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직한 하인으로서의 오디오
신항섭(미술평론가)
이 세상의 주인처럼 행세하는 인간에게 이보다 더 나은 곳이 따로 있을 수 있을까. 시선을 현혹하는 화려한 색채로 치장한 온갖 모양의 꽃들과 꿈결처럼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 나비들, 황홀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새들, 그리고 하늘과 산과 강이 어우러지는 이 세상이야말로 바로 낙원이 아니던가. 어디 그뿐인가. 얼음보다 차가운 외계로부터 따뜻이 감싸주는 태양이 있고, 달콤한 사랑과 낭만적인 꿈을 안겨주는 달과 별이 있는 이 세상보다 아름다운 곳이 정말 있기나 한 것일까.
인간은 이처럼 아름다운 세상을 아름답게 지각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았다. 아름다움은 본디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아름다움을 지각할 수 있는 존재에 의해 비로소 아름다움의 가치가 깨어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아름다움은 인간에 의해 눈을 뜨게 되었다. 그렇다. 참으로 다행히도 인간만이 아름다움을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고, 아름다움을 지각할 수 있는 대신에 그 아름다움의 가치를 일깨워주어야 한다는 의무를 지게 되었다. 인간이 아름다움을 지각하지 못했다면 이 세상의 아름다움은 깊은 어둠 속의 잠에서 결코 깨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인간과 더불어 그 참다운 존재의미를 가지게 되는 셈이다.
인간을 포함하여 온갖 생명체가 서식하는 지구, 즉 자연은 그 넓고 깊고 먼 우주의 한 부분이면서 동시에 그 중심을 이룬다. 그리고 그 자연의 아름다움을 존재케 하고 유지시켜야 하는 책임을 가진 주인은 바로 인간이다. 인간은 자연에 부여된 아름다움의 존재에 대한 의미와 그 가치를 일깨워줌으로써 이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아름다움은 공간에 존재한다. 자연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공간에 의해서이다. 우주공간을 형태적으로 답습하는 자연은 인간의 시지각을 자극하고 유혹한다. 그리고 자연의 일부로 존재하는 그 어떤 물상도 반드시 우주와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 그러면서 공간의 한 중심을 이루는 것이다. 여기 노란 민들레가 있다고 하자. 노란 민들레 한 포기는 아주 조그만 공간을 점유한다. 하지만 노란 민들레는 인간의 시지각이 미치는 범위까지 그 존재범위를 확장할 수 있고, 우주의 한 부분을 형성하면서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확정한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세상은 노란 민들레와 같은 물상 개개의 공간으로 시작하여 그 물상들이 공유하면서 중첩되는 다층공간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용인하는 조화로운 관계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소리가 없이 단지 공간적인 형태만이 존재하는 세상이었다면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반감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개개의 물상이 공유하며 만들어내는 조화롭고 구체적인 공간인 자연에 단지 침묵의 빛과 어둠만이 있었다면 그 시각적인 아름다움은 그리 감동적이지 못했으리라. 그런데 무슨 조화인지 그 공간에 소리가 끼어 들어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층 실제적인 감동으로 물들여 놓은 것이다.
소리는 이처럼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동을 보다 실제적이고 구체화하기 위해 준비되었다. 어쩌면 소리는 공간을 떠다니는 유령인지 모른다. 소리의 유령은 세상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요술을 건다. 그 요술은 신비적인 언어로 일순간 세상을 마비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세상은 소리에 의해 자극됨으로써 비로소 살아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소리는 생명체의 자발적인 동작과 더불어 그 생명체가 진정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증표이다. 생명체가 발설하는 자연의 소리는 공간에 생명의 리듬을 부여하면서 인간을 감동시킨다. 소리는 자연계라는 외적인 공간뿐만 아니라 인간의 내면 깊숙이 잠입하여 미적 감관을 자극하는 까닭이다.
이렇듯 소리는 자연과 더불어 존재한다. 그리고 비어 있는 공간이면 어디든지 침투하여 완전히 비어 있는 곳이란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소리는 이 세상을 완벽하게 채운다. 공기가 그러하듯이 물상이 존재하는 공간을 이동하며 이 세상을 속속들이 채운다. 자연의 생명체에게 부여된 아름다운 소리의 기능을 일깨워주면서 이 세상을 진정 살아 있는 공간으로 장식하는 것이다. 생물체의 자발적인 소리를 포함하여 자연에서 나오는 모든 형태의 소리는 인간에게 충만함이 무엇인지 가르쳐준다. 세상을 빈틈없이 채울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충만함을 의미한다.
인간의 생리적인 반응과 관련해 볼 때 비어 있는 위가 음식물로 채워지면 포만감이 따르게 마련이다. 음식물은 신체적인 포만감을 가져다준다. 그 포만감은 충족감이고 한편으로는 살아있다는 자기확인에서 오는 안도감이자 행복감이다. 아름다운 소리 또한 다른 방식으로 인간을 포만감에 빠뜨린다. 청각의 작용에 의해 지각할 수 있는 아름다운 소리는 인간의 정신과 감정을 동요시킨다. 소리에 의해 자극된 정신 및 감정의 동요는 감동이란 형태로 나타난다. 정신 및 감정을 극단적으로 고조시키면서 희열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그 희열은 역시 충족감이고 안도감이자 행복감이다. 이렇듯이 소리가 만들어내는 감동은 정신적인 포만감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런데 소리 자체는 일시적이다. 어떤 형태의 소리든지 일순간으로 존재할 따름이다. 따라서 시간의 제약을 받는다. 그리고 공간을 점유하면서도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을 뿐더러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다. 순간적으로 비어 있는 공간을 채웠다가 순간적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인간은 소리가 지속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고자 했다. 소리가 만들어내는 감동을 지속시킬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한 것이다. 아름다운 소리는 정신적인 포만감을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음악을 만들어냈다.
