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 현장

현대미술 현장(1) - 박희숙

펜보이 2009. 4. 22. 11:06

 

 

박희숙의 작품세계


미려한 색채의 순수 혹은 우아한 곡선의 환상


신항섭(미술평론가)


현대미술은 인간의 지적능력, 또는 조형적인 상상력을 시험하듯 새로운 재료 및 새로운 표현방법에 대한 욕구를 주체하지 못한다. 그러기에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부단히 새로운 조형세계를 탐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현대미술은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하고 놀라운 방법을 강구하면서 진화를 거듭해왔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조형적인 상상의 공간은 점차 협소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 순간 누군가는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현대미술 그 또 다른 가능성을 탐색한다.

박희숙은 아크릴 물감을 이용해 인간의 정신세계가 어떻게 물질화할 수 있는가를 탐구해왔다. 흰색 아크릴 물감을 캔버스에 얇게 바르기를 수십 차례에서 백여 차례 반복한다. 마치 정결한 의식처럼 진지하고 엄숙하게 몰입하여 물감을 바르는 행위를 계속한다. 이 과정에서 반복되는 횟수에 따라 점차 물감의 두께와 부피가 커진다. 더불어 보이지 않는 물감의 층이 형성된다. 그러나 그 물감의 층은 행위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단지 점점 더 두터워짐에 따라 반투명한 상태인 물감의 질량이 축적될 뿐이다.

 

 

이 과정에서 악기의 이미지가 들어오기도 하지만, 반복해서 덧쌓이는 물감에 의해 곧바로 덮인다. 그러나 맑은 아크릴 물감의 투명성은 악기의 존재를 숨길 수 없다. 최종적인 작업이 끝났을 때 물감의 층 안쪽에는 악기의 이미지가 존재하고 캔버스는 마치 투명한 상아빛 젤리와 같은 상태로 변한다. 투명한 상아빛 젤리 같은 아크릴 물감의 두께는 무엇인가. 아크릴 물감을 덧칠해 상당한 두께를 남기는 이런 식의 표현방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크릴 물감이 새로운 형태의 질량화하는 이런 표현방법은 순수성에의 회복을 갈망하는 상징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공업적인 재료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반복되는 칠하기 과정을 거치면서 아크릴 물감은 원래의 물성과 다른 상태로 변하게 된다. 한 겹 한 겹 아주 얇은 물감의 막이 형성될 때 아크릴 물감은 공기와 접촉하고, 신체적인 힘에 반응하면서, 마치 의식과 같은 집중된 정신의 개입을 허용하게 된다. 따라서 이 과정을 통해 아크릴 물감 원래의 재료적인 본성을 잃고 불현듯 조형언어로서의 가치를 획득한다. 아무런 이미지도 만들어내지 않으면서 새로운 형태의 물질로서의 조형언어가 되는 것이다. 조형언어로서의 물질은 투명한 막이 겹쳐지면서 마침내 정신의 물질로 치환한다. 이렇듯이 정신이 물질이 되면서 순수성으로 환원한다는 식의 논리는 현대미학의 방법론에 근거한다.

 

                 

 

비물질인 인간의 정신은 음성언어 및 문자언어 그리고 조형언어를 통해 그 존재를 드러낸다. 인간정신은 신체에 은거하다가 행위를 유발하는 사고에 의해 현현한다.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과 예술은 다름 아닌 정신의 산물임과 동시에 정신에 의해 촉매된 신체적인 행위의 산물이다. 그의 작업은 숭고한 인간 정신이 재료와 만나 어떻게 물질화하고 조형언어로 변환하는가를 실증한다. 따라서 가장 순수한 상태의 인간정신의 현현을 위한 재료로 아크릴 물감을 선택한 것도 이에 연유한다. 여기서 말하는 순수한 상태의 인간정신은 청정한 자연 상태를 말한다.

또한 악기의 형태를 도입하여 인간의 신체적인 행위에 의해 만들어지는 순수한 소리를 상징적인 이미지로 내세운다. 악기는 조형적인 소재 역할을 충실히 수행,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제공한다. 악기의 소리 또한 인간의 지적사고의 산물임과 동시에 순수성의 상징적인 언어로 자리한다. 비록 소리는 눈에 보이지 않을지언정 경험과 기억에 의해 소리를 연상할 수 있다. 여기에서 악기는 단지 시각적인 이미지로 머물지 않고 순수성에 대한 상징적인 기호가 되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일관성 있게 강조되는 순수성이란 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이든지 최초의 상태로의 환원을 의미한다. 최초의 상태란 자연을 뜻한다. 생명의 잉태 및 발아, 물, 불, 바람, 각종 자연의 소리, 그리고 햇빛 달빛 별빛 따위를 말한다. 그의 작업은 다름 아닌 순수성에의 환원 또는 회복을 전제로 한다. 현대문명에 의해 오염된 인간 정신을 순수한 상태로 되돌려 놓는다는 분명한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표현방법은 순수한 것에로 집중된다. 

그림그리기나 형태 만들기 즉, 다양한 형태의 예술표현은 시각적인 아름다움 또는 표현방법의 새로움에만 매달렸다. 정서적인 효과를 기대하는 측면도 있지만 창의적인 발상에 따른 다양한 조형세계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중시한 것이다. 그는 이와 같은 현대미술 표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순수한 정신의 현현을 지표로 삼는다. 시지각을 매개로 하는 미술은 맑은 정신에 감화됨으로써 투명한 순수성으로 환원한다. 다시 말해 미술표현이란 자연처럼 오염되지 않은 정신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것이어야 한다.

