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나를 울린 시(4) - "오지 않는 꿈"

펜보이 2007. 6. 22. 14:42


 ‘오지 않는 꿈’

 

  박 정 만


  초롱의 불빛도 제풀에 잦아들고

  어둠이 처마 밑에 제물로 깃을 치는 밤,

  머언 산 뻐꾹새 울음 속을 달려와

  누군가 자꾸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


  문을 열고 내어다보면

  천지는 아득한 흰 눈발로 가리워 지고

  보이는 건 흰눈이 흰눈으로 소리 없이 오는 소리뿐.

  한 마장 거리의 祈願寺(기원사) 가는 길도

  산허리 중간쯤에서 빈 하늘을 감고 있다.


  허공의 저 너머엔 무엇이 있는가.

  행복한 사람들은 모두 다 풀뿌리같이

  저마다 더 깊은 잠에 곯아떨어지고

  나는 꿈마저 오지 않는 폭설에 갇혀

  빈 산이 우는 소리를 저 홀로 듣고 있다.


  아마도 삶이 그러하리라.

  은밀한 꿈들이 순금의 등불을 켜고

  어느 쓸쓸한 벌판 길을 지날 때마다

  그것이 비록 빈들에 놓여 傷(상)할지라도

  내 육신의 허물과 부스러기와 청춘의 저 푸른 때가

  어찌 그리 따뜻하고 눈물겹지 않았더냐.

 

  사랑이여,

  그대 아직도 저승까지 가려면 멀었는가,

  제아무리 잠이 깊어도 잠은 오지 아니하고

  제아무리 밤이 깊어도 꿈은 아니 오는 밤,

  그칠 새 없이 내리는 눈발은

  부칠 곳 없는 한 사람의 꿈 없는 꿈을 덮노라.


  시인 박정만과 필자 사이에는 조그만 인연이 있다.  이미 세상을 뜬 지도 오래 되었건만 그 마지막 몇 개월간 인사동을 껴안으며 행복해 하던 시인의 모습을 지울 수 없다.  시인은 간이 아파 오랜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필자와 만나기 전 이미 이승과 저승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고 했다.  병석에 있던 스무날 동안에 무려 삼 백여 편의 시를 써대서 다섯 권의 시집으로 꾸몄다고도 했다.  주어진 생을 탈없이 소진한다고 가정했을 때, 그만하면 제몫의 분량은 다 챙긴 셈이다. 

  필자가 시인을 만났을 때는 병세가 다소 나아졌는지 술도 조금씩 마시며 자신의 건강에 대해 빚지지 않는 호기를 부릴 정도였다.  어느 날 인사동에 있는 화랑에 들렀다가 화랑 주인으로부터 박정만 시인을 소개받게 되었다.  그 후 며칠인가 지나 화랑 주인으로부터 시인을 위한 시화전을 마련해보자는 제의를 받았다.  그래서 화랑 주인과 필자가 화가들에게 부탁하여 시화전을 열게 되었다.  시화전과 함께 그림이 들어있는 천연색 시집도 출간되었으니 시인으로서는 큰 호강이었다.  시인은 시집 서문에서 자신을 위해 애쓴 여러 사람에게 ‘살인적인 행복 속에서’라는 표현으로 고마운 마음을 대신했다.  그러나 행복의 최상급 언어 ‘살인적인 행복’은 아주 짧았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 연일 술만 들이키다가 끝내 절명했다.  간신히 마흔 두 해를 넘기고서였다.  ‘박정만 시화집’과 ‘박정만 시화전’은 그를 위한 마지막  ‘꽃 잔치’였다.  그게 벌써 열 두 해 전의 일이다. 

  ‘오지 않는 꿈’은 힘겹게 살아온 시인의 아픔이 절절이 배어 있는 작품이다.  제목이 시사하듯이 꿈을 꾸고 싶어도 꿀 수 없는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다.  잠을 이루지 못하니 꿈을 꿀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치더라도, 그 누구도 만날 수 없는 절해의 고도에 내동댕이쳐진 듯한 외로움의 장벽은 어찌할거나.  세상과 절연된 시간, 그러기에 사람은커녕 꿈조차 꿀 수 없는 완벽한 외로움 속에서 자신과 마주하고 있을 따름이다.

