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길

명작의 길(30) - 신명범

펜보이 2008. 11. 4. 18:14

 

 

신명범 작품세계


흙으로 일구어낸 마음속의 무릉도원


신항섭(미술평론가)


흙은 모든 생명체의 텃밭이다. 흙은 생명체의 생장은 물론이요, 소멸을 관장한다. 흙은 생명체가 그 시효를 다하게 되면 무로 환원하여, 또 다른 생명체의 생장을 촉진하는 자양이 된다. 이는 순환의 법칙에 순응하는 흙의 절대적인 가치를 의미한다. 변화무쌍한 대자연의 오묘한 생명의 질서를 선도하는 것이 다름 아닌 흙이다. 그런가 하면 흙은 형상을 만드는 질료가 되어 인간의 예술적인 표현 욕구를 충족시킨다. 다시 말해 예술이라는 숭고한 이념을 실현할 수 있도록 기꺼이 변신한다.

신명범은 흙으로 그림을 그린다. 흙을 퍼다 체로 곱게 쳐서 접착제와 섞어 캔버스에 바른다. 단순히 캔버스를 흙으로 덮는데 그치지 않고 흙 위에 손가락으로 형상을 그려 넣는다. 그러고 나서 흙이 완전히 마른 다음 채색을 덧입힘으로써 작업은 마무리된다. 이와 같은 일련의 작업은 소조작업과 다르지 않다. 형상이 그려진 부분은 대체로 흙이 돌출하여 부조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최종 완성된 그림은 두터운 흙의 질감으로 인해 마치 원시적인 그림을 보는 듯싶다.

 

  

그의 그림은 일단 도구를 거치지 않고 손가락으로 형상을 그린다는 점에서 원초적이다. 더구나 그 재료가 가공되지 않은 순수한 흙이어서 흙으로 형상을 빚은 원시인 또는 고대인의 표현방식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표현방식은 인간의 조형의지 및 표현 감정을 직접적으로 전달한다는 점에서 도구를 이용한 표현방식과는 확연히 다른 대자연의 생동감을 보여 준다. 인위적인 가공물이 아닌 자연물질인 흙과 손가락만으로 형상을 빚는 원시적인 방식은 자연미에 가장 근접하는 조형어법이기에 그렇다.

흙이 빚어내는 생명체들의 빛나는 형상처럼 캔버스 위에 표현되는 형상 또한 빛나는 생명의 율동에 감전될 수 있음을 실증하려는 것인지 모른다. 실제로 반죽된 흙을 캔버스에 부착하면서 형상을 표현하는 행위는 흙의 물성을 침해하지 않는다. 흙이라는 질료가 가지고 있는 성질을 온전히 살리면서 단지 그 자신의 신체적인 힘과 미의식 그리고 미적 감정을 반영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와 같은 표현과정은 자연미를 순수한 상태로 환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생명체의 텃밭으로서의 흙의 본성을 지켜줌으로써 생명의 파동을 작품 속에 구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작업은 조형적인 기교, 즉 완성도 높은 묘사기술을 배제하고 원시적인 형태의 형상을 지향하는데 묘미가 있다. 소재 및 대상이 무엇이든지 세부묘사를 생략한 채 개략적인 형태만을 가져온다. 그러기에 아동화처럼 생략적이고 간결하다. 세부를 묘사하지 않는 대신 형태를 압축하여 도상이나 부호에 근접하는 이미지로 만들어 놓는다. 가령 새를 표현할 경우 형태를 최대한 압축하여 간명한 윤곽선으로 특징적인 이미지만을 드러낸다. 인물에서는 눈코입귀 따위의 세부는 과감히 생략하고 머리와 손발이 강조될 따름이다. 이처럼 최대한 압축된 형상을 조합하여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한다.

인물, 소, 새, 꽃, 나무, 물고기, 집 따위의 소재 및 대상을 최대한 압축하여 간결한 선묘형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늘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땅의 소가 하나의 화면 안에서 공존한다. 물론 이들 소재가 존재하는 상황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없이 비표현적인 공간으로 놓아둘 따름이다. 현실적인 감각으로는 새와 물고기와 소가 하나의 공간에 공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상황설정을 무시한 채 새와 물고기와 소가 함께 존재하는 데도 조형적으로 무리 없고 시각적인 불편함도 느낄 수 없다. 한마디로 공간지각능력이 없는 어린이의 그림과 같은 조형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까닭이다.

 

     

 

더구나 이들 소재의 크기도 현실감각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인물이나 새 또는 꽃나무보다 집이 훨씬 작게 묘사되는 일이 빈번하다. 뿐더러 소재가 존재하는 위치도 현실적인 공간개념과는 사뭇 다르다. 다시 말해 상하전후좌우라는 존재방식이 무시되고 있다. 새 위에 물고기가 있고, 소의 발밑에 집이 자리하는 식으로 비현실적인 설정이다. 이와 같은 물상의 존재방식은 현실적인 지각능력이 부족한 어린이의 조형적인 사고에 근거한다.  

