐거움, 완전한 행복감에 빠져들 수 있다. 오디오를 통한 음악감상은 외부로부터의 그 어떠한 통제나 간섭으로부터도 완전히 자유로운 은밀한 기쁨이고 환희이다.

그런데 오디오 취미를 보는 사회적인 눈은 그리 관대하지 않다. 이는 음악 소스를 재생하는 장치인 오디오 기기가 고가라는데 있다. 스포츠라든가 독서, 연극 및 영화감상 그림감상, 여행, 우표수집 따위의 일반화된 취미생활에는 큰돈이 들어가지 안는 반면, 오디오는 기기 구입은 물론 소스 구입에도 적지 않은 비용이 나간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기백만원은 소요되는데다가 목돈이 요구된다. 개인적인 취미생활이라고 하지만 이렇듯이 금전적인 지출이 커지다 보니 가족들과의 마찰을 불러오기 십상이다. 하기야 보급형 오디오 정도이면 백 만원 이내로도 가능한데다가 실제로 음악을 듣는데도 큰 불편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가의 오디오를 구입하려는 데서 가족의 저항을 불러오는 것이다.

어떠한 취미생활이건 거기에 몰두하게 되면 점차 전문적인 식견 및 시각을 가지게 된다. 오디오 취미의 경우에도 이런 상황으로 가면서 보급형 기기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게 된다. 보급기와 고급기는 음질의 차이가 현격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음악을 듣는 감각이 높아짐으로써 보급형 기기가 들려주는 소리에는 더 이상 만족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좀더 좋은 음질을 찾아 나서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이 순간부터 피할 수 없이 오디오 메니어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제 음악을 듣는다는 단순한 취미에서 벗어나 오디오 기기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음악을 듣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예민해진 귀와 미적 감수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고가의 오디오 기기 사냥을 나서는 것이다.

이른 바 하이엔드라고 말하는 고가의 기기가 들려주는 재생음악을 듣고 나면 그 매력적인 소리가 만들어내는 환상에서 좀처럼 헤어나기 어렵다. 음악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탄복은 잠시 유보되고 오직 소리의 환상에 빠지게 된다. 하이엔드에는 마약과 같은 그런 유혹이 존재한다. ‘클린 앤 쿨’이라는 용어로 함축되는 환상적인 소리의 마력에 취하고 마는 것이다. 그 환상적인 소리의 마력에 끌려드는 순간, 음악감상의 순수성은 사라지고 하이엔드라는 새로운 환상의 대상을 연모하는 고통은 시작된다. 소유하고 싶은 하이엔드 목록을 가슴에 새기면서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고행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단순히 고가의 기기를 소유하는 것으로 오디오의 환상을 해소할 수 있다면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 오디오는 아주 쉽게 달성할 수 있는 목표일 듯싶다. 그런데 오디오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대상이 아니다. 아무리 고가의 하이엔드라고 할지라도 누구에게나 만족할만한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다. 하이엔드도 메이커에 따라 조금씩 소리의 특징이 있게 마련이어서 여러 가지 단품으로 구성되는 오디오 기기들을 조합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성향의 소리를 만들어내기가 어렵다는 데 문제가 있다.

녹음된 음악이 담긴 소스의 종류에 따라 오디오 기기의 기능은 세분화되고 전문화된다. 이처럼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기기일수록 소리의 성격이 분명하다. 바꾸어 말해 오디오 엔지니어의 음악적인 이념 및 취향 그리고 음악적인 이해도에 의해서도 소리의 성향이 갈리는 것이다. 따라서 전문화된 오디오 기기를 조합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소리를 찾아가는 것은 순전히 메니어의 취향에 따른 개인적인 소관이다. 하이엔드에 집착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소리를 찾아가는 정도가 광적인 수준에 이르게 되면 그 때부터는 고행의 연속이다. 오디오 기기의 조합에 따른 어떤 공식이나 모범답안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순전히 직접 부딪쳐서 해결할 수밖에 없는, 경험의 문제일 따름이기에 그렇다.

모든 취미생활이 그렇듯이 오디오 역시 단시일에 무엇을 얻으려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취미생활이란 적어도 싫증을 느끼지 않는다면 지속적인 성격을 지닌다. 즉, 어떤 목표를 정해 놓고 거기에 이르기 위한 과정을 즐기는 것 자체가 취미생활이다. 오디오도 이러한 취미생활의 틀에서 크게 이탈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하이엔드를 탐하는 것 자체도 오디오 생활의 일부인 것이다. 오디오를 매개로 하는 취미생활이란 단순히 좋아하는 음악만을 듣고 즐기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오디오를 즐기는 방법은 다양하다. 기기를 바꾸고 소스를 구입하며 때로는 음악회를 가는가 하면, 오디오 전시회 및 동호인들과의 교류, 그리고 오디오 서적의 탐독을 포함하여 인터넷 서핑도 오디오 취미생활의 범주에 든다.

