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 현장

미술현장 (6) - 하명복

펜보이 2009. 7. 19. 22:52

 

 

 

 

하명복의 작품세계


선의 탈태와 그 잔상


신항섭(미술평론가)


그림은 행위의 흔적이다. 캔버스 위에 펼쳐지는 이미지는 형태이든 추상이든 ‘그린다’는 행위의 소산이다. 묘사한다는 것, 또는 표현한다는 것은 신체적인 행위를 수반한다. 하지만 행위 자체는 캔버스에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로서의 흔적만을 남길 따름이다. 그러고 보면 그림이란 행위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행위를 유도하고 선도하는 것은 다름 아닌 미의식이다. 미의식이 신체를 사역하여 표현행위를 이끌고, 그 흔적으로서의 이미지를 남기게 되는 것이다.

하명복의 최근 작업은 이처럼 작품제작과 관련한 미의식에 이끌리는 신체적인 행위, 그리고 그 전개과정 및 흔적을 여실히 보여준다. 통일된 기법 및 이미지로 일관하며 단일색조의 바탕색에 의해 지배되는 화면구조는 단조롭다. 이렇듯이 캔버스에서 보게 되는 이미지는 결코 난삽하거나 어지럽지 않다. 그럼에도 왠지 시각적인 이해가 쉽지 않다. 구체적인 형상이 드러나지 않는 추상적인 이미지이기 때문만도 아니다. 전체적인 인상은 부드럽고 온화하며 여유로워 보인다. 그런데 세심히 살펴보면 그렇게 간단히 이해될 수 있는 이미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수긍하게 된다. 시각적인 이해 그 이상의 감상태도를 요구하고 있는 까닭이다.

 

 

모호하게 처리되는 물감의 반점들이 마치 세포분열처럼 증식하는 상황을 보여준다. 그림과 마주하고 있는 순간에도 안에서는 유기적인 생명체들이 부단히 증식하는 듯싶다. 고착된 이미지가 아니라 자발적인 생명력을 지닌 유기체의 덩어리들로 보인다. 미세한 점질의 입자들이 분주하게 유동하는 정경을 연상하게 되는 것이다. 팽배하는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한 화면은 관념의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실증하려는 것인지 모른다.

그의 작품은 추상으로 출발하지만, 거기에는 관념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다. 무의식적인 자동기술이나 잠재된 욕망의 표출이 아니라, 철저히 통제된 미의식이 지시하는 관념의 세계인 것이다. 그의 작품을 이끌어 가는 선은 관념의 세계를 은닉한다. 형태를 갈구하는 묘사적인 선이 아니다. 오직 선 자체의 순수성을 통해 드러내는, 관념의 세계에 포진하는 생명의 기운과 거기에 깃들이는 미적 가치를 보려는 것이다. 이처럼 관념의 옷으로 갈아입은 선은 심미적인 시각을 기다린다. 무언가 은닉된 미의 실체를 탐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요구에 직면한다.

 

 

최근 작업인 ‘잔상’ 연작은 선의 존재가 있던 흔적만을 보여줄 뿐이다. 분명히 선이 존재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아니, 선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가정이 아니라 실제상황이다. 실제의 선에 대한 존재성 여부는 다름 아닌 얼룩과 같은 반점으로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지우는 행위에 의해 실체가 사라지고 없을지언정 작업과정에서는 엄연히 존재했었다. 그러나 완결된 작업에서는 선의 실체를 찾을 수 없다. 따라서 그는 선이 존재했었다는 분명한 사실을 설명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일까. 그리하여 선을 캔버스에서 분리시키는 방법으로 선의 존재성을 확인시킨다는 착상을 하게 된다.

투명 비닐 위에 선명히 그려진 선의 이미지를 천정에 매달아 놓는 것이다. 선이 그려지는 진행상황을 10단계로 나누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차례로 천정에 매달아 놓음으로써 선이 존재했던 경로를 추적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은 일테면 유체이탈과 같은 개념이다. 캔버스라는 몸체에서 분리되어 나온 선이 마치 유령처럼 허공에 그 존재성을 드러낸다는 발상이다. 선의 이탈인 셈인데, 실제의 선이 존재했었음을 반증하는 반점을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선이 존재했던 흔적으로서의 얼룩, 즉 반점은 이제 선이 이탈한 자리에서 독자적인 이미지로서의 존재성을 인정받아야 할 처지에 놓인 셈이다. 작품에 따라서는 반점의 형태가 반투명 재질의 옷감위에 물감이 번져나가는 듯싶은 표정이어서 경쾌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경쾌함이 무거움을 은닉하고 있다. 그 무거움은 필경 다양하게 반복되는 표현행위의 과정에서 축적된 미의식의 침전물이기 십상이다. 유동하는 생명의 기운이 화면을 지배하는 가운데 미의식은 점점 깊이 가라앉는다. 그러다가 작업이 완결되는 시점에서, 시각적인 이미지 안쪽에 은거하다 슬며시 현현하는 것이다. 미의식은 정신의 영역이지만 시각적인 이미지를 빌어 그 존재성을 드러낸다. 작품의 전체적인 인상이 가볍지 않은 것은 이에 연유한다.

