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평

미술시평 (39) - 극사실회화의 기법과 미술시장

펜보이 2009. 7. 14. 22:34

극사실 회화의 기법과 미술시장



신항섭(미술평론가)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를 여는 기원 후 2000년은 숫자가 지닌 의미를 뛰어넘는 상징성을 내포한다. 1000단위에서 2000단위로 바뀐다는 사실에 국한하지 않는, 즉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대를 향한 희망과 욕구가 집약되고 있는 것이다. 지나간 1000년을 일단락 짓는 마당에서 보다 새로운 변화를 열망하는 잠재적인 욕구의 분출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기에 새로운 밀레니엄에 돌입하는 순간, 지구 전체가 축포를 터뜨리며 영광된 2000년대의 희망찬 출발을 선언했다. 이 선언은 전 시대와의 단절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전혀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을 구축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세계미술계에서도 새로운 밀레니엄으로 진입하면서 무언가 의미 있는 미학적인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는 묵언의 의지를 지지하게 되었던 것인지 모른다. 누군가 특정인이나 특정의 집단에 의해 시도되고 또 유도되는 그런 미술형태가 아니라, 어딘가에서 자발적인 힘에 의한 새로운 형태의 미술운동이 촉발되기를 기대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기대에 부응하듯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작과 함께 세계미술계에서는 새로운 미술의 기운이 싹트고 있었다.

20세기 말 2차 대전 이후 현대미술을 주도해온 뉴욕미술계는 세기말 현상에서 허우적이고 있었다. 현대미술을 이끌어갈 새로운 동력을 옹호할 기력이 없어 보였다. 추상표현주의를 기점으로 너무나 숨차게 변신을 거듭해온 20세기 후반의 현대미술은 마침내 아이디어 고갈이라는 예상된 난관에 봉착했다. 새로운 스타의 출현도 없었고, 새로운 아이디어도 눈에 띄지 않는 침체상태에 빠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2000년대로 접어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첼시를 중심으로 사진작업이 갤러리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물론 사진을 이용한 작업은 이미 20세기 후반 소수의 작가들에 의해 시도되고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현대미술로 편입되어 주류를 형성하게 된 것은 새로운 밀레니엄과 때를 같이한다.

사진이 현대미술에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팝아트였다. 신문이나 잡지 인쇄물 등 매스 미디어에 쓰이는 사진이 오브제라는 이름으로 팝아트라는 새로운 경향의 대중미술에 빈번히 이용되기에 이른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담은 사진이 활용되는 팝아트는 대중에게는 친숙한 이미지로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해서 사진은 자연스럽게 현대미술에 편승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된 셈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팝아트의 표현방법의 일부로서 받아들여졌을 뿐, 현대미술의 주류가 되리라는 가망성은 낮아보였다. 그러던 사진이 새 밀레니엄과 함께 마침내 현대미술 그 중심에 나타나 미학적인 논쟁의 주체가 되기에 이르렀다.

밀레니엄과 때를 같이해 등장한 새로운 의미로서의 사진은 객관적 실체의 제시가 아닌, 주관적인 해석의 형태라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새로운 사진작업은 의도적인 연출을 포함하여 보다 회화적인 시각으로의 접근, 또는 현상과 인화작업의 조작, 그리고 디지털 기술을 응용한 재가공이라는 방법론적인 틀을 갖추게 됐다. 이렇듯이 전통적인 사진기법과는 판이하게 다른 철학 및 조형개념 그리고 새로운 기법으로 무장한 것이다. 이는 명확한 주제의식의 제시 및 보다 적극적인 주관성의 개입이다. 전통적인 사진은 철저히 객관적인 시각을 옹호했다. 이에 반해 현대의 사진작업은 작가의 존재성을 두둔한다. 작가의 주관적인 시각이 강조되는 것이다. 

전통적인 사진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포착하는 데 의미를 두었다면, 현대미술 속에 들어온 사진작업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작가의 존재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와 같은 사진작업의 등장은 추상미술에 자리를 빼앗겼던 타고난 손의 기술자들, 즉 사실적인 묘사력을 갖춘 작가들에게는 흥분할 만한 희망적인 메시지였다. 