  ‘초롱의 불빛도 제풀에 잦아들고/어둠이 처마 밑에 제물로 깃을 치는 밤,’에 절간의 장명등처럼 홀로 밤을 지키고 있다.  그런데 산 뻐꾹새 울음 속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듯한 환청에 사로잡힌다.  너무도 적요하다보니 환청이라도 불러들이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일체유심조라고 했듯이 외로운 심정이 환청을 만들었음직하다.  하지만 이름을 부르는 듯한 환청은 저 세상의 손짓인지 모른다.  적지 않은 시간을 죽음과 동숙한 처지이고 보면 죽음의 유혹과도 친밀해져 있었지 않을까.  홀로 남겨진 듯한 그 외로운 시간에는 누구나 자신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게 된다.  거기에서는 삶과 죽음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자각이 있을 수 있다. 

  누군가 부르는 듯해서 ‘문을 열고 내어다보면/천지는 아득한 흰 눈발로 가리워 지고’ 그저 눈오는 소리뿐이다.  홀로 잠 못 들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고적하여 누군가 부르는 듯한 환청에 사로잡혔던 것도 바로 눈 오는 소리가 세상과의 소통의 길마저 완전히 차단하였던 까닭이었다.

  ‘한 마장 거리의 기원사 가는 길도/산허리 중간쯤에서 빈 하늘을 감고 있다.’는 구절에서 달콤한 시어의 아름다움과 만난다.  밤이기에 더구나 눈이 내기기에 보일 리 없건만 그리 멀지 않은 ‘기원사 가는 길’이 ‘빈 하늘을 감고 있다.’고 표현함으로써 시야를 무심히 밖으로 확장시킨다.  그런 비약이야말로 시가 가지고 있는 언어의 묘미이다.  시인의 시선은 어둠을 투과하는 능력이 있다.  현실적인 공간에 갇히지 않는 그 자유로운 의식의 항해가 시적인 긴장과 함축과 은유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허공의 저 너머엔 무엇이 있는가’  여기에서 시인은 허공이라는 현실 밖의 세계를 주시하고 있다.  ‘허공 저 너머’는 저승이 아닌가.  ‘행복한 사람들은 모두 다 풀뿌리같이/저마다 더 깊은 잠에 곯아떨어지고’있으나 시인은 꿈마저 가로막는 ‘폭설에 갇혀’ 있다.  사람들의 잠이 깊어갈수록 시인의 의식은 반비례하고 있다.  그러면서 ‘빈 산이 우는 소리’를 혼자서 듣고 있다.  ‘빈 산’은 눈이 덮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산을 말하고 있는 듯 싶지만 기실은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자 시인 자신을 암시한다. 

  ‘아마도 삶이 그러하리라’  시인은 지나온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그것이 비록 빈 들에 놓여 상할지라도’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었는가를 반문한다.  ‘내 육신의 허물과 부스러기와 청춘의 저 푸른 때가’ 참으로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것이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빈 들’에 놓여 누가 쳐다보지 않아 아무 쓸모 없는 생애였다고 해도, 삶이란 살아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감동적인 것인가를 되새기는 것이다. 

  ‘은밀한 꿈들이 순금의 등불을 켜고’에서는 저마다 지순한 삶의 꿈을 간직하고 있음을 얘기한다.  ‘순금의 등불’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변하지 않는 불꽃으로서의 생의 열정과 같은 것이다.  그러한 열정이 설령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꿈 많은 청춘시절이야말로 순금 못지 않은 삶의 절정이 아니냐고 시인은 되묻는다.

  ‘사랑이여,/그대 아직도 저승까지 가려면 멀었는가.’  이미 지나간 시절의 얘기이지만, 사랑이란 삶과 같은 몸을 하고 있어서 그렇게 간단히 잊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랑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지우지 못하는 것이다.  홀로 되었다는 자의식이 깊어 가는 시간일수록 지나간 시절의 꿈과 사랑이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다.  젊어서는 청춘에 살고 늙어서는 추억에 산다지만, 지금 절대고독과 마주한 시인의 심사로서는  닳아빠진 추억이 그나마 자그마한 위로라도 된다는 것인가.

  그러나 모든 일은 이미 자신의 손으로부터 떠나 있음을 스스로 확정한다.  ‘그칠 새 없이 내리는 눈발은/부칠 곳 없는 한 사람의 꿈 없는 꿈을 덮노라.’고 체념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은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음을 예감하는 것이다. (신항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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