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혜숙 작품전
변형 왜곡된 간결한 곡선에 의해 재해석된 현실
신항섭(미술평론가)
이 시대의 화가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창작에 따른 고통이 크다. 다양한 현대미술 가운데 무언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조형언어 및 어법을 강구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는 까닭이다. 사실주의에서 추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표현이 공존하는 현실에서, 더구나 수많은 작가들이 활동하는 가운데 독자적인 형식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창의적인 발상을 통해 새로운 조형세계를 전개하는 화가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최혜숙은 수년 이래 독자적인 형식미를 완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는 가운데 마침내 인간 삶 중심의 일상적인 풍경 속에서 새로운 개념의 조형언어를 추출해냄으로써 개별적인 형식미에 한층 가깝게 다가설 수 있게 됐다. 실재하는 대상물을 캔버스에 옮겨오는 과정에서 일테면 조형적인 각색이 이루어지게 된 것인데, 그처럼 각색된 그의 그림은 신선한 인상으로 다가온다. 여기에서 말하는 각색이란 실재하는 물상의 형태를 변형하거나 왜곡하는 방법으로 재해석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실제와는 완연히 다른 조형언어로 뒤바꾸어내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는 확실히 낯선 느낌의 조형세계가 전개된다. 하지만 그 낯선 조형세계는 현실과 유리된 상상이나 망상의 세계는 아니다. 현실에서 취재된 풍경을 기반으로 하여 첨삭을 하고 변형하거나 왜곡하면서 독특한 형식미에 도달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조형과정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그림은 일상적인 풍경에서 느끼는 감회를 상회하는 특이한 정서를 이끌어낸다. 그 정서는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상상 또는 환상을 야기한다. 한마디로 회화적인 세계란 필연적으로 현실을 초월한 이상적인 세계관을 전제로 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의 그림은 우리로 하여금 조형세계의 그 신비로운 연금술을 다시 한 번 실감토록 한다.
그의 그림에서는 바닷가 언덕길이나 도회지 길, 또는 외국여행지의 이국적인 풍경들이 자주 등장한다. 모두 그 자신이 직접 본 현실적인 풍경인 것이다. 하지만 그의 그림 속에 나타나는 풍경들은 아주 간결하게 처리되고 있다. 평면적인 화면 위에 선묘방식의 간결한 풍경, 즉 집 나무 가로등 따위가 보일 따름이다. 이렇듯이 우리들이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을 제재로 한다. 그런데 그의 작품에서는 소재 및 대상의 형태가 흡사 아동화처럼 간명한 선묘로 묘사되고 있다. 배경에 대한 설명을 생략한 채 소재 및 대상의 이미지만을 부각시키고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배경이 존재하지 않는 풍경화인 것이다.
배경이 존재하지 않는 대신 그는 단색조로 통일한다. 회색조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가운데 작품에 따라 유사한 몇 가지 중간색조로 전체적인 분위기를 통합하는 것이다. 한 가지 톤의 중간색조로 화면 전체를 채우고 그 위에 선묘로 형태를 묘사한다. 작품에 따라서는 하늘과 땅 부분을 두 가지 색채로 나누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그의 그림은 배경을 단일의 미묘한 중간색조로 통일함으로써 결코 가볍다는 느낌이 없다. 오히려 너무 진지하고 무겁다고 느낄 정도이다. 이는 바탕을 견고히 하기 위해 10여 차례 가까이 채색을 덧입힌 결과이다. 긁고 칠하고 또 긁고 칠하는 식의 반복적인 작업을 통해 바탕을 견고하게 만드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의 작품이 간결한 선묘작업인데도 시각적인 안정감 및 깊이 또는 심미적인 깊이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바탕처리에 기인한다.
그의 풍경화에서는 사실적인 풍경화와는 다른 풍부한 서정적인 정서가 묻어나는 것도 진지하고 두터운 바탕처리와 무과하지 않다. 서정적인 시를 읽고 있는 듯싶은 미적 감흥을 자극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작품에 따라서는 산문을 읽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경우도 있다. 아주 간결한 문체의 맛깔스러운 산문을 읽으면서 맛보는 짜릿한 지적쾌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감상은 아마도 풍경을 이루는 소재 및 대상의 구성 및 구도 그리고 설명적인 요인을 제거한 배경처리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시적인 함축이 있고, 서정적인 아련함이 있으며, 풍부한 이야기가 있다. 비록 그 전체적인 이미지는 간결할지언정 운문적이면서도 산문적인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이다.