어쩌면 21세기 초반, 새로운 밀레니엄을 축하라도 하듯 한국화단에 불같이 일어난 극사실적인 회화는 사진작업에 고무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진이 현대미술의 주류로 들어올 가능성을 비치자, 사진을 능가할 수 있는 묘사력에 자신감을 가진 일단의 작가들이 서서히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 손의 기술이 뛰어난 작가들의 논리는 단순했다. 사진이 현대미술로 용인되고 있는 마당에 그보다 더 치밀한 묘사력을 발휘함으로써 사진을 제압하거나, 적어도 동등한 지위를 누릴 수 있다는 자신감에 고취되었다. 실제로 이들의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극사실적인 회화가 사진작업과 더불어 현대미술 공간의 중심적인 위치로 떠오른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사진을 능가하는 극사실적인 회화는 1960년대 후반에 등장한 하이퍼 리얼리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팝아트가 그랬듯이 대중성을 중시하면서 일상적인 소재와 중성적인 이미지, 그리고 비원근성을 특징으로 하는 하이퍼 리얼리즘은 사진기술을 원용하고 있음에도 사진의 포커스를 없앤 전면회화 형식을 취했다. 따라서 사진에 육박하거나 또는 능가하는 극사실적인 기법을 구사, 감상자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진다. 명암기법이나 원근법을 강조한 19세기 사실주의 회화의 맥락과는 다른, 보다 더 냉정한 객관성의 확보와 대중친화적인 소재 및 제재를 채택함으로써 새로운 시각적인 경험을 선물했다.

하이퍼 리얼리즘은 매스미디어 이미지를 오브제 형식으로 직접 활용한 팝아트와는 달리 사진을 놓고 그린다거나, 또는 슬라이드를 환등기에 투사시켜 확대하는 형태로 묘사한다. 입체를 평면으로 바꾸어 놓는 차가운 카메라 렌즈를 통해 바라본 객관적 실체를 보다 더 극명하게 묘사하는데 의미를 두는 것이다. 다시 말해 카메라의 일안렌즈가 포착해낸 물상은 포커스가 존재하는 반면, 하이퍼 리얼리즘은 포커스를 없애고 화면 전체에 균등한 묘사력을 부여함으로써 전면회화 형식을 취하게 된다.

또는 슬라이드를 이용함으로써 형태의 정확성을 확보한 뒤 정밀한 묘사로 차갑게 그려낸다. 여기에서 감정의 개입은 허용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사진 또는 부분 확대, 즉 클로즈업이라는 영화기법을 응용하여 시각적인 압박감을 준다. 여기에다 냉철한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가운데 사진이 미처 포착하지 못하는 극미한 세부묘사가 이루어진다. 물론 하이퍼 리얼리즘에서 일부 작가들은 현장에서 직접 작업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정확한 비례감각 및 형태감각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자신감에 근거하는데, 사진을 이용하는 작업과는 또 다른 형태의 긴장감 넘치는 시각적인 충격을 제공한다.

일반적으로 일안렌즈의 카메라 사진은 포커스가 존재하기 때문에 포커스를 벗어난 외연은 형태가 일그러지게 된다. 따라서 모델을 필요로 하거나 또는 현장 작업을 고집하는 작가들은 사진의 왜곡된 부분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다시 말해 정확한 비례감각 및 정밀한 묘사력을 갖추었다면 현장작업이 사진보다 더 정확한 이미지 재현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이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볼록렌즈의 일안 카메라는 화면 중심에 포커스가 맞추어짐에 따라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물상의 형태가 원형으로 일그러지게 된다. 가령 서 있는 인물의 경우 그 왜곡의 정도가 크지는 않을지언정 활처럼 휘어지는 것이다. 렌즈의 크기가 작은 카메라 사진을 유심히 관찰하면 이와 같은 왜곡현상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를 잘 설명해주는 사진은 여럿이 함께 촬영하는 단체사진이다. 단체사진에서 맨 바깥쪽에 서 있는 사람은 얼굴이 일그러진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왜곡현상은 볼록 튀어나온 곡면 렌즈를 사용하는 카메라의 포커스에 기인한다. 따라서 모델을 직접 그리거나 현장작업을 할 경우 왜곡현상이 일어나지 않아 보다 정확한 형태묘사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하이퍼 리얼리즘의 대중성은 대도시에서 살고 있는 작가들의 새삼스런 주변에 대한 관심의 환기를 의미한다. 자신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바깥세계의 사물과 거기에 맞추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무심히 겪는 일상적이고 기능적인 도시풍경을 통해 현실의 나를 보게 된다. 또한 주제 중심의 전통적인 사실주의와 달리 사진기라는 기계적인 시선에 의해 포착되는 무관심한 일상적인 풍경은 중심권에서 떨어진 소시민적인 평범한 삶에 대한 자각의 동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포커스를 없앰으로써 중심권을 벗어나 외연에까지 관심의 폭을 확장한다는 균등한 시선은 결과적으로 분석적인 시각을 요구한다. 이는 삶에 대한 보다 정밀한 관찰이자 관심의 반영이다. 이 문제들에 대한 답은 다름 아닌 사진기술에서 찾고 있다. 사진이 가지고 있는 한계, 즉 포커스에서 발생하는 왜곡현상을 보정하여 현실적인 시각으로 환원한다. 하지만 그 현실적인 시각은 차갑고 중성적이며 비감동적이다. 그리하여 더욱 냉철하고 치열하며 처절한 분석적인 시각을 통해 리얼리티 그 중심을 해체하여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시각적인 충격을 유도하게 되는 것이다.