또한 구성 및 구도에서도 현실성에서 벗어나 있다. 위에 열거한 몇 가지 소재의 이미지를 겹치거나 교차시키면서 구성적인 화면을 조성하는 그의 작품은 극히 간결하다. 물론 작품에 따라서는 복잡해 보이는 구성도 있으나, 대체로 소수의 소재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구성의 변화에 따라 전체적인 이미지가 달라질 뿐 그림의 내용은 유사하다. 즉 어떤 하나의 통일된 조형개념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어린이의 시각으로 세상을 본다는 입장에서 비롯되는데, 경험이 적은 어린이로서는 소재나 내용을 다양하게 꾸밀 수 없다.

 

 

그의 조형개념은 이처럼 어린이의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시각은 차별과 갈등이 없는 유년기의 순수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태도와 무관하지 않은지 모른다. 그러기에 작품의 대다수는 소재가 서로 독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겹치거나 교차하는 방식으로 연결된다. 물론 선으로만 묘사되기에 소재가 겹쳐질지라도 모든 소재의 형태는 투명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한데 엉키면서 지어내는 아름다운 조화는 세상을 투명한 눈으로 바라보는 어린이의 미적 감수성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형태를 만드는 윤곽선은 투박하고 둔탁하며 거칠다. 붓이나 연필 따위의 도구 대신에 손가락으로 형상을 표현하기에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끝에 의해 표현되는 이미지는 붓이나 연필이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지극히 감성적이다. 미세한 생명의 파장, 즉 감정의 흐름과 더불어 손가락을 사역하는 정신까지도 여과 없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생명체의 생장을 주재하는 물질로서의 흙이 지닌 유기적인 속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는 다른 재료가 흉낼 수 없는 흙의 자연성이야말로 표현적인 가치의 하나인 셈이다.

 

 

흙과 그의 예술적인 감각이 만들어내는 선은 비록 둔탁하게 보일지라도 그 어떤 물감을 사용한 그림보다도 섬세한 신체적인 호흡을 담고 있다. 자연의 흙이 그렇듯이 생명의 파장이 그대로 전달되고 있다. 그 자신의 신체적인 힘과 혈관과 신경을 통해 전달되는 미세한 생명의 율동이 선의 흐름에 관여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손가락에 의해 만들어지는 선은 그 어떤 도구에 의해 만들어지는 선보다도 자연스럽고 순수하다. 실제로 흙이라는 자연의 근본을 직접적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가 형상을 돋보이게 하는 채색작업 또한 자연미에 가깝다. 원색적인 화려함을 지양하여 중간색조로 통일하는 색채이미지는 부드럽고 따스하며 아늑한 기분을 자아낸다. 고향의 정서, 또는 모성에 대한 그리움과 같은 미묘한 감정을 유발한다. 흙이 물감을 흡수하여 색가를 낮추고 발색을 억제하는 시각적인 효과 때문이다. 흙의 질감을 해치지 않는 차분한 색채이미지는 자연미에 합당한 것이다.   

 

         

 

그의 그림을 보면서 대자연을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따라서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싶은 기쁨과 안도감을 느끼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흙이라는 재료가 지니고 있는 친화력과 흡인력 때문이다.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원시인의 순수성 및 소박함을 지닌 조형언어 및 조형어법 또한 자연미에 가까운 것이다. 어느 면에서 그의 그림이야말로 분주한 일상에서 지친 현대인에게는 산소가 될 수도 있는지 모른다. 그의 작품에는 그런 정신 및 감정의 휴지부가 존재한다.

한편 그의 작품에서는 목가적이면서도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그림의 내적 정서인 서정성은 사람과 동물과 식물이 차별 없이 한데 어우러지는 독특한 구성에서 비롯된다. 무엇보다도 단출한 형태 및 구성이 시적인 함축과 긴장 그리고 여운을 유도한다. 하나의 그림으로 이해되기 전에 시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의 그림에는 함축과 절제를 바탕으로 한 아름다운 시상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소재들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문학적인 이미지에는 한 편의 동시나 동화가 담겨 있다. 즉 이야기 그림으로서의 요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는 원죄가 없다. 그만큼 순수하고 아름답다. 어쩌면 그의 그림은 현대인이 갈구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무릉도원인지 모른다. 마음이 편히 쉴 수 있는 곳, 그리고 천진무구한 어린 시절의 꿈을 되살릴 수 있는 곳,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향에 대한 그리움을 일깨워주는 곳으로서의 낙원을 꿈꾸게 하려는 것인지 모른다.


<신명범초대전은 11월11일부터 25일까지 부산 루소화랑(051-747-5511)에서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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