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나를 울린 시(3) - "겨울 수화"

펜보이 2007. 6. 22. 14:41


 ‘겨울 手話수화’

   

  최승권

                                                 

  몇몇은 보이지 않았다

  졸업식 송사의 마지막 구절이

  키 작은 여학생들을 일제히 흐느끼게 할 때

  서울 어느 목공소 조수로 취직했다는 광오와

  상급학교에 진학을 못한 상동이의 얼굴은

  금 간 유리창 너머 갈매기 두 마리로 날아오르고

  교정 구석 단풍나무 한 그루로 선

  나는 노을이 지는 바다를 훔쳐보았다.


  싸락눈 잘게 뿌리던 날

  문뜰나루 건너온 그놈들이

  조회시간에 불쑥 내민 김뭉치를 받았을 때

  지방대학 국문과를 졸업하고

  서정적인 시골 중학교 선생님이 된 나는

  그놈들의 부르트고 째진 손등과

  교실 바닥에 나뒹굴던 해우무침 조각을 보고

  바다를 따라 흔들리는 유채꽃의 희망과

  황토밭을 흐르는 고구마 줄기의 자유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생각했던 것일까.


  해우 한 장보다도 얇은 졸업장을 주면서

  바닷가 갯물 냄새투성이의 아이들과

  마지막 뜨거운 악수라도 나누고 싶었지만

  나는 빈 칠판에 갈매기 두 마리를 그리고

  유리창 밑에 숨어 바다를 보며 울었다.


  서울의 낯선 어둠을 깎는 대패질 소리와

  절망마다 강하게 내리박는 못 소리가

  짧은 편지 가득 들려오는데

  앨범에 묻어두었던 흑백의 그리움이

  문뜰나루 갈매기 울음소리에 섞여

  옹암리 앞 푸른 바다로 출렁이는 것을 보았다.


  이 시를 읽으면서 단박에 목젖이 메었다.  그래도 시집을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몇 번이고 읽었다.  시가 주는 서정적인 이미지에 오래도록 취하고 싶어서였다.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겨운 일이다.  그리고 아름답게 산다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  그러나 시를 읽으면 내게도 그런 아름다운 삶이 가능하리라는 희망의 불쏘시개를 얻게 된다.  무한경쟁의 현대적인 삶의 법칙에 적응해 가는 내 자신을 볼 때마다 수없이 회의를 느낀다.  그럴 때 이처럼 아름다운 서정시를 읽으면 잠시나마 심신이 개운해진다.  마치 적요한 절간에 들어섰을 때의 느낌과 같다.

  ‘겨울 수화’는 단어 그대로 해석하면 겨울에 말없이 나누는 손의 대화를 뜻한다.  말이 필요 없어서일까.  말 없이도 전할 수 있는 언어 표현방법, 그것은 수화뿐이다.  몸짓언어는 수화와는 다르다.  수화는 약속된 언어체계를 가지고 있는 반면 몸짓 언어는 단지 암시하고 시사할 따름이다.  시인은 수화가 그려내는 그 암호 같은 언어의 표현방식으로 시골중학교 졸업식과 거기에 얽힌 교사의 감회를 아주 감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여기에서 시인이 발굴한 언어는 순금처럼 밀도 및 순도가 높다.  거기에는 한 치의 가식도 없다.  단지 극도로 감정을 억제하고 보다 객관적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하지만 시인의 감정은 넘치고 넘친다.  그 넘치는 감정이 감상자로 하여금 진한 감동에 젖도록 한다.  그만큼 진실하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감동은 그것이 어떠한 형태의 것이든 그 느낌을 말로 설명할라치면 입에서 나오는 그 순간에 건조해지고 만다.  감동은 순전히 개인적인 것이며, 동시에 말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다. 

  ‘겨울 수화’는 바닷가 중학교의 조촐한 졸업식에 대한 감회가 아주 서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작품이다.  산문에 가까운 문체인데다가 누구나 그 상황을 머리 속으로 그려내는데 어려움이 없을 만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시에서 숨겨지는 의미는 거의 없다.  단지 읽어내려 가는 것만으로 시속에 묘사된 정경과 거기에 투영되는 시인의 속마음을 환히 짚어낼 수 있다.  일기형식과도 같은 이 시의 구성방식은 서정시로서의 정서적인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이 시가 쓰여지기 이전에 여린 감성을 지닌 젊은 교사의 개인적인 감회에 겹쳐지는 졸업식 장면은 이미 서정시로서의 요건을 충족시킨다. 