슬라이드를 환등기에 비춰 부분을 확대시킨 화면은 리얼리티를 넘어 괴기스럽다. 이는 매스미디어가 제공하는 다양한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제시한 팝아트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시각체험이다. 확대된 크기에 대한 시각적인 압박감은 사실주의 이전의 다양한 인물화를 통해 훈련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의 개입이 배제된 무표정한 물상의 하이퍼 리얼리즘이 만들어낸 이미지는 19세기의 사실성이 결과적으로 일루전에 의한 허구였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슬라이드를 캔버스에 투사시켜 사진의 이미지를 그대로 활용함으로써 그림이 보여주는 사실성이 오히려 사진과 다르지 않거나 또는 능가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사진과 손의 기술적인 차이를 극복하는 하나의 확실한 증거인 셈이다. 이는 사진이 손의 기술보다 우월하다는 일반적인 인식을 허무는 일이다. 다시 말해 손의 기술이야말로 오히려 사진을 능가할 수 있다는 확실한 제시인 것이다. 하이퍼 리얼리즘의 공적은 사진기술이 보편화된 이후 사진에게 빼앗긴 손의 우월성을 재인식시켜 주었다는 점에 있다.   

하이퍼 리얼리즘 기법 가운데 또 하나의 특기할 점은 에어브러시를 활용하는데 있다. 에어브러시는 어쩌면 기계적인 표현에 가장 적합한 묘사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른다. 압축된 공기를 이용하여 물감을 분사하는 방식이어서 무표정한 중성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 보다 효과적일 수 있는 것이다. 무표정하게 기계적으로 물감을 분사함으로써 균등한 화면 질감을 만들어낸다는 점이야말로 전면회화 형식에 적합한 기법이다. 물론 에어브러시 기법은 기술적으로 익숙해지면 세필묘사에 필적하는 사실성을 얻을 수 있다.

에어브러시는 역시 카메라와 마찬가지로 과학기술의 산물인 셈인데, 미세한 물감의 입자가 도포되면서 붓 자국과 같은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는다. 따라서 신체적인 기능에 의한 묘사 흔적이 전혀 남지 않으므로 때로는 무미건조하게 느껴진다. 부드럽고 온화하고 정밀한 시각적인 이미지와 달리 차가운 인상인 것이다. 이처럼 무미건조하고 차가운 인상은 하이퍼 리얼리즘의 중성적인 이미지에 부합한다. 화가의 개성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표정 없는 표현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처럼 에어브러시의 시각적인 효과는 매스미디어의 인쇄물과 마찬가지로 그 중성적인 이미지로 하여금 대중적인 친화력을 느낄 수 있다. 화면에서 작가의 존재성을 지움으로써 대량생산 체제의 매스미디어의 이미지로 다가오는 것이다. 여기에서 에어브러시의 표현은 인물묘사의 경우 윤곽선이 무디게 처리되기도 한다. 세밀한 붓 끝에 의한 날카로운 선과 같은 냉철한 표현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어서 애매한 상황이 노출되는 것이다. 어쩌면 에어브러시 작업이 왠지 선명하지 못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세필로 묘사되는 윤곽선에서 얼음장처럼 차갑고 칼로 자른 듯싶은 예리한 맛을 느낄 수 없는 까닭이다.

