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 현장

현대미술 현장 (3) - 전지연

펜보이 2009. 6. 16. 23:03

 

 

 

전지연의 작품세계


절대자유를 꿈꾸는 자의 경쾌한 유희


신항섭(미술평론가)


자연은 인간에게 많은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정작 그러한 사실을 알아채고 거기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인간은 생각처럼 많지 않다. 자연현상 모두를 당연한 일로 받아들일 뿐, 그로부터 연원하는 인간 삶을 제대로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또는 수시로 깜짝깜짝 놀랄만한 미묘한 자연현상의 변화에 대해서도 무심한 모습을 보인다. 모든 감각을 열어놓고 세상과 대화를 나누어야 할 예술가들조차 그러하다. 자연은 몸과 마음을 열어놓은 자에게는 거침없이 들어온다. 몸과 마음으로 들어온 자연의 얘기를 번안하는 것만으로도 창작의 샘물은 고갈되지 않는 것이다.

전지연은 자연을 내부로 초대하여 그 자연이 지시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 자신의 사유의 세계를 담아 세상으로 돌려보낸다. 그가 최근 작업의 명제로 채택하고 있는 ‘관계’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 받아들이고 돌려보내고 다시 받아들여 또다시 돌려보내는, 자연계의 질서인 순환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역할은 미적인 표현이라는 방법을 통한 가치변환의 매개에 그치는 셈이다. 자연적인 가치를 미적 가치로 바꾸어내는 일종의 번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가 자연과의 소통을 수단으로 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이미지들이 자연을 논외하고서는 설명될 수 없다는데 있다. 물론 선묘로 결구되는 기하학적인 형태의 구조물이 등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이미지도 자연에서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예를 들면 나뭇가지로 엮는 새들의 둥지가 그와 유사하다. 또한 나뭇잎의 잎맥도 그런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업에서 보여주는 구조물의 이미지를 그로부터 가져왔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자연이 가르쳐주는 내용에 상응하는 이미지로서 캔버스에 옮겨지는 것이다.

그 이미지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유기적인 속성을 띠고 있다. 가령 작품 속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유선형의 이미지는 씨앗이나 나뭇잎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씨앗이나 나뭇잎이 아니란 사실은 일정하게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형태에서 알 수 있다. 그 형태는 어떤 구체적인 물체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하나의 상징적인 이미지로서 존재할 뿐, 형태를 지향하려는 의지가 미약하다. 그 이미지는 자연물을 연상시키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자연물을 의식하지 않은 채 순수한 미적인 감각이 산출해낸 인위적인 형상일 따름이다. 그 인위적인 형상은 일정한 형태로 이합집산하면서 조형적인 룰을 형성한다. 동시에 상징성을 가지면서 화면의 구성적인 요인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 깊게 보면 리듬에 이끌리고 있다. 즉 어떤 흐름을 타고 있다. 물의 흐름이나 대기의 움직임과 같은 흐름이 감지되는 것이다. 그 흐름은 부드럽고 리드미컬하며 온화한 인상이다. 모든 존재를 허용하며 모든 존재를 넉넉하게 감싸는 깊고 넓은 바다 또는 하늘과 같은 포용력을 보여준다. 그런 공간에 존재하는 형태, 즉 유선형의 이미지는 아주 가볍고 경쾌한가 하면 은밀하다. 그 나선형의 이미지에서는 이상하게도 질량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형상을 가지고 있는데도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새의 깃털처럼 미약한 공기의 흐름에도 반응하는 그런 가벼움이란 마음의 무게를 덜게 하는데 긴요하다. 그렇다. 그가 만들어낸 나선형의 이미지는 정신 및 감정을 가볍게 만드는 효능이 있다. 그 이미지를 보고 있노라면 무중력의 공간을 떠다니는 듯싶은 기분 좋은 상상을 가능케 한다.  자연에 몸과 마음을 내맡긴다는 것은 이처럼 심신의 평안함이 보장되는 일이다. 

또한 일정한 두께의 선으로 만들어지는 얼개구조의 이미지는 그 자신의 회화적인 이념 또는 사상을 대변하는 상징의 하나인가 하면, 내면세계의 투영하는 도상이기도 하다. 자세히 보면 입체적인 구조물 같으면서도 입체가 아닌, 단순한 선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다. 선의 구조는 기묘하게도 입체 구조물로 착각하게 만든다. 마치 철사를 얽어놓은 듯싶은 입체로 보이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그 선의 구조가 가지고 있는 간명한 이미지가 투명한 세계를 암시한다는 데 있다. 숨김이 없는 명백하게 드러난 이미지, 안팎의 구분이 없는 이미지, 그것은 무엇이든지 통과시킬 뿐만 아니라 소통을 가능케 한다.

