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 이야기

오디오 이야기 (4) - 자연으로부터 배우는 음악적인 열락

펜보이 2007. 6. 25. 11:38
 

자연으로부터 배우는 음악적인 열락

 

신항섭(미술평론가)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탄생 성장 죽음 분해 소멸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 이는 유기적인 생명체를 가진 모든 존재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인간을 포함하여 자연에 기반을 두고 살아가는 모든 생물은 이렇듯이 생성과 소멸의 법칙에 따른다. 생명체로 태어나고 죽는 과정을 주관하는 것은 다름 아닌 준엄한 자연의 법칙이다. 제아무리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일지라도 한시적인 생명의 시간을 준수해야 하는 자연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인간은 자연의 법칙에 따르기는커녕 자연의 법칙에 역행하기를 일삼을뿐더러 생명의 모체인 대자연마저 지배하려 든다. 밑도 끝도 없는 욕망 탓이다. 인간은 문명을 일구면서 물질적인 욕망 및 자만심에 도취되는 나머지 자연인으로서의 순수성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 인간은 지적인 활동으로 문명세계를 이루었지만 문명의 발달에 반비례하여 인성은 파멸의 길을 걸어왔다. 문명의 발달로 생활의 편리함은 얻었을망정 인간성 상실이라는 반대급부가 뒤따른 것이다. 인간문명이 이룬 거대한 물질의 탑은 결과적으로 인간을 타락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물질의 탑은 인간이 지닌 물욕의 상징물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리석(블루 마블)이라고 일컬어지는 지구에서 그나마 물질의 탑을 세우면서도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예술이라는 자기정화 장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문학 미술 음악 연극 무용 영화 사진 건축 공예(디자인)라는 명칭으로 분류되는 다양한 형태의 예술활동은 인간이 진정 자연의 산물임을 증명하는 데 바쳐진다. 예술은 인간의 신체적인 기능을 포함하여 감정 및 정신활동을 증진시킴으로써 가능해지는, 다양한 형태의 자기표현을 통해 구현되는 ‘아름다움’에 대한 진정한 헌사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은 예술이라는 거룩한 이름을 대행하는 존재이면서도 때로는 스스로의 임무를 망각하고 있는 듯하다. 자연이 준 그대로의 순수성을 회복할 수 있는 장치, 즉 예술적인 프로그램을 작동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자기현시를 위한 비자연적인 물질의 탑을 만드는데 광분해왔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차츰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모습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는 물질적인 욕망의 하수인으로 전락하였음을 말해주는 단적인 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다행히도 자연의 일부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잃지 않고 있다. 그 희망적인 메시지는 바로 예술이다.

예술은 인간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본성을 일깨워준다. 그 아름다움의 근본은 당연히 자연에서 복제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자연이 주관하는 생명체의 아름다움을 복제해내는 기술이 다름 아닌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신체적인 기능을 극단적으로 향상시킴으로써 가능해지는 동적인 아름다움이라든가, 내외적인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는 순간에 만들어내는 추상적인 아름다움, 그리고 지식의 축적 및 정신활동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상적인 세계관 따위가 예술의 참모습이다. 예술은 그 주체로서의 예술가는 물론이려니와 그를 보고 즐기는 이들 모두를 아름다운 삶으로 이끄는 힘을 발휘한다. 이렇듯이 인간의 신체적인 기능과 더불어 감정 및 정신적인 활동에 의해 성립되는 예술은 그 끈을 잡고 따라가다 보면 필시 자연의 신성한 생명력으로 귀결한다.

인간은 어차피 여타 동식물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산물이라는 숙명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의 지적활동이나 감정 표현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자연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을 비롯해 모든 생명체가 존속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햇빛 공기 바람 따위의 자연현상을 포함하여 인간의 신체를 형성케 하는 음식물의 재료는 모두 자연의 채취된 것이기에 그렇다. 다시 말해 자연의 산물을 먹고사는 한 신체에서 자연의 속성을 지울 수 없다. 인간의 신체란 결과적으로 자연에서 취하는 유기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이다. 인간의 지적인 사고는 물론이요, 감정조차도 자연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지적인 사고를 지탱하는 것은 신체이고 그 신체는 자연에서 취한 섭생의 물질로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창작이란 행위도 자연의 영역 및 그 영향력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어디 그 뿐이랴. 우리가 보고 배운 지식이라는 것도 결과적으로는 자연에서 습득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의 한 장르인 음악은 청각작용에 의해 자극된 심인으로 하여금 감정을 동요시키고, 그에 대한 지적인 반응을 유도하게 되며, 그리함으로써 고양된 감정 및 정신이 만들어내는 기쁨에 빠져들도록 이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이해하면 음악에는 희열을 가져다주는 감정의 바이러스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지적인 이해의 동의하에 만들어지는 고조된 감정은, 즉 예술적인 행위와 그 결과로써 주어지는 감정의 진폭은 일상성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지게 마련이다. 그처럼 확대된 감정의 진폭을 체감하는 순간, 미적 감흥은 고조되고 지적인 이해의 폭은 넓어진다.

