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길

명작의 길 (28) - 왕티엔량

펜보이 2008. 7. 7. 22:11
 

  

 

왕천량(汪天亮)의 작품세계


중국적인 미적 감수성 및 정신성 발현


신항섭(미술평론가)

 


현대미술은 장르간의 경계가 무의미해지고 있다. 따라서 표현의 자유를 무제한 허용하는 현대미술에서 전통미학을 찾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 되고 있다. 다양한 재료 및 기발한 표현방법을 개발하면서 현대미술은 무한증식 중이기 때문이다. 이런 추세가 언제 멈출지는 아무도 속단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현대미술에서 우려할 만한 일은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외면 또는 무관심이다. 예술창작이 전인미답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라지만 새로움만이 능사는 아니다. 전통미 속에서 발견되는 풍부한 미학적인 성과 및 심미적인 태도는 여전히 유효함에도 이를 간과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왕티엔량은 20세기말로 종식되었다고 생각되는 추상세계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선언하고 있다. 어쩌면 새롭고 다양한 현대미술의 입장에서 볼 때 추상세계에 대한 도전은 시류에 역행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개방 이후 중국미술의 입장에서는 추상미술이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새로운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중국은 추상미술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는 까닭이다. 그러기에 비록 세계미술의 흐름으로 보아서는 진부한 것일 수 있으나, 중국미술로서는 추상미술에 대한 경험은 결코 건너뛸 수 없는 일이다. 비록 많지 않은 숫자나마 추상미술에 대한 호기심을 가진 개별적인 작가들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그 성과는 아직 괄목할 만한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왕천량의 존재는 각별한 것이다. 그의 작업은 추상임에도 불구하고 잠재의식 또는 무의식에 의탁하는 서구의 자동기술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그가 제시하는 추상적인 이미지는 결코 우연의 산물이거나 순간적인 감정의 동요가 이끌어낸 즉흥적인 세계가 아니다. 물론 시각적으로 풍부하고 다양한 이미지 전체가 철저히 통제된 미의식에 이끌린다고 할 수는 없다. 미묘한 색채의 조화와 자유로운 선의 유희는 확실히 미의식의 통제를 벗어난 어떤 경계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묘한 색채와 자유로운 선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적인 질서가 존재한다. 특히 자유로운 선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규칙성과 리듬이 내재한다. 그리하여 자유로운 필치의 남용, 즉 무질서한 자유와는 다른 통일된 감각에 의해 이끌린다. 통일된 감각은 전체적인 균형을 조정하고 조화로운 비례를 의식한다. 따라서 자유롭게 보이는 선이란 체질화된 것일 수 있다는 가정이 가능하다. 이는 그가 그림뿐만 아니라 서예에도 폭넓은 식견과 오랜 경험이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고법에 의해 엄격하게 훈도되는 서예의 필법은 곧 회화의 기반이자 연장인 것이다. 즉, 자유로운 선은 익숙한 서예의 필법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짐작케 한다. 그의 초기 작업 가운데 한자를 이용한 캘리그라피 형식의 작품이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고 보면 그의 추상적인 세계가 서구작가들과 다를 뿐만 아니라, 어디에서 연원하는 것인지 알 수 있다. 한마디로 그의 작품은 중국 추상회화의 전개에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다름 아닌 전통적인 가치의 재발견이다. 이로써 추상이라는 조형개념이 반드시 서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실증하려는 것인지 모른다. 상형문자인 한자 자체가 추상인 것이다. 구체적인 형상을 압축시킨 한자야말로 추상의 근원일 수 있다. 실제로 서구 추상작가 가운데 한자 서체를 변용한 캘리그라피로 명성을 얻은 작가도 있다.

그의 작품에서도 서예의 필획에 근접하는 선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상형문자처럼 강건한 선은 한자의 전서나 예서체를 연상케 한다. 뿐만 아니라 부드럽고 유연하며 속도감을 느낄 수 있는 선은 초서체와 유사하다. 이렇듯이 단순히 미적 감정의 고조에 의해 유도되는 즉흥적인 표현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선인 것이다. 이들 선은 단독으로 때로는 크고 작은 다른 선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의식하면서 전체적인 조화 및 통일을 모색하는 형국이다. 더불어 전통적인 가치로서의 형상, 즉 다양한 형태의 부조나 전돌, 금석문, 청동기물, 칠기 따위의 고대미술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들이 함께 한다. 그러고 보면 그의 작품은 순수추상이 아니다. 이처럼 눈으로 읽히는 어떤 존재물의 형상을 연역할 수 있는 까닭이다. 작품마다 선의 모양이나 흐름이 다양한 표정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한 전통미술에 기반을 둔 상상력에 기인한다.