‘잔상’ 연작은 작업과정이 이전과 같은 경로를 밟는다. 즉, 풀로 엮어 만든 빗자루 형태의 큰 붓을 힘차게 움직여 추상적인 선을 긋는다. 한바탕 폭풍이 몰아치고 난 듯 거친 신체적인 힘이 실린 두터운 검정색 선이 화면에 남겨진다. 가쁜 호흡이 느껴지는 힘찬 선은 거의 반점에 가까우리만치 두텁고 무거울 뿐만 아니라 격정적인 표정을 내뱉는다. 추상적인 검정색 선이 지배하는 화면은 강렬하다. 어떤 특정의 형상을 의식하지 않은 채 신체적인 힘이 지배하는 표현의 순수성 그 자체를 보여주는 까닭이다.  

 

  

이렇듯이 자유로운 형태의 검정색 선들의 유희가 한 차례 끝나고 나면 동세감이 선명한 추상적인 이미지가 화면에 남는다. 이후부터는 검정색 이미지의 선을 지우는 행위가 시작된다. 물에 적신 붓으로 검정색 이미지를 지우는 과정은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검정색 아크릴이 응고되기 전에 진행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얀 소지의 캔버스에 묻는 검정색 선의 이미지는 완전히 없어지지 않고 얼룩과 같은 형태로 남아있게 된다. 그 검정색 얼룩, 즉 검정색 반점이 결과적으로 작품의 기본적인 골격이 된다.

이처럼 검정색 반점이 작품의 골격이 되고 그 위에 여러 차례의 채색작업이 진행된다. 물론 채색작업 과정에서도 지우는 행위가 반복된다. 따라서 작업이 끝나는 시점에서는 물감을 칠하고 지우는 반복적인 행위의 흔적이 화면에 고스란히 남게 된다. 그러고 보면 물감을 칠하고 지우는 반복적인 행위는 다름 아닌 표현행위가 되는 셈이다. 여기에서 지운다는 의미는 일테면 칠하는 행위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미묘한 색조를 만들어내는 표현방법이다.

기본적인 색채 패턴을 유지하면서 칠하고 지우는 반복적인 표현행위는 단순히 새로운 개념의 이미지만을 얻기 위한 표현방법은 아니다. 오히려 지루하다고 할 수도 있는 색채를 칠하고 지우는 반복적인 행위야말로 미의식 또는 심층적인 내면세계를 유인하여 캔버스에 안착시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보고 그린다는 또는 무의식이나 잠재의식의 표출과도 다른 정신의 깊이가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정신의 깊이는 결과적으로 심미와 연관성을 지닌다.

 

 

이전의 작업은 선을 매개로 하는 표현행위, 즉 몸짓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있었다. 그리하여 다양한 형태의 선을 모색하는 일련의 작업과정은 격렬한 신체적인 몸짓이 지어내는 표정에 생명의 기운이 깃들도록 하려는데 집중된다. 붓질을 통해 얻으려는 생명의 기운은 자연성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자연을 호흡하는 기분을 맛보게 하자는 것이다. 자연의 생명체를 관장하는 어떤 절대적인 힘 또는 질서를 힘찬 붓질로 유인하여 캔버스에다 안착시키려는 것이다. 

그의 최근 작업에서 눈에 띄는 변화 가운데 하나는 색채이미지이다. 색채이미지를 보다 적극적인 표현수단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선의 순수성만을 추구하던 시각에서 벗어나 탐미적인 시각으로 전환하겠다는 의지의 표출인지 모른다. 실제로 중간색조로 일별할 수 있는 색채이미지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게다가 탐미적인 즐거움까지 제공한다. 그가 혼합해낸 색채이미지는 대체로 한색 계열의 색상이기 때문일까. 아니, 냉철한 이성적인 접근 유도하려는 것인지 차갑다는 인상이다. 그럼에도 화면을 지배하는 중간색조는 고상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지닌다. 이는 풍부한 미적 감수성의 소산일 수밖에 없다.

색채이미지야말로 그 자신의 잠재적인 미적 감각을 노출시키는 부분인 것이다. 이렇듯이 색채가 장악한 새로운 형태의 작업을 보면서 색채를 거의 의식하지 않았던 이전의 작업이 왠지 생경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색채의 시각적인 호소력은 이처럼 강렬하다. 색채는 그에게 새로운 길을 인도한다. 이전의 냉철한 이성적인 시각에서 한 걸음 벗어나 흔쾌한 감성의 바다를 유영하겠다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화려한 발색을 통한 자극을 지양, 순화된 의식의 단면을 보여주고자 한다.

 

 

고상하고 우아하면서도 그윽한 느낌의 중간색조는 그의 작업에서 신비적인 요소를 강화하는 데 기능한다. 유기체와 같은 추상적인 이미지를 떠받치는 생명의 기운을 화면 전체로 확산시키는데 긴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어떤 신비적인 요소를 화면에 침투시킴으로써 감성적인 접근을 쉽게 허용한다. 다시 말해 신비적인 이미지와 더불어 풍부한 시각적인 이미지로 작용하는 것이다. 풍부한 시각적인 이미지는 일상적인 풍경과는 다른 세계, 즉 심층적인 의식 및 감정의 세계에 이르는 촉매작용을 한다.

그가 혼합해낸 색채이미지는 이렇듯이 시각적인 즐거움을 수반하면서도 의식의 심층에 이르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색채를 도입함으로써 그는 이전과 확연히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물론 선의 탈태라는 방법을 통해 기존의 작업과의 연관성을 확보함과 동시에 새로운 조형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확실한 근거를 만든 셈이다. 선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의 상기는 일테면 기운생동이라는 동양적인 회화사상을 작업의 근간으로 삼겠다는 확실한 의지의 표명이다.


<"하명복의 잔상"전은 경기도 광주시 영은미술관에서 7월18일부터 8월2일까지 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