예술의 한 장르인 음악은 비록 그 존재를 우리 눈앞에 드러낼 수 없으나 인간의 감정 및 정신을 고양시킨다. 청각에 의해 인지되는 음악은 아름답고도 감미로운 상상의 세계로 이끄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 모양을 관찰할 수 없으나 현상계의 그 어떤 아름다운 존재 못지 않은 미적 감흥을 일으킨다. 그렇다. 음악은 물적인 존재를 갖지 않는 추상적인 가치이다. 음악을 만들어내는 도구는 물질이지만 그로부터 만들어지는 소리와 그 소리는 허공을 떠다니는 추상적인 이미지에 불과하다. 그 추상적인 이미지는 인간의 미적 감각에 통해 아름다운 가치로 변환할 뿐이다. 비록 시각적으로 인지되지 않는 추상적인 가치임에도 인간의 감정 및 정신의 영역에서 아름다운 이미지로 그려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음악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공기를 진통시켜 전달되는 모든 형태의 음악은 진동이 소멸함과 동시에 그 존재성도 함께 사라지고 말기에 그렇다.

그러나 그 음악으로부터 자극된 인간의 감정의 진폭, 즉 감동은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음악은 살아 있는 생명체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라는 자기긍정을 유도하면서 인간의 내부에 촛불의 그림자와 같은 이미지로 비쳐진다. 따라서 촛불의 그림자와 같은 이미지로부터 얻어지는 음악적인 감동은 그 속에 표현되는 아름다움을 지각할 수 있다는 데 대한 전적인 동의로부터 발생한다. 음악은 예로부터 삶에 대한 진정한 환희의 한 증표로 제시되었다. 그 환희의 증표는 한편으로는 인간의 삶을 주재한다고 믿는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찬미의 형태로 구체화되어 왔다. 자연신앙에서 엿볼 수 있는 제의에 쓰이는 음악은 절대적인 존재에게 바치는 신성한 아름다움이었고 제물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말하자면 음악은 인간이 만들어낸 신과의 소통의 장치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음악은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 중에서도 가장 신성하고 가장 아름다운 가치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모든 형태의 음악의 근본은 소리로 이루어지며 그 소리는 자연에 원형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음악적인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들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자연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일이 필요한지 모른다. 다시 말해 인간이 감정 및 지적인 조작을 통해 만들어낸 음악에서 진정으로 감동하고 또 그 음악적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보다 순수한 상태로 되돌려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예술적인 아름다움의 원형이자 음악이 가지고 있는 본질의 하나인 자연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뜻이다.

모든 형태의 음악은 자연음의 한 지류일 뿐이다. 인간의 지적인 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그 어떤 형태의 음악일지라도 자연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볼 수 없다. 음악의 기초가 되는 소리는 자연음의 흉내이거나 그 변형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인간의 소리에 대한 인식능력은 자연의 생산물인 신체적인 기능의 일부인 청각기능에 의해 깨우쳐진 것이다. 그 청각기능에 의해 인식된 자연의 소리를 토대로 만들어지는 것이 음악이다. 그래서 음악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는 자연의 소리를 순수한 상태로 들을 수 있는 미적 감각을 회복하는 일이 필요하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 귀가 트이기 시작하면서 듣게 되는 자기 자신의 울음소리와 어머니의 숨소리 및 말소리를 시작으로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환경과 더불어 바깥으로부터 들어오는 다양한 소리들, 그리고 성장과정에서 만나는 자연의 소리들에 더하여 온갖 소음까지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 한편 성장과정에서 점차 마음을 즐겁게 하는 소리와 마음을 상하게 만드는 소리를 분별하게 된다. 이러한 분별력은 소리에 반응하는 지적활동의 한 증표이다. 인간의 감정을 편하게 만드는 것은 아름다운 소리이자 음악이요, 감정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소음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소음은 물론 자연음 가운데에도 있다. 그러기에 자연음 모두가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다. 아름다운 소리와 소음을 분리해내는 일이야말로 음악의 역할이며 존재성이다. 자연음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면 음악에 대한 이해는 저절로 향상되기 마련이다. 이는 자연음이 아름다운 소리와 그렇지 않은 소리를 분별할 수 있는 감각을 일깨준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자연음에서도 좋고 나쁨을 구분하는 것은 본능의 영역에 속한다. 반면에 음악을 이해하는 데는 지적활동으로서의 일정한 습득과정이 요구된다. 음악은 눈에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추상적인 가치이기에 그렇다.