 

             

 

이처럼 전통문화 즉 전통미술은 그에게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인 셈이다.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미묘하고 조화로운 다양한 색채 역시 오랜 시간의 때가 묻은 전통미술의 색깔에서 자극받았다고 할 수 있다. 퇴색하고 퇴락한 심오한 색채이미지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은 그의 작품에 그대로 반영된다. 특히 모든 유채색을 주저 없이 수용하는 심도 깊은 수묵을 통해 수묵화만이 표현할 수 있는 고차원적인 정신세계의 신비를 실현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 도입되는 검정색 선은 서양현대회화의 캘리그라피와는 완연히 다른 심미적인 접근을 요구한다. 수묵은 서양에서 말하는 단순한 무채색이 아님을 확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수묵은 내의적인 속성을 가진다. 비록 시각적인 이미지는 단순할지언정 정신이 기거하는 정적, 즉 암묵의 세계를 은유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각적인 경계를 뛰어 넘는 정신적인 가치를 내포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바로 이와 같은 수묵의 내의성을 보여준다. 실제로 수묵을 이용한 종이작업에서는 물론이요, 칠예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검정색은 서양의 채색재료로는 표현할 수 없고 또 도달할 수 없는 신비적인 요소를 간직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는 적지 않은 시간 수묵과 채색을 이용한 작업을 통해 추상세계의 본질을 이해하고 이를 중국의 전통적인 가치와 결부시키는 데 집중했다. 그러는 동안 그의 추상작업은 개별적인 조형성에 도달했는데, 유연한 이미지의 추상, 또는 유기적인 이미지의 추상이라는 개별적인 조형공간은 이로부터 비롯된다. 확실히 그의 추상작업은 서구작가들과는 시각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다른 점이 적지 않다. 역시 중국의 전통미술과의 연관성을 배제할 수 없는 성과인 까닭이다.

최근 그의 작품세계는 종이와 수묵 및 채색재료에서 옻칠을 재료로 하는 칠예의 세계로 들어서고 있다. 칠예 역시 중국전통미술의 하나로서 이미 수 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는 옻칠이라는 새로운 재료가 지닌 다채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주시하게 되었다. 이미 대학교육을 통해 전통공예를 습득한 그로서는 옻칠이라는 재료가 생소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공예재료로 인식되어온 옻칠을 순수회화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는 과제는 매우 흥미롭고도 흥분할만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중국의 전통미술을 현대회화 속으로 편입시키는 일이야말로 그에게 부여된 새로운 과제라고 판단한 것이리라.

 

                        

 

한마디로 반영구적인 재료인 옻칠이 전통적인 수공예의 입장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현대회화의 영역으로 들어서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의 칠예회화는 기법적으로나 재료사용에 따른 모든 기술적인 문제를 완전히 극복했음을 보여준다. 더불어 여전히 그 전모가 밝혀지지 않았음을 확신이라도 하듯, 새삼 현대회화의 무궁한 가능성이라는 문제를 부각시키고 있다. 옻칠이라는 재료와 더불어 사용되는 채색재료는 한마디로 눈부신 광채를 발한다. 서구재료로서는 결코 흉낼 수 없는 새로운 색채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이는 옻칠이라는 재료와 거기에 응답하는 채색물감 그리고 빛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합성하여 그야말로 천상의 색채와 같은 신비를 불러들이고 있다.

 

 

다채롭고 심오한 그의 추상세계는 칠예를 통해 새로운 조형세계를 전개하게 되었다. 대형화면으로 이식되는 수묵채색의 추상적인 감각은 화려하고 장려한 모습으로 재탄생한다. 기술적인 난이도를 극복한 그의 조형감각은 자유자재이다. 화면을 곡면으로 처리하여 입체적인 공감감을 부여하는 것도 칠예의 진면목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입체적인 기물을 장식하던 칠예의 본래적인 모양을 연상시키는 것은 그 표현방식의 다양성을 실증하려는 것인지 모른다.

칠예 작업은 공예적인 완성도를 무시할 수 없다. 기술적인 난이도를 높임으로써 표현의 정확성 및 정밀성을 기대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칠예만의 정미한 예술적인 세련미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 은폐되거나 은닉된 색채의 미묘한 뉘앙스는 모두가 끝 모르는 심연과 같은 검정색에서 나온다. 더구나 마치 광물질의 결정처럼 견고한 질료 속에 숨겨진 화려한 색채가 빛과 만나 눈부신 광채를 뿜어낼 때 그로부터 음미하는 심미의 쾌감은 현대추상회화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또 다른 미적 가치임을 수긍케 한다.

 

                

 

장인적인 노력과 창의적인 감각, 그리고 창작의 열정은 그 자신을 칠예라는 새로운 장르를 통해 한 차원 높은 세계로 올려놓고 있다. 그것은 추상회화가 쌓은 미학적인 성과 위에 새로운 예술적인 가치 하나를 얹어놓는 일이다. 그렇다. 그는 타고난 개인적인 감각과 중국인의 피 속에 면면히 흐르는 장인적인 전통을 계승하고 거기에 창의성의 불을 붙임으로써 전통미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통공예라는 한정된 세계 속에 갇혀 있던 칠예를 현대미술의 한 복판으로 밀어냄으로써 풍요로운 동양적인 추상미학의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왕티엔량초대전"은 9월10일부터 20일까지 서울 일원동에 있는 밀알미술관(02-3412-0061)에서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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