 

 

인간 정신은 지식의 축적과 비례하여 점점 혼탁해져 예술을 치유의 방법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의 예술적인 관점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악기를 시각적인 이미지로 채용한 일련의 작업은 모두 정신의 투명성, 즉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인간의 영혼에 대한 갈망의 표출이다.

최근의 작업은 색채이미지를 채용하여 보다 선명한 정신의 물질화, 그 전개과정을 보여준다. 흰색, 빨간색, 검은색, 골드브라운색을 채택하여 각각의 색채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이들 색채는 캔버스 위에 반복적으로 칠해진다. 의도하는 일정한 두께로 칠한 다음 주름을 만들어 캔버스 위에 부착시키는 것으로 작업은 끝난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이전의 아크릴 물감을 이용한 작업과 마찬가지로 색채는 정신의 순수성으로 환원한다.

 

 

여기에서 각기 다른 색깔은 저마다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하얀색은 순수, 검은색은 상처, 빨간색은 환희, 골드브라운색은 헌정을 상징한다. 이 네 가지 색채는 그 자신의 종교적인 상징성 및 신앙생활과 연관성을 가진다. 일단 모두가 단색의 순도를 높이는 방법, 즉 수십 차례 반복되는 채색기법으로 정신적인 순수성 또는 순결성에 도달한다. 그런 다음 자연스럽게 주름을 만들어 역시 동일한 방법으로 채색된 동일색 캔버스 위에 씌운다. 이런 방법에 의해 단색의 캔버스는 돌연 입체적인 공간으로 편입된다. 덧칠을 계속하는 동안 정신성의 개입과 함께 물질적인 속성을 지닌 단색의 캔버스는 가장 순수한 상태로 돌입한다. 인간의 숭고한 예술정신이 정제해낸 단색의 순결성은 경배하는 신의 영역으로 편입되기를 바라는 갈망 및 구원의 메시지가 된다.

하얀색은 순수한 상태로의 회귀를, 검정색은 상처의 치유를, 빨강색은 뜨거운 감사의 마음을, 그리고 골드브라운색은 경배하는 신에의 헌정을 의미한다. 이들 네 가지 단색은 저마다 독립된 의미체계를 견지하면서 크기를 달리한다든가, 주름의 구조 변화를 통해 다양한 이미지의 작품으로 제시된다. 단지 단색의 순수한 주름진 이미지로만 제시되는가 하면, 악기 이미지와 결합하는 작품이 있기도 하고, 바탕의 캔버스와 주름진 캔버스의 색채가 다른 경우도 있다.

 

                        

 

이들 작업에서 캔버스 위에 덧씌워지는 형태의 주름진 캔버스는 주름에 의한 선과 볼륨, 즉 입체적인 공간을 만들어낸다. 캔버스는 패브릭, 즉 천으로서의 존재성을 관철하려는 의지의 산물이다. 천의 속성은 그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다양한 형태로 변주를 가능케 한다. 더구나 입체적인 공간을 점유함으로써 캔버스가 아닌, 물질로 탈바꿈하는 조형의 마술을 보여준다. 순수한 상태로 환원된 단색조의 패브릭이 얼마나 매력적인 조형의 패션으로 변환하는지 그저 놀랍기만 하다.                  

이런 형태의 작업은 패션과의 연관성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킨다. 실제로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그의 경력을 알게 되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주름진 캔버스는 패션의 직접적인 도입이 아니라, 패션의 개념화로 해석될 수 있다. 자연스럽게 주름진 억센 단색조의 캔버스 천이 형용하는 부드럽고 우아한 곡면과 선은 여성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환상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더구나 빛을 발하는 순색의 색채이미지에서 오는 순정함은 회화적인 이상과 일치한다. 시지각을 통한 정신 및 감정의 정화작용을 유도하는 까닭이다. 묘사하거나 표현하지 않고 단지 단색의 주름진 캔버스의 이미지만으로 이처럼 감정을 순화시키고 정신을 맑게 비워낸다는 것은 오직 조형의 경이로움일 뿐이다.

 

 

이들 단색조의 주름진 캔버스는 새로운 형태의 물성으로 변환하고 있다. 형태묘사 또는 다양한 이미지의 표현을 받아들이는 수용의 장소가 아니라, 스스로의 존재를 과시하는 발광체가 된다. 거기에는 생명의 환희가 깃들인다. 순수한 상태로의 자연성에 부합하는 생명의 광채가 생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름진 캔버스는 이미 캔버스로서의 효용성을 벗어나 독립적이고 창의적인 예술적 가치로 변환한다. 이런 형태의 순정한 아름다움과 마주하면 완벽한 미인과 마주하는 순간에 느끼는 황홀함 또는 감미로움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주름진 단색조의 캔버스 작업은 그 진지함과 엄숙성, 그리고 정신의 집중으로 종교적인 의식과 동일한 선상에 놓인다. 장인적인 몰입과 함께 순수성에 대한 열망의 농도가 짙어지면 티 없이 맑은 순결한 의식 및 감정을 소진하면서 마침내 영롱한 색채의 순수성만을 남긴다. 자연 상태로의 순수성으로의 환원인 것이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어쩌면 그의 작업은 간곡한 열망에 의해 도달할 수 있는 숭고한 예술정신을 통해 진정 신의 영역으로 편입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과정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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