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음의 재현은 가능한 목표인가?
신항섭(미술평론가)
인간의 삶 속에서 소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크다. 인간 삶 전체를 100퍼센트로 했을 때 소리에 대한 비중은 얼마나 될까. 다시 말해 인간의 신체적인 감각기관 가운데서 청각기능을 담당하는 귀가 차지하는 영역은 어느 정도일까. 외적인 요인으로부터 지각되는 인간의 감각을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의 오감으로 구분했을 때, 산술적인 계산만으로도 청각은 그 오분의 일인 20퍼센트에 해당한다. 이 정도만으로도 인간 삶에서 청각이 얼마나 중요한 기능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청각을 상실했을 경우 적어도 삶의 오분의 일은 무너지는 셈이니 말이다.
인간의 삶이란 어떻게 하면 오감을 최대한 예민하게 작동시키느냐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인간의 삶이란 오감에 의지하는 것이라고 보았을 때 어떻게 하면 물상의 형태를 잘 볼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소리를 잘 들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냄새를 잘 맡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피부감촉을 민감하게 만들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요약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인간 삶의 20퍼센트를 담당하는 청각기능을 향상시켜 귀를 즐겁게 함과 동시에 마음을 흡족하게 만드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청각기능은 삶 자체이기에 그렇다.
오디오 취미란 바로 귀를 즐겁게 하고 마음을 흡족하게 만드는 방법의 하나이다. 오디오생활이란 실연을 전기적으로 저장하였다가 그를 재생하는 전기적인 장치를 포함하여 그 재생음을 듣는 행위까지를 아우른다. 오디오는 단순히 기계적인 메커니즘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오디오취미는 재생음악과 관련한 모든 전기적인 장치와 그를 통해 달성할 수 있는, 청각의 즐거움과 감정의 풍요로움 그리고 정신적인 희열을 추구하는 일종의 문화적인 행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오디오는 단순히 귀를 즐겁게 하는 개인적인 취미생활이기 전에 문화적인 생활임과 동시에 문화적인 현상의 하나인 것이다.
오디오 기기가 점차 고급화되고 고가화의 길을 가는 것도 문화적인 생활의 범주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음악 그 자체를 재생하는 장치로서의 기능만을 요구한다면 오디오 기기의 진보는 스테레오가 출현한 초기에 이미 정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디오가 생활화되고 문화적인 영역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필연적인 일이지만-오디오는 진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문화적인 욕구는 생활의 질적인 향상과 더불어 상승기류를 타게 되어 있다. 문화에 편입된 오디오의 운명도 이를 피할 수 없다. 삶의 질적인 향상을 돕는 다양한 형태의 문화생활 가운데 소리를 매개로 하는 오디오는 현대인에게는 거의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현대인에게 음악이 없는 생활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 돼버렸다.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소스와 그를 재생할 수 있는 다양한 전자기기로 넘쳐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홈 오디오이다. 가정에서 듣는 홈 오디오는 소리, 즉 음악을 매개로 하는 문화생활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홈 오디오를 통해 즐기는 문화생활은 단순히 고가의 오디오 기기를 소유한다는 그 외형적인 문제로만 평가할 수 없는 깊은 정신적인 충족감을 준다. 음악이 가져다주는 고조된 감정 및 정신적인 희열 그리고 정서적인 안정을 통해 삶의 기쁨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때로는 오디오가 재현하는 재생음악의 아름다움에 빠져들며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절감한다. 한마디로 오디오는 삶의 의미를 일깨워주는데 기능하기도 한다.
이렇듯이 삶 자체에 활력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음악과 동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오디오는 현대인의 문화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 되었다. 그렇다. 오디오는 수준 높은 문화생활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수단의 하나로 확실히 자리잡게 된 것이다. 듣고 싶은 음악이 있을 때 언제든지 혼자서도 가능케 하는 그 신속성과 편리성이야말로 오디오의 최대의 장점이다.