 

 

자연현상에 비유하자면 바람이나 빛 안개 따위와 같이 몸체를 갖지 않는 자연의 상을 가볍게 통과시키는 장치인 셈이다. 안팎이 없는 얼개구조에 걸리는 자연의 상이란 없다. 훤히 내비치는, 아니 들여다보이는 세계는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절대자유를 상징한다. 그 절대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 자신의 내면세계, 즉 마음이다. 한마디로 얼개구조의 이미지는 마음을 상징하는 도상인 셈이다. 마치 깃털처럼 가볍게 무한공간을 자유롭게 산책한다. 그 마음의 형상은 무게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유선형의 이미지와 선묘형식으로 표현되는 얼개구조의 이미지는 세상에 존재하는 물체인 듯싶지만, 실은 그 자신의 회화적인 상상이 조합해낸 상징적인 도형일 따름이다. 그래서일까. 지혜롭게 보인다. 다시 말해 지적인 사고의 산물임을 웅변한다. 그러면서도 자연물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는 것은 경직된 사고의 산물이 아닌 유기적인 사고의 산물임을 말하려는 것인지 모른다. 실제로 그의 회화적인 상상이 가공해낸 이들 두 가지 형태는 이합집산하면서 어떤 보이지 않는 질서가 만들어내는 리듬을 따른다. 그 리듬은 자연율에 기인하는 것임을 짐작케 한다. 거기에 인위적인 가공의 흔적은 없다. 언급한 대로 유선형의 이미지나 얼개구조의 이미지의 존재방식은 그만큼 자연스럽고 조화롭다. 이는 자연의 존재방식을 그대로 원용한 결과이다.

 

 

어찌 보면 유선형의 이미지와 얼개구조의 이미지는 서로 상충하는 관계로 보인다. 조형적으로 서로 직접적인 연관성도 없을뿐더러 서로가 너무나 낯설게 보이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화면에서는 기묘하게도 조화의 관계를 이룬다. 두툼하면서도 결코 가볍게 보이지 않는 유선형의 이미지들에 비하면 너무나 앙상하게 드러나는 얼개구조의 이미지란 생경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름답게 공존한다. 이처럼 상대적인 이미지가 조화롭게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어떤 리듬에 통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리듬이란 비어 있지 않은 공간을 형성하는 어떤 존재물의 통일된 질서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이미지가 자리하는 공간은 인간이 만들어낸 존재방식, 즉 전후좌우상하 따위의 방위개념으로부터 자유롭다. 다시 말해 무주공간일 따름이다. 그러기에 걸림이 없이 자유롭게 자리한다. 유선형의 이미지가 횡적인 리듬을 타는데 비해 얼개구조의 이미지는 횡으로나 종으로 그리고 사선으로는 물론이요 거꾸로도 자리한다. 그러나 몇 개의 얼개구조는 나름대로 어떤 질서를 의식하는 듯싶다. 리듬감을 형성하면서 화면의 구성적인 아름다움을 부단히 의식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유선형의 이미지와 얼개구조의 이미지라는 어쩌면 낯설어 보이는 두 개의 이미지가 하나의 공간에서 화합하고 조화를 이루는 공존의 관계를 보여준다. 유선형의 이미지는 이합집산이라는 공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견고한 존재방식을 보여준다. 반면에 얼개구조의 이미지는 가볍고 투명하며 지혜로운 존재방식으로 다가온다. 가벼운 몸체의 얼개구조가 보여주는 그 자유로운 몸짓, 아름다운 유희는 세상을 존재케 한 절대자에 대한 일종의 헌사이자 헌화의식인지 모른다. 어쩌면 유선형의 이미지는 세상이자 절대자의 견고한 믿음의 땅으로 이해될 수 있는지 모른다. 안정과 평화로운 지구의 삶을 보장하는 절대자와의 관계에서 그 자신은 그저 사랑스러운 존재이기를 희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작업방식은 아주 치밀하면서도 차분하다. 결코 감정의 과잉이나 불필요한 제스처를 용납하지 않는다. 고전적인 방식으로 겹겹이 쌓아올리는 물감의 존재감이라든가, 형태를 만들어가는 성실함, 그리고 지적인 사유의 세계를 응집하는 인내심으로 견고한 화면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어느 면에서는 단조로운 이미지의 연속적인 배열이라는 형식적인 틀 안에서도 진부하다는 느낌이 없다. 고전적인 숭고함이라든가 엄숙함은 경쾌하면서도 부드러운 유기질적인 이미지 속에 녹아들고 있는 까닭이다. 현대적인 감각의 그림인데도 가볍지 않은 것은 그런 견고한 조형적인 기반을 마련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조형적인 원리는 자연에 있다. 회화적인 상상이 만들어낼 수 있는 공간 속에서 자연의 흐름 또는 질서라는, 생명의 순환을 가능케 하는 유동하는 존재로서의 자연현상을 조형의 기반으로 채택하는 것이다. 그 위에 그 자신의 의식세계, 또는 마음을 투사시키는 조형물을 띄워놓음으로써 자연을 주재하는 절대자와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의 관계에서 한없이 자유로운 의식의 항해를 꿈꾸는 것이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로운 존재방식의 삶을 희구하는 것이다. 예술의 세계란 결국 그런 절대적인 자유를 쟁취하는데 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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