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평

미술시평 (34) - 한국 사실주의 회화의 현주소

펜보이 2008. 4. 2. 09:48
 

한국 사실주의 회화의 현주소


신항섭(미술평론가)


사실주의 회화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물상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쯤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인식이 물론 틀리는 것은 아니다. 사실주의는 용어가 말하고 있듯이 실제를 그리는 것이고 또 실제와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사실주의는 형태만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생생한 그 시대상황이나 정황은 물론이려니와 시대의 정신 및 정서까지도 포괄한다. 따라서 사실주의의 형식이라고 한다면 실제와 닮게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기법을 말하는 것이고, 표현양식이라는 측면에서 말하면 시대정신 및 정서 그리고 시대상황까지도 포함시켜야 한다. 표현양식에서 말하는 사실주의는 그 시대의 주체가 되는 인간사회에 대한 작가적인 시각, 즉 시대정신 및 정서 그리고 시대상황을 진실하게 반영하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한국 사실주의는 형식에만 치우치고 있을 뿐, 양식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미흡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시대정신 및 시대상황과 상관없는 유미주의적인 사실묘사에 한정하기 때문이다. 사실주의가 19세기에 완성된 미학이라는 점에서 볼 때 전근대적인 시각을 견지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의문을 물리칠 수 없다. 하지만 사실주의 표현양식은 회화의 근본이라는 점을 간과하지 않는다면, 온갖 현대미학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미술시장의 수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 사실주의 회화를 요구하는 수요층이 있는 한 그 존재가치는 유효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 미술계에 존재하는 사실주의 회화는 형식에 안주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다. 시대정신이나 정서 그리고 시대상황에 대한 시각을 결여한 장식성 위주의 작품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정신 및 정서 그리고 시대상황을 외면하는 것은 그림에 장식적인 가치를 우선하는 시대풍조 탓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실주의 정신에 투철한 작가라면 이 시대의 인간사회에 애정이 담긴 시선을 보내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시 말해 단순히 시각적인 아름다움만을 좇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상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최근 한국화단에는 때 아닌 사실주의 화풍이 풍미하고 있는 실정이다. 유행하고 있는 사실주의 회화는 대다수가 풍경이나 정물에 국한하고 있다. 소수의 인물화도 눈에 띄지만 엄격히 말해 사실주의 양식적인 특징을 살리지 못하는 유미주의에 머물고 있다. 그런데 이들 사실주의 경향의 회화는 대체로 30-40대 작가들이 주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그림은 기존의 사실주의 및 자연주의 화풍과도 일정한 차이를 두고 있다.

지금 미술시장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치는 사실주의 작가들의 작품 경향은 극미한 묘사력이 특징이다. 아카데믹한 기법보다 더욱 정밀한 극사실적인 묘사력과 더불어 그 전체적인 인상은 차갑다는 쪽이다. 명암이나 원근법을 따르면서도 고전주의나 전통적인 아카데미 기법과도 조금은 다르다. 명암의 선명도를 중시하지 않기에 전체적으로 색채는 맑고 투명하다. 더불어 현실적인 색채이미지를 과장하지 않는다. 작가에 따라서는 단색조의 색채이미지에 가까운 경우도 없지 않으나 대세는 차가운 시선으로 응시한다는 입장이다.

이들 젊은 작가들의 최근 작품에 나타나는 특징, 즉 극렬한 사실적인 묘사력과 차가운 색채감각은 전자과학 문명으로 치닫는 현실적인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는지 모른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전통적인 사실주의 화풍과는 차이가 있는 까닭이다. 이는 어쩌면 극명한 형태해석을 보여주는 전자 디스플레이의 영향인지 모른다. 극한적인 해상력을 추구하는 티브이 및 컴퓨터 모니터에 익숙한 눈에는 스푸마토 기법 따위의 고전적인 묘사기법은 감각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는 심각하거나 무겁고 깊은 맛이 없다. 단지 명석한 형태묘사와 밝은 색채이미지로 통일되는 냉랭한 분위기가 화면을 지배할 따름이다.