음악은 아름다움을 지향한다. 인간의 마음을 따스하고 부드럽고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음악에는 감동적인 요소가 있는 까닭이다. 음악 속에 있는 감동적인 요소는 음악의 종류 또는 악기나 연주자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음악에서 그처럼 다양한 모습의 감동적인 요소를 분별해내기 위해서는 지적인 이해방식이 필요하다. 음악적인 이해방식이란 감성적인 반응 및 지적인 태도를 말한다. 그러나 아무리 지적인 태도를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정녕 음악의 아름다움은 그에 반응하는 미적 감수성의 차지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음악을 진정으로 아름답게 감상하기 위해서는 먼저 미적 감수성을 예민하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하나의 방법이 자연의 순수성으로 되돌아가는 일이다. 자연을 깊이 응시하고 관찰함으로써 자연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의 근원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하여 미적 감수성은 아름다운 음악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반응이란 아름다운 음악에 대한 감각적이고 지적인 이해를 통한 감동을 의미한다.

음악에 대한 감동의 체적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자연의 감각을 회복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음악을 자주 접하는 것으로써 이해의 폭을 넓히는 일도 한 방법이지만 그 보다는 먼저 자연과 좀더 친숙해져야 한다. 미적 감각을 예민하게 만드는 일은 자연성을 회복하는 데 있다. 자칫 기계적인 소리에만 빠져들면 아름다운 음악을 놓치기 십상이기에 그렇다.

오디오 취미란 아름다운 소리를 찾아가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오디오 취미는 기계적인 장치 그 자체만을 탐하는, 시각적인 호사스러움에 빠질 위험도 함께 한다. 시각적인 호사스러움이 마냥 나쁜 일만은 아니다. 음악적인 감동 및 이해를 깊이하기 위해서는 시각적인 호사스러움을 수반한 하이엔드도 어쩌면 필수적일 수도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반드시 음악에 대한 감동과 이해가 전제되어야만 한다. 귀가 점차 예민해져 하고 경제적인 능력이 뒷받침된다면 하이엔드가 재현하는 음악의 아름다움을 탐하는 것은 결코 죄가 될 수 없다. 아름다운 음악에 빠져드는 일은 감정의 풍요로움과 정신적인 깊이를 보장받는 일이기 때문이다. 음악적인 열락에 빠져들어 행복할 수 있다면 하이엔드를 추구하는 일이 결코 사치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다. 따라서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진정한 하이엔드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음악의 열락에 빠져들 수 있는 예민한 귀와 미적 감성을 훈련시켜야만 한다. 그 하나의 방법이 우리들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자연의 감각에 일깨우는 일이다.

그러자면 햇살의 따사로움에 기지개 켜듯 새말간 싹을 틔우는 나뭇가지와 봉오리를 여는 꽃들의 아름다운 형용에 감탄하고, 풀잎을 눕히는 바람소리와 세상을 적시는 빗방울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런가 하면 솜털을 일으키는 차가운 공기를 통해 바깥세상과 소통을 하고, 나무껍질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수맥의 흐름을 엿들 수 있어야 한다. 어디 그 뿐이랴. 굼벵이와 지렁이가 땅을 밀치며 몸을 달싹이는 소리에 화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단순히 청각기능만을 증진시키기 위한 훈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단적으로 말해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회복하는 일이다.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야말로 음악의 아름다움, 음악의 기쁨, 음악의 행복 그리고 삶의 아름다움을 일깨우는 첩경이다. (신항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