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평

미술시평 (35) - 권태로운 신사실주의 화풍

펜보이 2008. 5. 30. 22:22
 

미술평단 - 제언


권태로운 신사실주의 화풍


신항섭 (미술평론가)


최근 2-3년간 한국미술시장은 오랜만에 상승기조를 타고 있었다. 옥션을 중심으로 하여 미술경기가 상승기로 접어드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옥션에서 45억원이라는 최고가를 기록한 박수근의 작품에 대한 진위논쟁과 더불어 단기급상승에 따른 불안이 결국 급락으로 이어지면서 상승세가 꺾였다. 그럼에도 미술시장을 낙관적으로 보는 견해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비록 옥션에 일시적으로 투기자본이 몰려들어 미술경기 상승을 주도했고 또 경매가의 급락으로 이어지면서 하락세로 돌아섰다지만, 전체적인 흐름으로 보아 크게 우려할 만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옥션의 급상승에 따른 급락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고, 미술시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사실주의 화풍의 일부 인기 작가들은 여전히 매물부족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최근 미술시장이 활성화되고 있는 상황 그 중심에는 신사실주의 회화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과 직면한다.

신사실주의(합의된 용어는 아니지만) 회화의 등장에 대해 대다수의 미술관계자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일부에서는 시계가 거꾸로 가는 현상이라고도 말한다. 다시 말해 과거로 회귀하자는 것이냐면서 실소를 금치 못한다. 다양한 매체 및 각종 미디어가 주종을 이루는 현대미술공간에서 느닷없이 웬 사실주의냐는 것이다. 이런 반응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사실주의 미술양식은 전시대 미술의 무덤인 미술관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곰팡내를 풍기고 있는 까닭이다. 

이런 시각으로 인해 20세기 후반 세계미술의 흐름은 손의 기능, 즉 숙련된 사실적인 묘사력에 대해서는 전혀 시선을 주지 않았다. 사실주의는 과거의 미술양식이기 때문에 구습일 뿐이며, 더구나 현실의 재현이란 진부한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단지 기교적일 뿐인 사실주의 회화가 여전히 미술계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현대인의 미적인 욕구를 충족시킬만한 요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이었다. 그런데 4-5 년 전부터 극사실적인 묘사력에 의탁하는 새로운 형태의 사실주의 회화가 간간히 눈에 띄더니, 마침내 미술시장의 전면으로 부각되는 상황이 되었다. 최근 미술전시회에서 신사실주의 회화는 양적인 면에서 한국미술시장의 신주류를 이루고 있을 정도다. 추상미술이나 미디어 등의 현대미술이 제자리걸음을 하는 사이에 그 틈을 비집고 들어선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오늘 한국미술시장에서 각광받고 있는 사실주의 회화 대다수는 전통적인 아카데미즘과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아카데미화풍은 이른 바 스푸마토 기법에 의한 딱딱한 명암기법에 의존하는데 반해, 최근의 사실주의는 여기에서 탈피하여 시지각에 솔직한 부드러운 명암기법을 구사한다. 그러고 보면 현대라는 시제에 충실한, 보다 현실적인 감각에 따른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물감의 두께는 얇고 전통적인 사실주의보다 한층 강화된 묘사력, 즉 극사실적인 묘사력을 지향한다. 어느 면에서는 사진과 혼동하기 쉬울 정도로 극미한 묘사력에 치중한다.

색채이미지 또한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다. 교육적인 습관에 의한 관념의 색채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 눈이 보고 있는 현실의 색에 가장 가깝게 접근한다. 회화적인 혹은 전통적인 색채해석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일까. 확실히 19세기 후반에 출현한 사실주의 양식과는 완연히 다른 양상이다. 무엇보다도 장식성이 강화되었다. 그리고 묘사력에서는 사진에 한층 가까이 접근하고 있다. 더불어 색채이미지는 밝고 부드러우며 명랑하다. 이러한 특징은 컬러시대라는 현대의 생활공간 놓였을 때 결코 촌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구시대의 사실주의와는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왜 이와 같은 신사실주의가 현대의 미술애호가들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느냐다. 이와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사진작업의 등장과 때를 같이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진이 회화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시점에서 신사실주의 경향의 작업도 한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는 우연의 일치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진에 대한 일부의 부정적인 인식, 즉 사진은 순수예술이 아니라는 극단적인 시각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어느 날 갑자기 사진이 현대미술의 중심으로 부각되기에 이른 것이다. 한동안 이런 상황변화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으나, 사진작업에 대한 미술시장의 긍정적인 반응은 그 동안의 불신과 의혹을 급속히 해소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사진도 예술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결과적으로 현대미술계에서 유행을 만드는 것은 미술시장의 논리인 것이다.

사진에 대한 불신과 의혹이 사라진 상태에서 신사실주의 그림들을 바라보았을 때, 비로소 과거의 사실주의 양식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동시에 사진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경쾌한 정밀묘사의 신사실주의 회화에 오히려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는지 모른다. 사진에 대한 거부감이 해소가 되었듯이 사진을 이용하는 신사실주의 회화에 대한 일말의 의혹도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제 오늘의 미술시장을 주도하는 신사고의 콜렉터들에게는 금기란 존재하지 않는지 모른다.            

신사실주의 회화는 사진작업을 이용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정확한 눈과 그를 뒷받침하는 섬세한 묘사력과 시각적인 즐거움을 제공하는 밝은 색채감각만 있으면 큰 문제가 없다. 그러기에 소재만 잘 찾아내면 신사실주의 회화의 유행에 쉽사리 편승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차피 새로운 사조는 시대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거기에 많은 작가들이 참여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주류를 형성하기에 그렇다. 오늘 신사실주의가 미술계의 새로운 사조로 등장하게 된 것도 미술시장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이란 어떤 경우에라도 미술시장의 논리를 외면할 수 없게 된 상황이 이를 말해준다.

최근 대형 아트페어나 대형 기획전 그리고 상업화랑에서는 하나 같이 동일한 소재, 유사한 기법의 신사실주의 회화가 장악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것도 정도의 문제이다. 지나치게 편향되어 있는 것이다. 시장이 원하니 그 수요에 대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고 물으면 답이 궁색해진다. 그러나 너무 자주 그리고 유사한 작품을 대하다 보니, 어느 새 권태로움을 느낄 정도가 됐다. 혹시 소재만 다르더라도 권태감은 덜 할지 모른다. 기법이나 조형어법 그리고 소재까지 동일한 그림들이 범람하는 상황이니 자신도 모르게 ‘지겹다’고 중얼거리게 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분간, 적어도 신사실주의는 새로운 미술이 출현하기 전까지는 미술시장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기간이 얼마가 될지는 모른다.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신사실주의에 대해 권태로움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잠시 격하게 출렁였던 미술시장도 서서히 식어가고 있다는 조짐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신사실주의가 그 생명력을 좀 더 보전하기를 원한다면 소재의 다양화가 필요하다. 그리고 변종의 신사실주의의 출현을 고무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미 미술애호가들의 뇌리 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 권태로움을 해소시키지 못할 것이다.  <미술평단 2008 여름 제8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