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평

미술시평(40) - 한중현대미술교류전 세미나

펜보이 2009. 8. 19. 08:04

제2회 한중현대예술교류전


현대미술의 운명과 전통적인 가치의 재발견


신항섭(미술평론가)


지난 해 하반기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세계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세계화를 주도해온 미국의 금융체제가 안고 있는 문제점이 노출된 사건이었지만, 세계경제의 흐름을 일시에 마비시킬 정도로 그 파급이 컸다. 이번 일은 미국과 같이 글로벌 리더십을 가진 국가가 경제위기에 처하면 곧바로 세계경제에 치명타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데 지나지 않는다. 예술도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경제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 미술시장의 경우 세계적인 경제위기로 인해 불황의 그늘이 짙게 드리우고 있다. 하지만 미술시장 경기가 급랭한데는 미국 발 금융위기와 시기가 겹쳐졌을 뿐, 이미 예고된 일이었다.

특히 중국현대미술의 경우 베이징올림픽 이전에 정점을 찍은 뒤 올림픽이 끝남과 동시에 추락할 것이란 예측이 그대로 진행된 결과일 따름이다. 경매시장을 중심으로 치솟은 중국현대미술 가격은 비현실적이었다. 아무리 성장잠재력이 큰 중국이라고 할지라도 40대 현대작가의 그림 가격이 수백만 달러를 호가한다는 것은 비정상적이다. 한마디로 투기자본이 미술시장을 흔들어 놓은 결과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스컴을 비롯하여 미술관계자, 그리고 미술애호가들은 낙관적인 견해만 쏟아냈다.

화랑이 정착되지 못한 상황에서는 경매가 미술시장을 손쉽게 조작할 수 있다. 이에 대한 경험이 없는 중국미술시장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미 적지 않은 경험을 쌓은 한국조차 부화뇌동, 엘도라도를 꿈꾸며 중국미술시장에 뛰어들었다. 소위 블루칩 작가로 지목되는 장샤오깡, 위에민준, 펑정지에, 정판즈 등의 작품을 구입하기에 혈안이었고, 일부 화상들은 이들 작품을 한국에 들여와 잠시 적지 않은 수익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작가는 세계미술시장을 장악한 큰 손들이 배를 채우기에 안성맞춤인 먹잇감에 불과했다. 잔치는 예정된 스케줄대로 끝나고 말았다. 중국미술시장 성장잠재력에 대해서는 부인할 수 없으나, 이미 한 차례 잔치가 끝나고 여흥마저 끝났다. 

세계미술시장은 대체로 10년을 주기로 움직인다. 그림 가격이 치솟은 뒤에는 내리막길을 걷게 되어 있다. 주식시장이 그렇듯이 아무리 경제상황이 좋다고 하더라도 폭등한 뒤에는 반드시 떨어지게 되어 있다. 그래야만 수익창출을 선도하는 미술시장의 큰 손들이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미술시장의 부침은 이미 두 번째이다. 1990년대 중반 추상미술을 중심으로 한 차례 경험했고, 2000년대 중반이 그 두 번째이다. 10년 주기설로 예상한다면 적어도 2010년대 중반까지는 미술시장이 숨고르기를 할 것이다. 물론 이 사이에 크지 않은 부침의 잔물결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중국현대미술의 본질이 미술시장에 좌우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한국미술시장에도 그 영향이 미치고 있다. 다시 말해 중국현대미술의 본질은 미술계 자체의 힘이 아닌 외부세력의 개입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즉 미술시장에 의해 중국현대미술이 이끌려가고 있는 것이다. 급변하는 중국사회의 현실을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중국현대미술은 풍자와 해학, 비유, 상징, 은유, 우의, 패러디와 같은 방식으로 표현된다. 거기에는 자본주의를 새로운 가치로 반기는 중국적인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즉,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배금주의 사상이 만연하는 현 중국사회의 단면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중국현대미술은 이 시대의 산물이다. 그러기에 냉철히 바라보자면 마치 패션과 같은 유행이나 다름없다. 중국현대미술은 수 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의 문화 및 예술혼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없다. 혼란스러운 시대상황을 적절히 반영하고 있을 뿐, 예술작품으로서의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시간 진행되고 있는 중국현대미술은 엄연한 중국미술이다. 단지 중국미술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중국현대미술은 중국의 현실만을 바라볼 뿐, 아름다운 과거의 전통을 잊고, 중국적인 가치로서의 내일의 미술을 말하지 않는다. 중국현대미술은 이미 시효를 상실했다. 거기에는 중국의 문화예술을 이끌어갈 설득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중국현대미술이 걸어온 방향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유행이나 다름없는 오늘의 현대미술은 더 이상 중국의 빠른 변화를 선도하지 못하고 있다. 세상의 흐름을 선도해야 한 미술이 미래를 예단하지 못한 채, 단물이 빠진 열매를 계속 빨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 바로 눈앞에 있는 낭떠러지를 향해 계속 가고 있다. 수많은 작가들이 무표정한 채 같은 구호를 외치고 행렬을 이루며 낭떠러지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을 예술이라고 말하면서 과연 한 번이라도 자신의 작업에 대해 과연 예술인가라고 반문했던 적이 있는가. 과연 자신이 진정 예술가인가라고 반문한 적이 있는가. 이런 고민을 했다면, 아니 자신을 진정한 예술가라고 생각한다면 벌써 유행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켰을 것이다. 예술의 길은 함께 가는 대로가 아니다. 두 사람이 함께 갈 수 없는 작은 길이다. 그 작은 길을 가는 데는 유행이 필요치 않다. 오직 사색과 고뇌와 각고의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이러한 문제는 중국작가들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한국작가들에게도 당면한 문제점이다.