1970년대 후반, 그러니까 미국에서 나타난 하이퍼 리얼리즘이 10여년 정도 지난 뒤에서야 한국의 일부 작가들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집단적인 미술운동이 아니라 소수의 손의 기술이 뛰어난 작가들이 개별적으로 하이퍼 리얼리즘에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이다. 물론 극사실적인 작가들을 한데 모아 동인활동 규모의 전시회도 열었으나, 화단의 주류로 자리잡기에는 세가 너무 약했다.

대규모 공업생산품으로 상징되는 산업사회 및 도시적인 정서로 채워지는 미국의 하이퍼 리얼리즘은 시대적인 산물이다. 어쩌면 10년 늦게 하이퍼 리얼리즘이 한국화단에 나타난 것도 산업사회로 진입하기 시작한 한국사회의 단면을 반영한다. 텅 빈 강의실이나 벽돌로 지어진 건물 외벽, 가죽소파, 폐기된 자동차 등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의 하이퍼 리얼리즘 역시 산업사회 및 도시적인 정서를 답습한다. 새로운 미술을 받아들이는 차원에서 머문 탓에 주체적인 소재 및 제재에 시선을 돌리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자연경관이나 정물 및 인물을 대상으로 하는 전통적인 사실주의에서 탈피하여 공업생산품이나 도시적인 소재 및 제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는 것은 표현영역의 확장이라는 성과를 가져온다.

일부 작가들 사이에서는 하이퍼 리얼리즘과 팝아트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가령 매스미디어, 즉 신문이나 잡지에 있는 사진 또는 글씨를 부분적으로 차용하는 오브제 형식의 작업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는 사진과 묘사력의 혼동, 또는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손의 기술에 대한 과시일 수도 있다. 실제로 이처럼 신문이나 잡지와 같은 매스미디어의 이미지를 그대로 차용하는 형식의 작품을 보면서 실제와 분간하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이처럼 일루전과 오브제의 차이 및 간격을 없앴다는 것은 하이퍼 리얼리즘의 실질적인 성과인 것이다.

한국의 하이퍼 리얼리즘은 동인활동 차원에서 머물다가 일부의 작가들 사이에서 계속 그 명맥이 유지되어 왔다. 급변하는 다양한 현대미술 사조 속에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은 채 손의 기술을 절대적으로 확신한 결과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인쇄물을 이용하는데 그치지 않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번에는 디지털 기술을 이용하게 된다. 즉 책자를 스캔하거나 디지털 사진을 찍어 컴퓨터에 입력한 뒤 포토샵을 거쳐 캔버스에 직접 이미지를 복사하는 방법을 동원하게 된 것이다. 이는 오브제의 활용보다도 더 적극적인 사진기술 또는 디지털 기술의 이용인데, 사진과 손의 기술적 차이를 모호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하이퍼 리얼리즘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의 작품을 보면 디지털 출력에 의한 사진기술 역시 손의 기술을 따르지 못한다. 정밀한 묘사 부분에서는 역시 섬세한 손의 기술이 우월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아무리 컴퓨터의 포토샵으로 보정한다고 할지라도 캔버스에 복사하는 과정에서 디지털 기술의 흔적을 남기게 된다. 반면에 정밀한 손의 기술은 극미한 세계까지도 극렬한 사실적인 이미지로 그려낸다. 손의 정밀한 묘사력을 사진이 따라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지털방식의 사진 이미지의 활용은 간편하게 대형 화면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극사실적인 회화에서는 아주 유용한 방법이다. 예를 들면 글자가 빼곡히 채워진 책자를 배경으로 깔고 그 위에 물상의 이미지를 극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작업의 경우, 사진기술과 묘사기술의 조합을 통해 놀라운 사실성을 도모하게 된다. 하지만 하이퍼 리얼리즘 이후 극사실적인 묘사력에 대한 시각적인 충격은 대수롭지 않게 됐다. 그 만큼 극사실적인 묘사 작품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최근 극사실적인 작업 가운데는 디지털 출력을 한 뒤 그 위에 덧그리는 식으로 묘사하는 방법을 구사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채색화의 밑그림과 같은 개념이다. 사진을 바탕에 깔고 그 위에 그대로 따라 묘사함으로써 사진이 회화로 전환한다는 형식논리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입체를 평면으로 만들어 놓은 사진작업은 아무래도 평면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실제의 인물을 눈앞에 두고 묘사하는 것과는 입체감에서 차이가 있다. 하지만 현대 작가들은 이러한 문제로 고민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보다 더 사진에 가까워질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듯싶을 정도이다. 