오디오 음악을 탐닉하는 메니어들이 늘어나면서 오디오 기술도 놀랄 만큼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기술적인 향상에 비례하듯 음질에서도 큰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음은 물론이다. 음악연주가 기술적으로 점차 고도화의 길을 가고 있듯이 오디오 또한 여기에 맞추어 기술적인 발달을 부단히 모색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실연의 감동을 요구하는 메니어들의 민감해지고 고급해진 귀를 충족시키기 위한 노력이 오디오 기기의 기술적인 발달을 촉진한 것이다. 이런 연유로 오디오 기기가 고급화 고가화의 길을 걷게 되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보다 진전된 기술, 보다 향상된 음질을 향한 엔지니어들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오디오의 목표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목표 중에서 가장 선두에 서는 것은 실연과 같은 재생이다. 오디오 재생음악을 마치 연주회장에서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도록 하는 일이다. 그런가 하면 오디오적인 쾌감을 선사하는 일이다. 실연보다 더욱 박진감 넘치는 사실성의 세계로 유도하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음악을 음악답게 들려주는 일이다. 전기적인 작용으로 인한 왜곡이나 과장이 없는 자연스러운 음악으로 감동을 유발하는 일이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세분화된 목표가 있지만, 오디오 기기를 설계하고 제작하는 메이커의 입장은 크게 이들 세 가지 형태로 압축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디오 기기를 통해 재생음악을 듣고자 하는 메니어들의 목표도 대체로 여기에 일치한다. 이를 달리 해석하면 오디오는 하나로 합쳐질 수 없는 복합적인 형태의 목표를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아무리 고급이고 고가의 오디오라고 할지라도 듣는 이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는 것도 개인적인 취향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디오는 이런 복잡한 목표를 추적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 뚜렷한 하나의 목표를 겨냥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오디오 메이커들은 일단 특정의 집단을 공략하기 위한 전략으로 나가고 있다. 특정의 집단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기술적인 완성도를 선망하는, 오디오적인 쾌감을 추구하는 메니어들을 말한다.
기술적인 발달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 물리적인 완성도에 심취하는 집단은 실연보다 더욱 실제적인 재생음악을 기대한다. 이들은 하이엔드를 통해 음악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한편 하이엔드 메이커를 존재케 하는 견인차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오디오 메이커의 대다수는 이들 집단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한다. 달리 표현하면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의 관계인 것이다. 물론 하이엔드 메이커나 하이엔드를 추종하는 메니어들에게도 재생음악의 궁극적인 목표는 따로 있다. 재생음악을 원음에 일치시키는데 있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한 목표라고 할지라도 하이엔드 오디오가 존속하는데는 없어서는 안될 구실이자 전제조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이엔드 메이커이건 그를 추종하는 메니어이건 간에 실연, 즉 원음에 대한 개념은 아직도 모호한 상태이다. 오디오가 지향하는 ‘원음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설득력 있게 주장하는 이는 아직 보지 못했다. 실연을 통해 만들어지는 원음에 대한 개념이 불명확한 것은 실연을 녹음하는 환경에도 다양한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음악이 연주되는 실제의 공간감을 재현하기 위해서 단 두 개의 마이크로 녹음한다는 사실은 재생음악이 지향하는 원음을 영원히 불가능하게 만드는 요인인지 모른다. 3채널 또는 아무리 많은 마이크를 동원한 다채널 녹음이라고 할지라도 실제의 공간감을 재현하는 일은 원초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일이 아닐까. 쉬운 예로 연주되는 악기와 악기 사이에 존재하는 음악적인 뉘앙스-악기와의 거리, 악기간의 방향 따위로 인해 달라지는-를 한정된 숫자 한정된 공간에 위치한 마이크로 어떻게 정확히 짚어낼 수 있을 것인가.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원음은 실제의 연주를 기본 값으로 한다지만, 실제의 연주조차 연주회장 조건에 따라, 악기에 따라 연주자에 따라, 또는 음악적인 분위기에 따라 달라지는 수많은 변수가 도사리고 있기에 ‘이것이다’라고 명료하게 그 개념을 제시하기는 어렵게 되어 있다.
이런 저런 원인으로 인해 원음에 대한 개념조차 불명확한 상황이니 오디오 기기 메이커는 어느 쪽에 맞추어야 할지 목표를 정하는데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이른바 하이엔드라고 하는 오디오 메이커들은 대체로 오디오적인 쾌감을 좇는 경향이다. 무엇보다도 물리적인 성능, 즉 계측기상에서 높은 기술적인 완성도를 성취해야 한다는 목표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물리적인 목표야말로 오디오 메이커가 가장 달성하기 손쉬운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지 기술의 발전만으로 해결해나갈 수 있는 목표인 까닭이다. 실제로 이와 같은 문제에 관한 한 발전은 계속되고 있다.
