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 현장

현대미술 현장 (4) - 박영학

펜보이 2009. 6. 28. 21:29

 

 

 

박영학 작품세계


정화기능을 가진 새로운 개념의 산수화


신항섭(미술평론가)


회화에서 재료는 조형적인 사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바꾸어 말해 화가는 사용하는 재료의 특성에 맞는 조형언어 및 어법을 모색하게 된다. 그러기에 아무리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할지라도 그 아이디어에 호응하는 재료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수묵재료인 문인화를 유채로 그려서는 문인화 본래의 맛과 멋을 나타낼 수 없는 이치와 같다. 따라서 최근의 젊은 작가들은 새로운 조형적인 모색과 더불어 그에 따른 새로운 재료를 찾는데 적극적이다.

박영학도 그런 작가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한국화를 전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수묵이나 채색재료를 멀리한 채 목탄이라는 소묘 재료를 사용하여 산수화를 그리고 있다. 수묵이 아니니 산수화라는 명칭이 합당한가라는 문제는 차치하고, 목탄으로 자연풍경을 그리겠다는 발상 자체가 놀랍다. 그 이전까지 목탄으로 산수를 그린 작가는 떠오르지 않을 만큼 그 발상의 전환이 신선하다. 물론 그의 그림은 소재만 자연풍경에서 취하고 있을 뿐, 전통적인 산수화의 조형개념을 떠나 있다.

 

 

흑백그림이라는 점에서 보면 영락없는 수묵산수로 착각하기 십상이다. 일체의 유채색을 배제한 채 하얀 장지 위에 단지 검정색의 풍경만이 들어와 있으니, 수묵화 이외의 그림을 떠올리기 쉽지 않다. 누구나 목탄이라는 재료로 그렸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수묵화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무엇보다도 자연풍경인 산수를 제재로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더구나 일반적인 산수화 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까닭이다.

수묵화의 표현양식을 따를지언정 그 재료는 목탄이기에 수묵산수화와는 엄연히 다른 시각적인 특징이 있어야 한다. 실제로 첫 인상에는 수묵산수라고 믿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모필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점에 놀란다. 마치 먹줄을 튕긴 듯싶은 굵다란 선이 논과 밭 또는 길 따위를 나타내는가 하면, 자잘한 단속적인 선들이 모여 숲과 나무를 형용하고 있다. 하지만 거기에 모필의 흔적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목탄으로 직접 그렸다는 사실도 믿기 어렵다. 그 선의 형태는 목탄을 직접 그어서 이루어진 형태 묘사와는 어딘가 다른 점이 많기 때문이다.

  

 

굵은 선의 경우 먹줄을 튕길 때 먹물이 선 주변으로 분산되면서 작은 점들이 만들어지는 형태와 유사하다. 그는 여기에서 방해말이라는 작은 돌가루를 먼저 장지 위에 바른다. 그러고 나서 목탄으로 형태를 그리는데, 이때 목탄으로 선을 그은 뒤 면봉으로 목탄을 장지에 밀착시키는 과정에서 분말이 생기고, 그 분말이 선 주변에 남아 먹줄을 튕겨 만들어진 선과 같은 이미지가 파생하는 것이다. 물론 숲이나 나무를 묘사할 때도 동일한 방식이 적용된다. 그러고 보면 목탄은 수묵과 같이 단지 재료에 그칠 뿐, 선의 형태는 면봉에 의해 주도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현대미술에서 중시하는 방법론의 문제인 셈이다. 단지 점과 선 그리고 면을 만드는 묘사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풍경, 즉 산수를 그리는 과정 및 재료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이다. 새로운 재료 및 방법을 강구함으로써 전통적인 표현과는 다른 새로운 표현, 즉 현대적인 미적 감각에 대응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사용하는 재료가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다. 다시 말해 목탄이라는 재료가 가지고 있는 물성과 더불어 방해말이라는 돌가루의 역할을 주시하는 것이다. 방해말로 장지에 표면처리를 함으로써 거친 돌가루를 가진 素地소지가 만들어지고, 그와 같은 소지는 목탄을 거칠게 분쇄하면서 많은 목탄가루를 남기게 된다. 그러고 나서 면봉으로 목탄이 그어진 부분을 덧칠하듯이 몇 차례 그어주면 방해말이 덮인 장지 위에 목탄이 밀착된다.

 

 

이와 같은 일련의 작업과정은 모필을 사용해 수묵으로 형태를 묘사하는 수묵화와는 엄연히 다른 조형어법이다. 물을 사용하지 않기에 발묵 및 파묵 따위에 의한 수묵화 특유의 이미지를 얻을 수 없다. 대신에 나뭇가지가 탄 숯가루, 즉 목탄 가루에 의한 이미지가 남겨질 따름이다. 물론 면봉으로 문지르는 과정에서 수묵의 발묵과 같은 회색조의 옅은 이미지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수묵화와 같은 농담기법을 의식하지 않은 채 목탄이 가지고 있는 표현력, 그 순수성에 관심을 두는 듯싶다. 그렇다고 해서 농담의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목탄을 여러 차례 겹쳐 그으면 검은 빛깔이 짙어지고 한 두 차례에 그치면 옅어진다. 그에 따라 숲의 이미지에 깊이가 생기는 것이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그의 산수화는 목탄이라는 재료를 이용한 현대미학의 응용인 셈이다. 그래서일까. 그림 자체도 수묵산수화와는 완연히 다른 조형세계를 추구한다. 명료한 흑백의 대비, 그리고 일정한 규율을 가지는 형태의 선이 조합하여 하나의 산수경을 연출하는 것이다. 그 산수경은 왠지 생경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역시 재료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겠지만, 거의 일정한 형태로 굵게 그어지는 선은 수묵화의 선과는 명백한 차이를 드러낸다. 그 선은 하얀 여백과 극적인 대비를 이루면서 논밭, 집, 수로, 길, 저수지, 석축 따위의 인위적으로 형성된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인위적인 이미지는 그 세부적인 설명을 생략한 채 단지 굵직한 선으로만 묘사한다.