정물화도 풍경화와 다르지 않다. 동일한 형식논리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소재 및 구도 구성에서 선묘화의 성격을 선명히 드러내고 있다. 물론 소재를 자유롭게 변형하거나 왜곡함으로써 시각적인 쾌감이 느껴진다. 정형화된 형태를 벗어난 변형 및 왜곡은 경직된 사고 또는 감정을 해방시키는 기능을 하는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감상자의 입장에서는 요약 함축된 이미지 속에서 실제를 역추적하여 복원해내는 즐거움이 있다. 정물화의 일반적인 소재인 꽃을 소재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형적인 해석을 달리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미적 감정을 유도하는 것이다.
그가 강구해낸 조형언어는 명료하면서도 간결한 선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연필 드로잉의 개념을 적용시킨 자유로운 선의 이미지가 형태를 결정하고 전체적인 이미지를 지배한다. 그러고 보면 최근 작품은 전통적인 문인화에 상응하는 일종의 선묘화처럼 보인다. 그가 강구해낸 명료한 선은 형태의 윤곽을 결정하고 그 전체상을 규정한다. 선이 그림의 전체적인 흐름을 주도하고 또 지배하는 것이다. 이처럼 선이 선명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방식은 드로잉 또는 문인화의 화법을 연상케 한다.
그의 풍경화는 대체로 하늘과 땅으로 구분된다. 명료한 선에 의해 수평적인 선이 그어지고, 그 선을 중심으로 하여 집과 나무 따위가 놓이는 형국의 풍경이 전개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하늘과 땅 그 사이에 존재하는 풍경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풍경화의 대다수는 수평구도의 법칙에 충실하다. 그러다 보니 시각적인 안정감과 평안함이 느껴진다. 차분한 정적인 분위기가 화면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무나 가로등, 집, 벤치 따위의 형태를 결정하는 선은 모두가 구불구불한 곡선을 형성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직선으로 점철하는 도회지의 집들조차 곡선으로 묘사되고 있다. 조금은 유머러스하고 또한 기괴스럽다. 춤을 추듯 또는 연체동물처럼 흐느적이는 듯싶은 선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직선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자연물상이든 인위적인 물상이든 모두가 하나 같이 유연한 곡선으로 이루지고 있다. 그럼에도 어쩐 일인지 친근하고 편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직선과 직각으로 지어지는 집들조차 구불구불하게 곡선으로 처리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처럼 일그러진 형태의 집을 통해 동화 속의 어떤 장면들을 떠올릴 수 있다. 그림을 보면서 잠시 현실을 떠나 동화 속의 주인공이 되는 환상에 사로잡힐 수 있는 것이다. 비현실적인 이미지는 역시 우리의 의식 및 감정을 환상적인 세계로 이끄는 힘을 발휘한다. 현실을 뛰어넘는 우리의 꿈이란 대체로 허황하거나 비현실적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감정의 해방, 즉 카타르시스는 그림이 우리에게 건네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치인 것이다. 이렇듯이 일그러진 곡선에 의해 창조되는 그만의 조형세계는 우리의 미의식 및 미적 감정을 확장시키고 또 자유로운 정신의 유희를 맛보게 한다.
왜곡된 선이 만들어내는 형체는 왠지 친근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직선에 의한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이미지가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다. 일그러지고 비틀리고 금세라도 주저앉는 듯싶은 불안정한 곡선임에도 정겹게 느껴지니 이상한 일이다. 흥겨운 음악에 취해 제멋대로 몸을 비틀어대는 자유로운 춤사위를 연상케 하는 곡선은 동적인 리듬을 탄다. 그 동적인 리듬이 그를 바라보는 우리의 낯선 시각 또는 경계심을 해제시키는 것이 아닐까.
그의 그림은 관념성이 짙다. 다시 말해 지적 조작의 냄새가 강하다. 실제를 과도하게 왜곡시키고 변형시키는 것은 은연 중에 자기만의 조형의지를 관철시키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조형언어 및 어법을 통해 개별적인 세계를 만들겠다는 분명한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가 보여주는 일련의 리드미컬한 곡선들은 군더더기 없이 명확하다. 그처럼 명확한 선으로 형용되는 소재 및 대상은 선명하다. 숨겨지거나 암시되는 의미는 없다. 다만 순수한 시각으로 그의 그림이 조합해낸 비정형의 조형언어에 이끌리는 것으로써 우리의 의식세계는 한층 맑아질 수 있을 것이다.
<최혜숙전은 5월28일부터 6월3일까지 서울 인사동 공화랑(02-735-9938)에서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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