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평

미술시평(37) -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현대회화와 한국화

펜보이 2009. 4. 22. 09:06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현대회화와 한국화



신항섭(미술평론가)


세계미술사에서 가장 뚜렷한 표현양식의 전환은 사실주의 및 인상주의 또는 모더니즘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주의는 객관적인 진실이라는 조형이념에 따라 재현성을 중심적인 가치로 제시했다. 그러나 지나친 객관적인 시각은 개인의 목소리를 반영하지 못하는 한계를 노출시킴으로써 창의적인 발상 및 주관적인 시각의 도전을 받게 된다. 인상주의를 진정한 모더니즘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음은, 실재하는 대상일지라도 보는 사람의 개인적인 시각은 물론이려니와 시간의 흐름 및 광량, 즉 빛의 변화에 의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는데 있다.

그러나 인상주의 이후 미술은 지나친 주관성 및 개성을 중시하는 나머지 점차 형태를 왜곡하거나 변형 또는 재해석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다가 급기야는 형태를 완전히 포기하는 추상으로 진행된다. 입체파를 필두로 구성주의, 다다이즘, 추상표현주의, 팝아트 그리고 미니멀리즘에  이르기까지 모더니즘은 20세기 현대미술의 중심을 장악한다. 그러나 모더니즘은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전에 직면한다. 추상적인 조형세계가 상상력의 확장과 더불어 내면세계를 표현하는데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난해하다는 점에서 대중성을 상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이 미니멀아트라는 종점에 도달했을 때 일단의 실험적인 젊은 작가들은 대중성과 보편성을 무기로 기력을 상실한 모더니즘을 몰아내고 있었다. 혁명가적인 입장에서 보수적인 입장으로 선회한 모더니즘의 권위를 타파하고, 대중과 친근한 이미지를 내세우는 새로운 구상작업이 다름 아닌 포스트모더니즘의 얼굴이었다. 대중성을 기치로 하여 개성과 자율성과 다양성을 형식논리로 설정한 포스트모더니즘은 복제의 개념을 도입한 팝아트를 비롯하여, 친숙한 거장의 원작품을 패러디하여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는가 하면, 작가의 존재성조차 거의 드러내지 않는 최소한의 이미지만을 제시하는 미니멀리즘과 같은 표현양식을 만들어냈다.

포스트모더니즘 미학이 한국미술계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또 새로운 미술운동으로 부각되면서 모더니즘 미학의 범주에서 벗어나 무한한 표현의 자유를 구가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포스트모더니즘 미학이 집단적인 형태의 미술운동이 될 수 없었던 것은 개성과 자율성과 다양성이라는 형식논리에 기인한다. 다시 말해 개성과 자율성이 무제한 주어짐으로써 어떤 통합된 조형형식으로 규합하기 불가능할 만큼 다양한 작업이 화단을 휩쓸게 된 것이다. 모더니즘 미학 및 표현양식과 사뭇 다른 시각에서 출발하기에 전통과의 대입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적어도 표현의 자유라는 점에서는 그 어떠한 제한도 없었다. 따라서 현대미술은 마침내 특정 양식이 지배하는 시대를 벗어나 다양성 시대로 진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 무엇으로부터도 간섭받지 않는 개별성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전까지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현대과학이 쏟아내는 다양한 재료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광로 속에 용해되어 다채로운 미술품으로 만들어지는 놀라운 일들이 전개되고 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세계미술 근간을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21세기 현대미술은 보다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어 포스트모더니즘 미학에 대입시킬 수 없는 경향의 작품도 수 없이 많다. 특히 비디오나 TV, 컴퓨터 등 전자매체를 이용하는 미디어아트는 또 다른 형태의 미술, 즉 새로운 장르로 구분해야 될 소지가 많다. 그럼에도 개성, 자율성, 다양성, 대중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아래 있다. 다만 개성, 자율성, 다양성, 대중성이 가벼운 팝아트적인 방향과는 다르다. 어쩌면 소통의 문제와 관련해 비디오아트를 기점으로 하는 다양한 형식의 미디어아트는 모더니즘 미학의 전철을 밟는 위험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친숙한 대중매체를 이용한다지만 즉, 소통의 문제와 관련해 난해하다는 지적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현대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전자매체가 아무리 친숙할지라도 미술가에 의해 재해석되고 재생산되는 미디어아트는 결코 친절하다고 할 수 없기에 그렇다. 어쩌면 모더니즘의 종착역이라고 할 수 있는 미니멀아트가 극단적인 난해성을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종말을 고했듯이, 미디어아트 역시 개념적이거나 관념적일 때 소통의 한계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 특히 전자매체를 이용하는 미디어아트는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되고 있음에도 여전히 실험적이라는 시각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중과 친밀해질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국화단에 등장한 것이 신사실주의라고 할 수 있는 일련의 극사실적인 구상회화이다. 극사실적인 구상회화가 화단의 전면에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사진작업이 유행하기 시작한 시기와 때를 같이한다. 2000년대 초 뉴욕 첼시를 중심으로 고개를 들기 시작한 사진작업은 기존의 사진과는 다른 시각을 반영한다. 눈에 보이는 사실에 충실해온 이전까지의 시각에서 벗어나 작가의 의도에 따라 연출된 사진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사진이라는 매체를 이용한 일종의 변형된 회화형식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연출이라는 행위는 내용을 만들어내는 작가의식의 반영이다. 물론 사진작업에서 주어진 사실, 즉 피사체를 그대로 렌즈에 담는 전통적인 방식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든 기존의 사진작업과 다른 점은 회화적인 표현방법을 도입하거나 또는 의도적인 상황설정에 의한 인위성의 강조이다. 이는 개성을 중시하는 회화적인 표현방법에서 비롯된다. 사진작업의 특성은 개성, 자율성, 다양성, 대중성 그리고 대량복제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미학에 동조하는 듯한 인상이다.