원음과 실연은 어떻게 생각하면 같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용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엄연히 다르다. 원음은 실연에서 얻어지는 음악적인 성질을 말하는데 반해, 실연은 실제의 연주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원음은 소리 자체의 값을 의미한다. 재생음악을 놓고 말할 때 그 목표인 원음은 소리 값이 100퍼센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디오를 통한 재생음악의 충실도는 원음에 얼마나 가까이 접근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원음의 소리 값을 얼마나 충실히 재연하느냐 하는 문제야말로 하이엔드 메이커의 존재의미일 수도 있다.
오디오 메이커가 원음을 공략한다는 목표를 세운지도 벌써 반세기를 훌쩍 넘기고 있다. 원음에 대한 도전은 자기테이프를 매개로 하여 스테레오 녹음이 시작된 19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디오의 급진적인 기술의 발달을 촉진한 것은 엘피라는 레코드를 개발함으로써 비롯되었다. 엘피레코드가 상품화된 것은 1948년이었고 스테레오 녹음방식으로 디스크가 만들어진 것은 그로부터 10년 뒤의 일이니까, 이미 반세기 전의 일이다. 스테레오 녹음은 실연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데 탁월했다. 마치 바로 눈앞에서 음악이 연주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사실 원음에 대한 본격적인 도전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스테레오 녹음과 재생은 두 개의 채널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는 음악의 공간적인 분포의 재현 가능성을 현실화함으로써 입체음향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스테레오는 실연의 감동을 가능케 한 일대사건이었다. 그 후 3채널의 서라운드방식에 이어 다채널의 홈시어터방식 등 입체적인 공간감을 위한 기술적인 발전은 계속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디오 엔지니어는 물론이려니와 음향기술자 그리고 오디오평론가들조차 원음에 이르는 데는 아직도 멀었다고 말한다. 어찌 보면 비관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 이러한 평가야말로 오디오라는 전자기기를 통한 원음에의 도전은 영원한 과제임을 확인시켜주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언제 도달할 지 모르는 미궁 속의 과제야말로 오디오 엔지니어 및 메니어들이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원음은 실연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 즉 악기가 들려주는 음 자체를 뜻한다. 물론 악기가 들려주는 음 자체란 음표에 따라 연주되는 악기의 소리를 지칭하는 것이지만, 그와 관련해서 조성되는 음악적인 뉘앙스를 포함하여 연주되는 순간의 공간적인 분포까지를 망라한다. 실연의 감동이란 이처럼 연주되는 순간의 시간적 공간적인 조건에 따라 만들어지는 다채로운 음악적인 뉘앙스와 입체감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스테레오를 비롯하여 서라운드 홈시어터의 공간재현방식은 다름 아닌 실제의 연주를 재현하는데 바쳐진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을 통한 재생음악은 메니어들을 감동시키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우리가 오디오를 통해 듣고 있는 재생음악의 입체감은 청각기능 속에서 이루어지는 착각에 불과하다. 하이엔드를 통해 재생되는 음악이 원음에 가깝다고 믿는 것은 그 음악이 연주되는 실제의 공간에서 직접 들어본 일이 없는 까닭이다. 만일 실제의 연주를 들어보고 나서 녹음된 연주를 듣게 된다면 얼마나 많은 차이가 존재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연주되고 녹음되는 상황을 직접 체험하지 못함으로써 오직 엘피 또는 시디에 담긴 음악에다 실연의 상황을 일치시키려고 한다. 이와 같은 메니어의 태도야말로 오디오 엔지니어가 지향하는 실연의 목표에 좀더 가까이 다가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렇다. 오디오 메니어는 실연의 감동을 추구하면서도 오디오라는 재생장치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인정한다. 그러기에 아직도 불완전하다고 생각되는 하이엔드를 구입하는데 거금을 서슴없이 투척한다. 비록 미완성이지만 완성을 추구하는 그 과정에는 아름다운 음악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 하이엔드를 탐하는 것도 마침내는 아름다운 음악의 노예가 되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다. (신항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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