  

 

이와 같은 인위적인 풍경, 즉 논밭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숲과 나무가 적은 부분을 차지하면 화면은 비표현적인 여백이 차지하는 부분이 그만큼 커진다. 따라서 이런 구도의 풍경에서 숲이나 나무가 함께 하는 곳은 마치 섬처럼 보인다. 인위적인 풍경을 여백으로 두는 풍경은 확실히 새로운 시각적인 체험을 유도한다. 어떻게 보면 눈이 쌓인 설경을 연상시키는데, 수묵산수화의 설경과는 또 다른 정경이다. 이런 차이는 수묵화의 여백개념과도 다른 새로운 조형적인 해석에 기인한다.

여기에서 묘사된 부분과 여백으로 남겨진 부분의 극적인 대비는 시각적인 긴장감을 조성하면서 사유의 여지를 제공한다. 흑백의 강렬한 대비 및 조화라는 형식논리를 통해 유도되는 사유는 하얗게 비어둔 여백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그 하얀 여백은 비표현적인 부분이긴 하나, 아무 것도 없는 절대적인 공간이 아니라 정신 및 감정이 머물 수 있는 근거지가 된다. 거기에는 절대적인 정적이 존재한다. 무엇이든지 거기에서는 하얗게 표백될 것만 같은 절대적인 정적, 또는 정결의 정서가 자리한다. 우리의 시지각은 그 새하얀 유혹에 쉽사리 나포되고 만다. 아직 경험하지 못한 그 절대적인 여백, 아니 새하얀 색깔의 의미를 깨닫기 전에 시지각은 압도된다. 그리하여 눈부신 그 하얀 여백에 속수무책 감염되는 것이다.

  

 

검은 빛깔의 숲과 나무는 물론이려니와 명료한 선들에 의해 구획되는 새하얀 빛깔은 정신 및 감정을 정화시키는 기능을 한다. 일순간 숨조차 멈추게 만드는 그 눈부신 새하얀 빛깔은 오직 목탄의 검은 빛깔에 의해서만 그 존재성을 드러낼 따름이다. 목탄은 일체의 외적인 물질과의 혼합이 없는 완전한 순결의 검은 빛이다. 그 빛에 극렬히 대응하는 새하얀 빛깔은 확실히 수묵화의 여백과 다른 정서를 내포한다. 오직 목탄의 검은 빛깔에 상응하는 상대적인 빛깔로서의 하얀색 또한 순결의 색깔인 것이다. 목탄의 검은 빛에 의해서만 발현하는 그 새하얀 빛깔은 우리의 시각을 혼란시키고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그런 새로운 경험을 통해 정신 및 감정이 순화되고 정화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 새하얀 빛깔의 정체는 다름 아닌 방해말의 순수색임과 동시에 그에 의해 의도된 정신성이 개재된 인위적인 색깔임을 알 수 있다.

이렇듯이 목탄의 검은 빛깔과 장지 위를 눈처럼 덮은 방해말의 하얀 빛깔이 조합해 만든 산수경이 기존의 수묵화와 다른 정서를 발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산수화의 개념을 뛰어넘는 목탄과 방해말이라는 재료가 가지고 있는 물성을 통해 새로운 산수화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자연풍경과 인위적인 풍경을 대비시키면서 목탄이라는 천연재료가 가지고 있는 검은 빛깔의 순수성이 우리의 내적인 세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를 주시하려는 것인지 모른다.

 

 

목탄의 검은 빛깔은 숯의 기능처럼 공기를 정화시키고 끝내는 우리의 정신 및 감정까지도 맑게 만든다. 어쩌면 컬러의 남용이라고 할 수 있는 현대인의 삶의 정서에서 검은 빛깔은 현란한 색채의 난립에 의한 시각적인 혼란을 수습하는 치유책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그 검은 빛깔 중에서도 다른 물질은 전혀 가미되지 않은 순수한 자연물질로서의 검은 빛깔의 목탄이야말로 치유기능이 가장 강화된 물질일 수 있는지 모른다. 그런 목탄의 검은 빛깔이 지어내는 산수는 정화된 세상을 상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목탄에 의한 그의 산수화는 다양한 묘사력 및 표현력을 지닌 수묵산수화와는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재료 및 표현의 순수성이란 점에서 목탄에 비길만한 재료가 또 있을까싶다. 그렇다. 목탄 산수화는 이 시대에 필요한, 아니 이 시대의 정서 및 미적감각을 선도하는 새로운 제안인 것이다.    그는 이번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문인화 화목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매화를 소재로 하는 그의 새로운 형식의 문인화는 무한한 가능성의 여지를 보여준다. 목탄이라는 재료 및 그에 적합한 표현방법을 통해 전혀 새로운 시각적인 체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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