어쨌든 사진작업은 전통회화에 관심을 가져온 일단의 젊은 작가들에게는 복음이나 다름없었다. 손의 기술을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훈련과정을 거친 젊은 작가들은 보다 적극적이고 과감하게 사진을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재현성이라는 19세기 사실주의의 미학에 기조하면서도 사진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또한 1970년대 풍미했던 하이퍼 리얼리즘의 연장선상에서 볼 수도 있으나, 묘사기법이나 구도 및 구성은 오히려 사실주의에 가깝다. 특히 접사형식의 사진기법을 그대로 활용함으로써 19세기 사실주의 회화가 넘지 못한 시각적인 압박감을 준다.

이처럼 신사실주의라고 할 수 있는 극사실적인 회화는 사진작업이 현대미술의 영역으로 편입된데 대한 관대한 시각과 무관하지 않다. 다시 말해 눈에 보이는 사실, 그 이상의 극렬한 재현성은 사진의 무감각하고 기계적인 재현성과는 엄연히 다른 시각적인 충격을 제공한다. 사실성이란 측면에서도 신사실주의 작업은 사진의 표현영역을 뛰어넘는다. 특히 작품의 크기가 커질수록 사진과의 차이는 더욱 명백해진다. 사진기의 렌즈보다 더 명료한 사실적인 묘사력이야말로 오늘의 신사실주의 회화가 존재하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아무튼 신사실주의는 구상회화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재현성에 대한 이전의 무관심과 냉담함을 역전시킨 신사실주의는 ‘그리기’ 즉, 잘 훈련된 정밀한 손의 기능을 회복시켰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는 작지 않다. 이는 어쩌면 오랜 동안 추상미술의 난해함에 지친데 대한 반대급부적인 현상인지도 모른다. 타협점을 불허하는 추상미술에 대한 반발심이 사진작업과 신사실주의 회화의 상륙을 허락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두 가지 작업은 일단 구상미술, 즉 대상이 존재하는 재현성에 대한 관심의 환기로 볼 수 있다. 보이는 것을 본다는 편안함이야말로 난해한 추상미술 앞에서 갈구하던 것이 아니었을까. 구상미술, 그 가운데서도 극사실적인 신사실주의의 등장은 이와 같은 시대적 상황의 산물일 수 있다.