  시인은 여기에서 교사를 객관화시키고 있다.  졸업식은 학교와 학생, 스승과 제자가 남고 떠나는 극적인 이별의 상황이다.  여기에서 스승은 학생과 마찬가지고 중심적인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는 그 상황에서 빠져 나와 졸업식이 가지고 있는 이별의 아픔을 통해 그로부터 시작되는 또 다른 현실적인 아픔과 마주하고 있다.  졸업이라는 이별의식이 단지 헤어지는 것으로써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얘기하고 싶은 것이 아닐는지.

  이 시는 졸업식 장면과 그 이전의 졸업식과 연관된 제자들의 현실적인 삶을 겹쳐놓는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다.  단지 졸업식이라는 이별의식 그 자체의 상황 묘사만으로는 시적 긴장이 약하다는 판단에서가 아닐까.  공통의 체험을 가지고 있는 졸업식을 단순히 실제상황을 중계하듯이 그려나가면 시로서의 긴장 및 함축 그리고 여운이 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졸업 이후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채 사회생활 속에 곧바로 뛰어든 두 제자의 현실을 졸업식 장면에 끌어들임으로써 졸업식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이 시에서는 근근히 학교를 다니며 미래에 대한 꿈을 키우는 궁핍한 아이들을 바라보는 젊은 교사의 시선이 따뜻한 체온을 느끼게 한다.  ‘몇몇은 보이지 않았다/졸업식 송사의 마지막 구절이/키 작은 여학생들을 일제히 흐느끼게 할 때’는 졸업식 풍경을 담담히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몇몇은 보이지 않았다’는 졸업식조차도 참석하지 못할 만큼 사연 많은 시골학교의 아픈 현실을 시사한다.  그 졸업식에서 문득 이전의 졸업생인 광오와 상동이를 떠올린다.  졸업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목공소 조수로 취직한 두 제자들의 현실을 보고 있는 교사에게는 지금 졸업식장에 서 있는 아이들의 내일은 또 어찌될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시인은 시골 중학교 아이들의 소박하고 순수한 꿈이 현실에 부딪쳤을 때 어떻게 허물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조회시간에 불쑥 내민 김뭉치를 받았을 때’ ‘그놈들의 부르트고 째진 손등과/교실 바닥에 나뒹굴던 해우무침 조각을 보고’ 곤궁한 삶에도 밝고 순수한 아이들이 마음껏 하늘을 나는 갈매기처럼 자유로운 꿈을 펼치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상급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목공소 조수로 취직해야만 했던 현실을 보면서 무기력해지는 자신을 느낀다.  그러기에 ‘바닷가 갯물 냄새투성이의 아이들과/마지막 뜨거운 악수라도 나누고 싶었지만’ 차마 손을 내밀지 못한 채 ‘유리창 밑에 숨어 바다를 보며 울었다.’고 고백한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무한한 꿈을 심어주지만 막상 차가운 현실 앞에서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힘없는 교사라는 직분에 대한 자괴감에 빠져 그저 남의 일처럼 졸업식을 먼  발치서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다.

  ‘서울의 낯선 어둠을 깎는 대패질 소리와/절망마다 강하게 내리박는 못질 소리가’는 그의 시적인 감수성이 아름답게 형상화되고 있는 부분이다.  시적인 표현은 이처럼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단어끼리의 교직을 통해 일상과는 전혀 새로운 공간을 체험케 하는 데 의미가 있다.  시는 언어의 아름다움과 함께 세계의 확장을 가져다준다.  그러한 언어의 연금술이야말로 시인의 고유 영역이다.  그의 시적인 언어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바라보면서도 거기에 서정적인 이미지를 가득 담아내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내용의 명료함으로 인해 단숨에 읽히게 하는 것도 그의 시가 가지고 있는 강점이다.  다시 말해 난해하거나 공허한 언어의 유희가 아니라, 현실공간과의 강한 유대감을 통해 생명력이 넘치는 언어의 진술방식을 채택하고 것이다. (신항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