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길

명작의 길 (29) - 왕치펑 (王奇峰)

펜보이 2008. 10. 3. 22:27

 

 

왕치펑 작품전

 

시공을 초월하여 환생하는 당대의 미인상

 

신항섭(미술평론가)

 

당나라는 중국 역사상 문화적으로 가장 융성한 시대였다. 실크로드를 통한 서구문물의 이입과 더불어 안정된 정치체제 및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선비가 사회중심축을 이루는 유교적인 분위기는 문화예술의 비옥한 토양이 되었다. 안정된 생활을 하며 사회적인 존경의 대상이 되는 예술가들에게는 그야말로 황금기였다. 역사에 관심이 있는 오늘의 예술가들이 당나라 시대를 그리워하는 것은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왕치펑은 1천년이 넘는 세월을 훌쩍 건너뛰어 화려한 당대의 예술과 접신을 모색하고 있다. 당대의 시와 그림을 통해 자극된 고조된 미적 감정은 그의 작품세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정신적인 유대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당대 예술과의 접신은 그의 작품세계를 한 차원 상승시키는 계기가 되고 있다. 시를 짓고 음악을 들으며 그림을 그리는 그의 모습은 어쩌면 당대의 문인 및 화가들의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실제로 그는 당시를 읽고 당악을 들으며 그림을 감상하면서 그 시대의 예술가들과 정신적인 유대를 실현하고 있는지 모른다.

 

 

당대의 문화예술은 오랜 시공을 초월하여 그에게 창작의 영감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라는 시공간 속에 살면서 왜 고대의 문화예술을 흠모하는 것일까. 어쩌면 당대의 예술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고한 인간정신의 산물이라는 생각인지 모른다. 아름답고 순수한 인간의 감정 및 정신을 고양시킴으로써 인간 삶을 예찬하게 만들었던 당대의 예술을 그리워하는 심사는 순수미를 추구하는 그에게는 금과옥조가 아닐까. 그렇다. 예술이 만개한 시기였던 당대와의 정신적인 연대감은 그 자신에게 풍요로운 예술의 꽃을 피울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그는 최근 수년 간 아름다운 여인을 대상으로 한 일련의 미인도에 심취하고 있다. 고전적인 자태의 중국 미인들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시공을 초월하여 현대로 환생한 당대의 여인인지 모른다. 의상이나 자태로 보아 서구적인 패션으로 치장한 현대의 여성상은 분명 아니기에 그렇다. 의상 및 자태는 시간의 흐름이 정지한 듯싶은 과거의 어느 공간을 연상시킨다. 우리가 경험한 일이 없는 당대의 어느 시간 및 공간을 상상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공을 건너 뛰어 당대의 문화예술에 심취한 그의 조형적인 상상력이 복원해낸 당대 여인들의 삶의 정경일 수 있는 것이다.

 

초상화 형식의 여인상은 단수로 또는 복수로 묘사된다. 그러나 여인의 모습은 경직된 표정 및 자태가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상 속의 한 장면을 보여준다. 단정하고 우아한 의상과 머리 모양, 마치 화초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유연한 자태, 마치 꿈꾸는 표정, 그리고 바람조차 발꿈치를 들고 사뿐히 지나가는 듯싶은 정적인 분위기로 묘사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비파를 연주하는가 하면, 꽃나무 가지를 올려다본다든가, 연꽃이 핀 연못을 거니는 모습과 나비가 여인을 희롱하는 따위의 아름다운 정경이 환상처럼 펼쳐진다.

이러한 모습의 당대 여인의 삶의 정서는 지극히 서정적이다. 아름다운 한 편의 서정시를 읽고 있는 듯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먼 국경에서 나라를 지키거나 또는 먼 지방 관리로 떠난 임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여인의 심사가 손에 잡힐 듯이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홀로 있는 여인의 모습에는 꿈과 사랑과 그리움이 깃들이고 있다. 그는 단순히 아름다운 외모만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 여인들의 잔잔한 일상 속에 담긴 희로애락의 감정을 포착하고 있다. 그의 미적 감수성은 여리고도 섬세한 여인들의 내면을 절묘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정경은 비현실처럼 다가온다. 현실적인 상황이 아닌, 고대의 어느 시공간을 재현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비현실적인 이미지는 아마도 형태를 애매하게 처리하는 독특한 묘사기법에서 비롯되는 것이리라. 어느 작품이나 마치 한 겹 베일에 가려진 듯, 또는 안개가 감싸고 있듯이 모호한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다. 세부적인 묘사를 지양함으로써 현실감이 둔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방법은 시각적인 이미지보다는 그 정서를 중시하는데 기인한다. 눈으로 이해되기보다는 감성적으로 접근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여성이다. 실재하는 모델이 존재하지 않고 오직 그 자신의 상상이 조합해낸 얼굴이다. 얼굴뿐만 아니라, 의상에서도 타고난 조형적인 상상력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전통적인 당대의 복식에 근거하면서도 실제로는 본 일이 없기에 상상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상상이 조합해낸 복식은 시공을 뛰어넘는 아름다움으로 환상적인 공간으로 끌어들인다.