오디오 취미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듯이 단지 하이엔드가 추구하는 기술적인 향상에 박수를 치고 그를 소유하는 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오디오 취미생활의 중심에는 항상 음악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하이엔드를 소유하려는 욕구로 인해 때로는 음악 자체를 소원시하는 경향도 없지 않으나, 어떤 경우에라도 오디오 취미는 음악적인 열락이라는 그 궁극적인 목표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하이엔드에 대한 욕구가 해소되거나 또는 포기하는 경우가 생길지라도 음악을 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오디오 취미생활에는 언제나 음악이 그 뼈대를 이루고 있기에 그렇다. 음악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에 취하려는 것은 오디오 메니어의 이상인 것이다.

오디오가 재생하는 음악에는 실제의 연주에서 맛볼 수 없는 독특한 쾌감이 있다는 점에서 실연의 감동과는 또 다른 세계이다. 달리 말해 오디오적인 쾌감이라고 하는 아주 특별한 감동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사적인 공간에서 누릴 수 있는 음악적인 쾌감은 보다 직접적인 감동을 유발한다. 음악회에서 맛보는 감동은 공유될 수 있는 반면에 오디오를 통해 선택적으로 듣는 음악은 오직 혼자만의 것이다. 남과 나눌 수 없는 오직 나만의 기쁨을 누린다는 그 충족감이야말로 사적인 취미생활을 즐기는 이유이다.

하이엔드가 만들어내는 음악은 바로 코앞에서 연주하는 연주자의 호흡까지도 생생하게 전달해줌으로써 박진감이라는 점에서는 실연보다도 한층 더 강렬하다. 녹음기술이 극도로 발달하여 연주현장의 열기를 한층 실감나게 소스에 담고 있는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이처럼 고도의 기술적인 향상으로 만들어진 음원을 재생하면 피부를 파고드는 듯한 사실성에 전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처럼 짜릿한 감동은 음악회에서는 좀처럼 경험하기 어려운 것이다. 여기에는 자신의 노력으로 그러한 소리의 쾌감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성취감이 함께 함으로써 그 감동은 훨씬 실제적이다. 오디오 메니어들은 이와 같이 실연에서 맛볼 수 없는 오디오적인 쾌감을 좇는다.

오디오에서 재생되는 음악을 통해 느끼는 쾌감이라는 것도 저마다 다르다. 음악 또는 소리에 대한 취향이 저마다 다른 까닭이다. 그렇지만 일단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적인 성향에 일치하는 소리를 찾게 되면 그 때부터는 진정 음악적인 열락, 또는 오디오적인 쾌감에 흔쾌히 빠져들 수 있다. 오디오적인 쾌감은 판소리를 배우는 소리꾼이 득음하는 순간에 맛보는 희열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이렇게 보면 오디오 취미도 어쩌면 수도자 또는 예술가의 구도행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신이 원하는 음악적인 이상, 즉 아름다운 재생음악을 만났다는 그 희열은 주체하기 힘든 감정의 포만감을 가져다주는 까닭이다. 그 감정의 포만감은 당연히 아름다운 음악, 아름다운 소리에 대한 전적인 동의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이 경지에 이르면 세상은 온통 환희뿐이다. 인간의 몸을 받아 가지고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에 대한 새삼스러운 일깨움이 아니고 무엇이랴. 더구나 오디오가 가져다주는 환희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짧게 스쳐 지나가며 사라지는 그런 형태의 순간적인 기쁨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디오가 생산해 내는 환희는 연속적일 수밖에 없다. 일단 자신이 원하는 소리가 만들어진 후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 자신이 좋아하는 연주를 선택적으로 들을 수 있을뿐더러, 몇 번이고 반복해서 그 즐거움에 빠져들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오디오 기기를 들여놓고 나서 그 소리가 흡족하다고 느끼면 흔히 묵혀두었던 시디나 레코드를 죄다 끄집어내 듣는다고 하는데, 이러한 행동은 자신이 원하는 소리와 만났다는 쾌재나 다름없다. 그런 순간이야말로 오디오를 즐기는 데서 얻을 수 있는 실질적인 기쁨이자 행복, 즉 취미생활에서 맛볼 수 있는 삶의 희열에 다름 아니다. 설령 거기에서 만족하지 못한 채 보다 아름다운 또 다른 소리를 찾아 나선다고 할지라도 큰 문제는 아니다. 보다 높은 곳을 향한 인간의 사고 및 행동은 결코 미친 짓이 아니겠기에 말이다.

물론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지나친 소유욕은 죄가 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적인 취미생활을 통해 정신적인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누가 탓할 수도 없는 일이다. 다만, 무슨 취미생활이든지 자신의 여건을 크게 벗어나서는 것은 마땅히 경계해야 할 일이다. 취미생활을 통해 얻으려는 자유가 또 다른 형태의 속박을 불러들인다면 그것은 이미 취미의 차원을 벗어나는 일이겠기에 말이다.

오디오 취미생활은 예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방법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아름다운 소리, 아름다운 음악을 즐기는 것 자체가 예술을 이행하는 일인 것이다. 오디오 음악을 즐기고 하이엔드를 탐하는 일을 소비적인 취미라고 간단히 폄훼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술가들이 목표가 정해진 바 없는 보다 높은 세계를 부단히 지향하는 것으로써 스스로의 존재의미를 일깨우듯이, 진정한 오디오 메니어 또한 그러한 경계를 추구하는 것으로써 취미생활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신항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