어쩌면 최근 한국화단에서 유행하고 있는 극사실적인 작업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진작업이 화랑과 미술관에 걸리면서 사진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졌고, 덩달아 극사실적인 회화에 대한 편견도 많이 불식되었기 때문이다. 사진작업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극사실적인 회화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진과 회화의 영역 또는 경계를 구분할 수 없는 까닭이다. 거꾸로 보면 사진과 회화가 서로 상대의 영역을 침범한 셈인데, 타 장르 예술 간의 충돌 및 화해는 이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지난 수년 동안 새로운 형태의 극사실적인 회화에 대한 미술시장의 반응은 거의 폭발적이었다. 어찌 보면 그동안 추상미술이 대세를 이룬 상화에서 뒷전에 밀려나 있던 사실주의가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대반격을 시작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해서 원근법과 명암기법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사실주의 회화로의 회귀는 아니다. 묘사력이라는 면에서는 사실주의 미학에 기조하고 있으나, 사물을 보는 시각이나 접근방법은 전통과의 단절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을 이용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하거니와 차갑고 메마른 듯싶은 정서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소재 및 제재에서도 현실적인 풍경, 즉 서민적인 삶에 초점을 맞춘 19세기 사실주의회화와 달리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물질적인 풍요로움 속에서 살고 있는 21세기 현대인의 삶의 정서가 밝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요구하는 까닭이다. 어느 면에서 최근의 극사실주의 회화는 철저히 구매자들의 취향에 맞추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마디로 상업적인 기대가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소재는 대다수가 꽃이나 과일 그리고 정물에 집중되고 있다. 물론 더러는 인물에도 관심을 갖는 작가가 있으나, 대세는 밝고 아름다운 소재에 맞추어져 있다. 이는 수요자들의 선호도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그림을 예술품으로 간주하던 입장에서 장식품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현대인의 미적 수준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작가들도 별다른 고민이 없는 듯싶다. 시장의 요구에 따라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냐는 식으로 가볍게 생각한다. 

수요자의 기호 및 취향에 맞추어 작업한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필연적인 일인지 모른다. 최근의 신사실주의 회화가 장식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데 대해 비관적일 필요는 없다. 팝아트를 필두로 하이퍼 리얼리즘과 최근의 신사실주의 회화는 이미 전통적인 미학개념의 핵심이던 예술성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회화성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미적 가치, 즉 예술성에 대한 부담감을 거의 느끼지 않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의 미술애호가들에게 예술성을 논하는 것은 자칫 따분한 일일 수도 있는 시대인 것이다.

한 때 한국미술계에서는 사진을 놓고 예술이냐 아니냐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그러던 사진이 버젓이 상업화랑에 걸리고, 현대미술을 취급하는 미술관에 걸리는 것이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게끔 되었다. 이렇듯이 시대가 변하면서 미술애호가들의 취향도 변하고 미학적인 관점도 바뀌고 있다. 어느 면에서 팝아트나 하이퍼 리얼리즘 그리고 신사실주의 회화에 대해 예술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은 시대감각을 모르는 진부한 투정인지 모른다. 사진작업은 물론이려니와 신사실주의 회화가 미술시장의 주류로 부각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를 뒷받침한다.

그렇다고 해서 신사실주의 회화가 추구하는 방향이 결코 옳다고는 할 수 없다. 치열하고 처절한 작가적인 성찰 및 고뇌가 반영되지 않는 그림은 여전히 그 정도의 가치에 머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의 미적 감각이 변한다고 할지라도 예술의 본령은 퇴색하거나 퇴화하는 것이 아니다. 시장경제 논리에 따른 시대감각을 외면할 수 없다고는 할지언정 예술성 자체를 가벼운 액세서리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창의적인 시각이 반영되지 못한 예술은 아무래도 허전한 까닭이다. 

<이 글은 2009년 7월14일 성남아트센터에서 열린 "또 하나의 일상, 극사실 회화의 어제와 오늘"전 학술세미나에서 발표된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