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나를 울린 시(5) - "너에게"

펜보이 2007. 6. 22. 14:43
 

  '너에게'

  -여하시편


  서정춘


  애인아

  우리가 남 모르는 사랑의 죄를 짓고도

  새빨간 거짓말로

  아름답다 아름답다 노래할 수 있으랴

  우리가 오래 전에

  똑같은 공중에서 바람이거나

  어느 들녘이며 야산 같은 데서도

  똑같이 물이고 흙이었을 때

  우리 서로 벗은 알몸으로

  입 맞추고 몸 부비는 애인 아니었겠느냐

  우리가 죄로써 죽은 다음에도

  다시 물이며 공기며 흙이 될 수 없다면

  우리 여기서부터 빨리 빨리

  중천으로 쏘아진 화살로 달아나자

  태양에 가려진 눈부신 과녁이

  허물없이 우리를 녹여버릴 테니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생명체 중에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이 최상의 행운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렇다.  아름다운 꽃을 보고 아름다운 새의 노래 소리를 듣고 거기에 취해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는 것이 인간이 아니고야 어찌 가능할 것인가.  더구나 사랑할 때 미사여구가 담긴 달콤한 속삭임으로 상대의 환심을 이끌어낼 줄 아는 존재가 인간 말고 달리 있을 수 있겠는가.  세상의 온갖 것들을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을 음미하는 것은 오직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혜임이 분명할진대 인간으로 태어난 사실이야말로 천혜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의 몸은 단지 세상을 느끼는 오감 외에도 희로애락을 나타내는 감정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물을 인식하고 그를 통해 사리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며, 또한 삶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 사고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사고력을 통해 자신의 감정 및 행동을 조절할 수 있다.  본능을 억제하면서 동물과는 다른 사회적인 동물로서의 본분을 지킬 줄 아는 것이다.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바로 사고력이고 분별력인 것이다.

  사고력으로써 사회적인 규범 및 도덕 그리고 윤리를 만들어냈다.  싸움을 하고도 그와 같은 사실에 대해 반성할 줄 아는 것도 인간이다.  그리고 잘못한 일이 죄가 된다는 사실을 확정하는 도덕과 윤리 그리고 법을 만든 것도 인간이다.  그러한 인위적인 삶의 조건 및 방식을 만들어냄으로써 비로소 동물과 다른 사회적인 동물이 될 수 있었다.

  “너에게”는 이와 같은 인간조건에 대한 철학적인 성찰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물론 여기에서 시인은 남녀의 애정관계라는 순수한 이미지를 빌어 인간조건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일깨우고자 한다.  즉 남녀의 사랑을 시적인 이미지로 채택하여 그 안에 도덕 및 윤리문제를 비롯 대자연과의 인간관계 그리고 윤회사상까지 담고 있다.  가장 원초적인 삶의 조건이자 삶의 방식인 암수로서의 사랑이야말로 인간조건 이전에 본능적인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사회에서는 본능에 의존하는 사랑을 동물적인 습성으로 파악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한 비인간적인 태도로 받아들인다.

  시인은 인간조건으로서의 사회적인 규범과 법률 그리고 도덕과 윤리를 떠나 가장 순수한 인간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말하고자 한다.  아울러 이러한 인간조건에 갇히지 않은 채 순수한 동물적인 본능에 이끌리는 유형의 사랑을 ‘죄’로 받아들여야 하는 인간사회에 대해 저항한다.  그의 시각에 의하면 인간으로 태어나는 그 자체가 곧 죄의 조건이 되는 셈이다.  그 정해진 운명의 길을 걷는 것이 인간이다.  가장 자연스럽고도 원초적인 본성으로서의 사랑조차도 인간조건이라는 상황에서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며 죄로부터도 예외일 수 없다.  사랑의 순수성 및 아름다움마저도 인간조건에 저촉될 때 죄가 될 수밖에 없는 인간사회의 그 실상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애인아/우리가 남 모르는 사랑의 죄를 짓고도/새빨간 거짓말로/아름답다 아름답다 노래할 수 있으랴’는 반문으로 시작한다.  ‘남모르는 사랑’이라는 말은 남이 알 수 없는 오직 둘만의 사랑일 수도 있고, 동시에 남이 알아서는 안될 비도덕적인 사랑을 의미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는 비도덕적인 사랑을 강하게 암시한다.  남이 알아서는 안될 은밀한 사랑을 하니 그것은 죄가 된다.  그러한 사랑은 아무리 당사자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해도 사회적으로 공인되지 않은 탓에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타의에 의해 규정되어야 하는 사랑의 정의, 그것은 인간사회의 속성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말하는 ‘남모르는 사랑의 죄’는 불륜의 사랑으로서의 냄새가 짙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사회적인 시각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그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갈파하고 있다.  ‘우리가 오래 전에/똑같은 공중에서 바람이거나/어느 들녘이며 야산 같은 데서도/똑같은 물이고 흙이었을 때/우리 서로 옷 벗은 알몸으로/입 맞추고 몸 부비는 애인 아니었겠느냐’며 사랑의 근원 그 순수성을 제시한다.  그렇다.  인간이 아닌 바람이거나 물이고 흙이었던 그 자연상태에서 나누는 사랑은 죄가 되지 않는다.  바람끼리, 물끼리 혹은 흙끼리 나누는 사랑은 누가 탓하지 않는다.  사고하는 존재,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의 모습이 아닌, 그저 자연의 일부일 따름인 동물이었을 때는 아무런 제약 없이 사랑을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자연상태의 모습이야말로 참다운 삶의 조건인지 모른다. 

  ‘우리가 죄로써 죽은 다음에도/다시 물이며 공기며 흙이 될 수 없다면/우리 여기서부터 빨리 빨리/중천으로 쏘아진 화살로 달아나자’고 외친다.  인간이기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그로 인해 이 세상을 떠난 후 인간으로 거듭 태어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물이나 공기나 흙으로 환원할 수 없는 세상이란 절망적인 것임을 단언한다.  다시 말해 인간조건을 벗어나는 사랑이 죄가 되는 세상에는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절규이다.  한마디로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로 태어나서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만든 삶의 조건이 바로 인간 자신을 옭매는 족쇄가 되고 있는 인간세상의 그 답답함을 통렬히 꼬집고 있는 것이 아닌가.

  ‘태양에 가려진 눈부신 과녁이/허물없이 우리를 녹여버릴 테니’

  이는 ‘중천으로 쏘아진 화살’이 태양에 녹아버림으로써 이 세상에서 지은 허물, 즉 죄 그 자체도 깡그리 사라지고 만다는 허무주의가 이 시를 마무리한다.  존재의 완벽한 사라짐을 시사하는, 형태의 용해로써 윤회는 물론이요, 인간 삶에 대한 그 어떤 가능성 및 기대의 고리를 끊고 말겠다는 처절한 다짐이다. 

  만일 물이나 공기 흙과 같이 죄를 짓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없다면 차라리 윤회의 고리를 끊는 것이 낫겠다는, 이 세상에 대한 그토록 깊은 절망이 눈물겹다.  시인을 절망의 늪으로 떨어뜨리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이른 바 통속적인 죄를 짓지 않고 순수하게 살고자 하는 시인의 삶이 되레 죄가 되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절망이다.  착한 사람이 살기 어려운 세상이라면 그것은 절망뿐이다.  그런 가망 없는 세상에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기에 윤회의 고리를 잡는 것은 더욱 큰 절망이다.  이 시에는 그처럼 부조리한 인간조건으로 채워진 현실에 대한 뼈아픈 인식이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글/신항섭(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