그런데 이들 작품에 대해 미술계 일부에서는 의구심을 보낸다. 사진작업이 아니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 캔버스나 종이 위에 사진을 전사하여 그 위에 채색을 덧입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어디까지나 그림이란 손의 기술로 시종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미학개념의 입장에서 따른 시각일 따름이다. 이와 같은 회화의 윤리성은 적어도 팝아트나 하이퍼 리얼리즘이 나오기 이전까지는 맞는 시각이다. 그림이란 손의 재능, 즉 직접 손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전통적인 조형개념에서 볼 때 전사기술을 응용하는 것은 분명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팝아트 및 하이퍼 리얼리즘에서 전사기법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방법론의 중요성을 자각시킨 현대미학은 새로운 표현을 위해서는 과학적인 방법, 즉 손 이외의 방법을 동원하여 그림을 그리는 일 따위는 크게 문제시하지 않는다는 입장인 것이다.

그러기에 인쇄물을 확대하는 팝아트나 환등기로 사진을 확대해서 그리는 방식이 회화적인 윤리에 저촉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된 셈이다. 이로부터 현대미술에서 사진을 이용하거나  또는 환등기를 활용해서 확대하는 작업은 누구에게나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실제로 한국화단에서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작업하는 작가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물론 사실주의 및 자연주의 작가들이 사진을 찍어다가 화실에서 작업하는 일은 보편화된 현상이다. 뿐만 아니라 현대미학을 추종하는 젊은 작가들은 이와 같은 방법 이외에도 컴퓨터로 형태를 왜곡시켜 캔버스에 옮겨 그리는 따위의 표현방법도 동원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현대회화에서는 과학을 활용함으로써 이전보다 한층 풍부한 표현기법을 구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실주의 및 자연주의라는 전통적인 조형개념에서 볼 때 사진을 보고 그린다던가, 전사를 이용한다는 것은 어딘가 개운치 못하다는 느낌이다. 순수한 손의 기술만으로 그리는 데 그림의 가치가 있지 않느냐는 생각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어렵다. 현대미학을 추종하는 그림이라면 또 모르지만, 전통적인 기법 및 조형개념을 따르는 사실주의 및 자연주의는 어디까지나 손으로 시종해야만 마음이 놓인다는 기분을 떨칠 수 없는 것이다. 너무 보수적인 시각일지는 모르나, 사실주의 및 자연주의 그림을 사랑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은, 전통적인 표현양식에서 만큼은 반드시 직접 보고 그려야만 그림 같다는 입장을 철회하기 어려운지 모른다.   

그렇다. 사진을 보고 그린다든가, 전사기법을 활용하는 그림은 생동감 및 현장감이 떨어지기 십상이다. 사진은 입체적인 대상일지라도 평면적인 이미지만을 보여줄 따름이기 때문이다. 사진과 달리 사물을 직접 마주하고 그리는 화가의 눈은 공간적인 깊이를 포착할 수 있다. 앞뒤에 놓인 소재간의 거리감 및 공간감 그리고 입체감을 직접 감지하면서 작업하게 되므로 그림에서도 그러한 시각적인 차이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 시각적인 차이는 공간적인 깊이여부로 판별되는 것이다. 그림에 대한 식견이 높고 예민한 관찰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정도의 차이를 감지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진을 이용하는 작업은 아무래도 깊이감이 부족하다. 그림에서 깊이 및 중후함, 그리고 사색적인 정서를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어딘가 감동이 적기 때문일 텐데, 이는 사실적인 공간감을 표현하려고 해도 현실을 떠난 상상력이나 기억으로는 한계가 있는 까닭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진을 이용하는 작업 자체가 비윤리적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할 것 같다. 사진을 이용한 회화작업은 현대에서는 보편화된 현상의 하나이기에 그렇다.   <월간 미술세계 2008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