오늘 대다수의 작가들은 유행하는 미술의 대열에서 탈락하면 길이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혼자로는 스스로의 존재성을 드러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길을 찾지 못해 막막할 때는 혼자서 박물관을 찾고, 책을 뒤적이며, 사색의 힘을 기름으로써 미래를 내다보는 밝은 눈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거대한 중국문명을 이끌어온 중국인의 삶의 문화와 그 자취를 돌아봄으로써 중국미술이 가야 할 방향 및 지표를 세울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한국작가들도 5천년의 중국역사와 한국역사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미술은 애석하게도 발전하거나 진화하는 것이 아니다. 기법이나 표현방법의 새로움은 가능할지언정 본질로서의 조형미, 즉 현대미술의 예술적인 가치는 전통적인 미술보다 발달하거나 진보했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술전반이나 미술이란 결과적으로 인간의 신체적인 기능의 산물이기에 그렇다. 인류를 달나라까지 보내는 놀라운 과학문명을 누리고 있다고 한들, 여전히 신체적인 기능에 의존하는 현대미술이 1천 년 전 작가들의 작품보다 더 우월한 예술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신체적인 기능을 이끌어가는 예술정신도 마찬가지다. 눈부신 과학문명의 시대에 태어난 현대인에게도 예술은 여전히 신체적인 기능의 숙달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예술적인 매력이란 이처럼 인간의 신체적인 여건을 벗어날 수 없다는 데 있는지 모른다. 예술적인 재능은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미술은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미술이야말로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가늠하는 척도일 수 있기에 그렇다. 특히 디자인의 우열이 현대산업사회의 새로운 경쟁적인 질서를 만들어내고 있는 현실에서 볼 때, 미술의 중요성은 날로 커지고 또 현실적인 돼가고 있다. 세계의 흐름이 서구에서 동진하고 있는 현실에서 중국이나 한국의 경쟁력은 바로 미술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국이 지역마다 다투어 거대한 규모의 미술관 건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은 미래에 대한 비전으로서의 하드웨어를 조성하는데 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미술관이 있더라도 그 미술관을 빛낼 수 있는 소프트웨어 즉, 우수한 미술작품이 마련되지 않으면 사상누각일 따름이다. 지금 중국미술시장을 선도하는 현대미술은 거대한 미술관에 어울린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비록 크기는 작을지언정 현대미술 이전까지 수 천 년 동안 면면히 이어져온 전통미술이야말로 그 미술관에 어울리는 주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작가들은 그 미술관의 새로운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희망과 열망으로 미술의 본질, 즉 예술적인 가치를 이끌어내는데 고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구를 바라보는 대신에 동양을 보고, 중국을 보며, 한국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전통미술에서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찾아내야 한다. 전통미술이야말로 현대미술의 무한한 보고이다. 이미 조상들이 이루어놓은 작품 속에서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전통미술을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미술은 과학처럼 발달하거나 진보하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중국의 소수의 작가들은 이미 전통미술을 연구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조형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다. 아마도 중국현대미술의 미래는 이들 소수의 작가들에 의해 선도될 것이다. 그럼에도 전통미술은 현대미술이 가야할 방향까지 모두 집약해 놓았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현대작가는 그리 많은 것 같지 않다. 전통미술은 결코 미개하지 않다. 오히려 현대작가들의 작품이야말로 전통미술이 도달한 세련미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

예술의 진면목은 심미의 문제를 파헤치는 데 있다. 예술이 인간 감정을 고조시키고 정신을 고양시키며, 정서적인 안정을 도모하는데 기능하는 것이라면 그 중심에는 심미의 세계가 존재한다. 자연에서 미추를 분별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미술작품에서 미추를 가려내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진정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예술가들보다 더 높은 경지에서 새로운 미적 가치의 발현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자연미와는 또 다른 조형의 미, 즉 인위적인 형상에다 심미적인 관점을 반영하는데 있다. 탐미적인 시각에 의해 분별되는 심미의 세계는 지적성찰을 매개한다. 예술에 의한 지적성찰은 인간정신 및 감정 그리고 행동거지를 고상하게 유도한다. 인간세상에서 현실적인 삶보다 한 단계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데 예술 말고 또 무엇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예술의 존재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글은 2009년8월26일부터 9월1일까지 세종문화회관미술관에서 열리는 제2회 한중현대미술교류전에서 발표하는 세미나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