사진과 신사실주의가 이렇듯이 미술계의 전면으로 부각되고 있는 사이에 전통회화인 수묵화 및 채색화의 영역은 점차 협소해지고 있었다. 하기야, 수묵산수화 경우 실경산수라는, 일련의 재현성에 기반을 둔 작업이 한동안 유행하는 듯했다. 이는 겸재 정 선의 진경산수에 대한 새로운 관심의 여파라고 할 수 있는데, 실제의 풍경과 마주함으로써 관념성을 탈피하고 보다 현실적인 감각을 반영한다는 입장이었다. 실경산수 또는 사실적인 묘사방식을 취하는 일련의 수묵화는 쇠퇴하는 한국화에 잠시 링거와 같은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실경산수는 직접 자연경관과 마주하면서 ‘보고 그린다’는 객관적 사실의 재현이라는 방법을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신사실주의와 같은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것일까. 그 이유의 하나는 현대인의 미적 감각에 관한 문제로서, 생활환경의 변화, 즉 컬러TV로 상징되는 컬러시대의 도래를 마치 남의 일처럼 무관심한데 있다. 뿐더러 서구적인 감각으로 변화한 주거 공간도 고전적인 이미지의 수묵산수화 및 채색화의 존재를 위태롭게 하는 요인으로 파악된다. 여기에다 시대감각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전통성 및 보수성도 한 몫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 현대인의 미적 감각을 따르지 못하는 경직된 조형적인 사고가 전통회화의 변화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던 셈이다.

한국화 분야에서도 실험적인 작업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서구적인 현대미학은 물론이려니와 새로운 재료 및 방법을 받아들여 다양한 해석을 곁들이는, 일단의 현대회화로서의 한국화가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 현대적인 한국화는 어떤 공통분모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전통에 대한 충분한 이해 및 숙지 없이 단지 시각적인 이미지로서의 현대성을 추구하기 때문이지 싶다. 서구현대미학에 기반을 둔 조형적인 사고는 새로운 재료를 찾아 나서는 동기를 부여했다. 따라서 유채나 아크릴 따위의 서구미술의 재료 또는 레디메이드와 같은 공업생산품을 무제한 이용한다. 그러기에 이미 이들 새로운 경향의 한국화는 국적불명의 상태가 되었다. 이들의 작업에서 전통적인 가치를 찾는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그 만큼 전통미학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이들에게도 할 말은 있다. 장르의 구분은 물론, 한국화와 서양화, 전통성과 현대성이라는 이분법적인 시각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단지 조형적인 문제로서의 회화만이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전통회화의 입장에서 보면 장르의 파괴를 포함, 무차별적인 서구 재료의 사용은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다. 뿌리가 없는 그림은 결과적으로 부평초의 신세를 면할 수 없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전통회화를 지지하는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의 하나는 창의성, 즉 창작이라는 예술창작의 윤리강령에 대한 망각이다. 새로운 형태의 미적 질서를 탐색하는 행위가 다름 아닌 창작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이다.

전통회화 쪽에서는 미래를 비관적으로 전망한다. 이제 한국화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고 자조한다. 그렇다. 현재 상황으로만 보아서는 희망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는 세상과 미래를 내다보는 시야가 좁기 때문이다. 또는 세상을 자기중심적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철저한 객관적인 시각으로 과연 세상의 어느 위치에 한국화가 존재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과거의 습속을 이어가는 것만이 능사인 것처럼 안일한 사고에 젖어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한국화가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현대성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재료 및 기법의 문제가 아니다. 지필묵으로도 얼마든지 새롭고 현대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다만 눈이 열리지 않기에 그저 과거에 안주하고 있을 따름이다. 다양한 관점에서의 조형적인 변주야말로 한국화가 생존할 수 있는 보다 현실적인 대안일 수 있다. 어쩌면 현대미술이 간과하고 있는 예술 본연의 미적가치, 즉 전통적인 미학의 구현에 집중함으로써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 사람들의 문화적인 감각이라는 것은 변덕스럽기 짝이 없다.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을 따분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지금은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난무하는 현대미술에 심취하고 있는 듯싶지만, 어느 순간이면 그로부터 염증을 느낀 나머지 순간적으로 등을 돌릴 수 있다. 이는 새로운 가치에 열광하는 이들의 속성이다. 그 때 문득 마치 잊고 있었다는 듯이 전통적인 가치, 즉 탐미적인 조형세계에 눈을 돌리게 될지 모른다. 전통적인 미술이 추구해온 순수미는 불변의 예술적인 가치인 까닭이다.       


<이 글은 2009년 4월29일 세종문화회관미술관에서 열리는 '후소회' 세미나 원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