비어 있는 곳을 채운다는 원리를 거울삼아 인간의 내면을 채울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낸 것이다. 음악이 있기 전에 단지 순간적인 소리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최초의 소리, 즉 우주로부터 오는 소리는 이 세상을 아름다움으로 채울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멋진 신호였다. 또한 생물이 존재함으로써 발생하는 갖가지 형태의 자연의 소리 또한 아름다움을 꿈꾸도록 유도하는 멋진 신호였다.
인간은 그러한 신호를 일정하게 패턴화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냈고, 오랜 시간에 걸쳐 마침내 리듬과 멜로디와 화성이라는 음악의 3요소를 분리해낼 수 있었다. 물론 음악은 리듬이나 또는 멜로디 단독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그런 음악을 세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듣고 부르며 감상하는 보편적인 음악은 대체로 이들 3요소로 분석되어진다.
이 시간 우리가 오디오라는 소리의 재생장치를 통해 듣는 음악은 노래하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가 악보라는 약속된 부호를 읽는 것으로 시작된다. 오선지 위에 그려지는, 기호 문자 숫자 따위로 이루어지는 현대적인 개념의 악보에 저장된 소리를 불러내는 것은 연주자이다. 연주자는 누구나 악보가 지시하는 소리를 만들어내지만 그 소리의 강약장단을 포함하여 그 표정은 저마다 다르다. 이는 악보에 담긴 소리에 대한 해석을 달리한 결과이다. 연주자의 해석에 따라서는 그 악보를 만든 작곡가가 상상하고 기대하는 음악적 표현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할 것이다. 악보란 단순히 정확한 음표를 지시할 뿐, 그 이외의 표현적인 많은 부분은 연주자의 몫, 즉 해석에 맡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악보란 불확실하고 불확정적인 약속에 지나지 않는지 모른다.
아무튼 인간의 감정 및 정신적인 포만감을 위해 만들어지고 연주되는 음악은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거드는데 한몫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온갖 형태의 물상으로 이루어진 자연공간을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채우는 데는 소리, 즉 음악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시각적이거나 청각적인 아름다움은 생동감과의 조화를 통해 성립된다는 점이다. 생동감은 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이자 근원이다. 살아 있는 존재에게서 만들어지는 소리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이기에 그렇다. 음악이라는 것도 결과적으로는 인간이라는 생물이 만들어낸 세계인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음악은 우리들 자신에게 삶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준다. 음악은 단지 연주되는 그 시간만으로 한정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에는 우리 자신이 살아 있음을 거듭하여 확인하고 또 감사해하도록 이끈다. 음악에는 충만한 아름다움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아름다움은 우리의 감정 및 정신의 영역에서 감동이라는 가치로 변환한다. 음악적인 감동은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는 찬란한 별빛과도 같다. 아니, 우리들의 어두운 감정 및 정신세계를 환히 밝히는 희열의 빛이다.
음악에는 자연의 아름다움, 즉 생명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가 담겨 있다. 우리들 인간은 음악을 들으며 그 속에 담긴 생명에 대한 찬미에 기꺼이 동참한다. 그리고 그 찬미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동한다. 그 감동은 우리들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추억이 된다. 음악을 듣는 일은 우리들 자신에게 주어진 아름다운 삶에 대한 추억거리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악보를 보고 연주자가 만들어내는 음악을 재생하는 기계적인 장치인 오디오란 이처럼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찬미에 동참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연주자에 의해 직접 연주되는 음악을 마치 실제처럼 들려준다. 더구나 어느 때든 원하는 음악을 아주 손쉽게 들을 수 있게 도와준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서 속삭이듯 들려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오디오야말로 인간이 발명해낸 가장 아름다운 창작물이지 싶다. 만일 오디오가 없었다면 우리들의 일상은 얼마나 단조로울까. 아마도 음악을 들으며 느끼는 삶에 대한 아름다움이 반감했을 것이다. 음악은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실연을 담은 음악 재생장치로서의 오디오의 목표는 다름 아닌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구조를 정확히 재연하는 것을 이상으로 여긴다. 좋은 오디오란 연주당시의 상황, 즉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구조를 정확히 재연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기에 그렇다. 시간적인 구조는 기계적인 또는 전자적인 장치를 통해 일단 거의 완벽하게 해결한 상태이다.
이에 반해 공간적인 구조는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이 남아 있다. 연주장이라는 공간에서 느끼는 음악의 이미지를 재현하는데 오디오는 아직 불완전한 기계장치일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물론 스테레오 장치를 통해 공간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한 이래 서라운드라든지, 멀티채널 스테레오 장치로 발전하면서 공간적인 문제는 한층 실제적인 요구에 가까이 접근하고 있는 상황이다. 설령 이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오디오로서는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무엇보다도 오디오는 실연에서 느끼는 음악적인 표현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디오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 우리가 요구하는 음악을 어느 때든 충실하게 재연해주고 있는 것이다. 오디오는 음악을 사랑하는 우리의 요구를 기꺼이 따르고 수용하는 충직한 하인이다. 이 세상이야말로 참으로 살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라는 자각과 함께, 어느 때든 나를 감동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충직한 하인과 더불어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러니 노래가 좀 서툴다 한들 어찌 충직한 하인을 타박할 것인가. (신항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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