 

 

이렇듯이 아름다운 인물을 창조하는 것은 풍부한 미적 감수성에 의해 일깨워지는 아주 특별한 재능의 하나이다. 작품마다 다른 형태의 얼굴이면서도 모두가 전형적인 미인상에 부합한다. 이렇듯이 아름다운 이미지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은 타고난 미적 감각이 아니고서는 안 될 일이다. 다시 말해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순수한 아름다움에 대한 이해 및 감각은 모든 화가에게 공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그의 경우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이 맑은 화가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감각일 따름이다.

그림은 화가 자신의 인격을 반영한다. 너그러우면서도 따스하며 고매한 그의 성품이 아름다운 그림으로 형상화된다고 할 수 있다. 시를 짓고 음악을 들으며 고미술을 애호하는 그의 탐미적인 태도야말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심미적인 세계를 위한 자양인 것이다. 기존의 예술가들이 성취한 미적 가치는 오늘의 그에게로 전이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일상적인 생활태도 및 사고방식은 창작에 반영되기 십상이다.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 자체는 어느 면에서는 일상과 별반 다른 세계가 아닌 까닭이다.

 

 

그의 작품은 일반적인 초상화 형식의 미인도와는 차원이 다른 세계이다. 이상화된 세계, 즉 천년도 훨씬 넘는 시간을 초월하여 당대의 어느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정경을 그는 풍부한 상상력으로 복원해내고 있는 것이다. 외부와 절연된 폐쇄된 공간 속에서 고요한 일상을 누리는 사대부 규수들의 일상은 신비의 대상일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을 보면서 외부와 절연된 금남의 공간을 훔쳐보는 듯싶은 미묘한 쾌감마저 느낀다. 베일에 가려진 정경은 신비감을 증폭시키기 마련이다. 형태를 선명히 부각시키지 않고 모호하게 처리하는 것은 신비감을 주면서 동시에 현실감을 차단하기 위한 조형적인 장치일 수 있다.

그의 작품에서는 미묘한 향기가 풍긴다. 그것은 아름다운 여인에게서 풍기는 어떤 달콤한 꽃냄새나 싱그러운 풀냄새 또는 매혹적인 지분냄새와 같은 것이다. 도무지 흠 잡을 데 없이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서 향기를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름다운 여인을 누구에게나 꿈의 존재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미인을 그리는 것도 향기를 느낄 수 있는 환상적인 이미지를 통해 우리들의 꿈을 확장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가 창조해낸 혹은 복원해낸 당대의 미인상은 현실감은 떨어진다. 고대의 의상이나 소품 때문만은 아니다. 그 여인들은 오늘의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힘들 만큼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이다. 작품에 따라서는 인간의 모습이 아닌 꽃이나 이슬의 정령처럼 착각할 정도로 순수하고 아름답고 환상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실제보다 아름답다는 것은 이상적인 세계이다. 그는 누구나 동경하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미인의 모습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미인의 모습을 통해 여성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현대미술이 간과하고 있는 순수미를 보다 적극적으로 보여준다.

시대를 초월한 이상적인 미인상으로 구체화되는 그의 미적 감각은 우리 시대에서는 흔치 않다. 초상화 형식에 갇히지 않고 여인들의 일상적인 삶의 정경을 선경仙境처럼 표현하는 그의 미인도는 새삼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일깨워준다. 현대인이 아닌 천년도 훨씬 넘는 당대의 여인들이라는 설정은 시공을 초월한 심미의 세계로 안내하기 위한 조형적인 전략이다.

 

 

그는 정말 탁월한 미적 감수성의 소유자이다. 어쩌면 그의 작품은 이 시대의 중국의 인물화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 정체를 되돌아보게 하는 하나의 지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사실적인 묘사임에도 불구하고 서구적인 사실주의 미학에 머물지 않고 중국적인 감각으로 치장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중국의 문화예술적인 전통 속에서 새로운 미적 가치를 찾아내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왕치펑초대전"은 2008년 10월31일부터 11월20일까지 상해 '무린木林화랑'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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