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길

명작의 길 (25) - 이두식 소묘

펜보이 2008. 5. 9. 22:18

      

 

 

이두식의 소묘


작가적인 역량을 드러내는 속살의 순수성


신항섭(미술평론가)


점과 선은 인류가 고안해낸 최초의 조형언어이다. 세계 도처에서 발견되는 원시시대의 동굴벽화 및 암각화에서 볼 수 있듯이 점과 선은 인간의 표현충동을 자극하는 요인임이 분명하다. 인간은 점과 선을 운용하여 형상을 만들고 또 문자를 만듦으로써 문명을 구축할 수 있었다. 점과 선은 인간의 지적활동의 증표로서의 무언가를 만들고 싶다는 표현충동 및 욕구를 수행하기 위한 그 최초의 조형언어인 셈이다. 따라서 인간의 보편적인 표현 욕구를 대신하는 화가는 점과 선의 운용기술을 습득하는 것을 그 출발점으로 한다.

이두식은 화가로서의 본질을 묻는 드로잉, 즉 소묘작업을 종교인처럼 하나의 의식으로 간주한다. 그러기에 마치 일기를 쓰듯이 습관처럼 연필을 잡는다. 그림수업을 시작한 지 50여년을 변함없이 연필소묘를 지속한다는 것은 한국화단 풍토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다. 한국화단에서는 소묘는 그림을 공부하는 그 최초의 단계, 즉 초보적인 기술일 뿐이라고 간주한다. 이는 소묘가 가지고 있는 본질 또는 효용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결과이다. 단적으로 말해 소묘는 그림의 시작이자 끝이다. 더불어 소묘는 작가적인 역량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속살이다. 그림은 소묘를 떠나 존재할 수 없다. 어떤 식으로든지 점과 선을 운용하는 한 소묘는 그림의 핵심이자 본질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진정한 대가치고 소묘에 능숙하지 않은 경우는 없다. 대가의 길이란 바로 소묘가 그 출발점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가 여전히 소묘작업을 병행하는 이유는 화가다운 손의 기술 및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이다. 어쩌면 그의 작업에서 생기 넘치는 선이 그림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장악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활달하고 호쾌하며 속도감 있고 자신감 넘치게 전개되는 필선의 자유로움은 아크릴 작업 또한 소묘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말해준다. 한마디로 그의 소묘는 소묘 그 자체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크릴 작업의 근간으로 작용한다. 연필소묘를 통해 익힌 기술 및 감각이 붓으로 그대로 전이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최근 소묘는 1970-80년대의 작품과 비교해 그 기술 및 감각이 전혀 퇴조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정밀묘사에 가까운 소묘기술이 유지되는 가운데 감각은 무르익어 한층 자유롭다. 소재 및 대상이 무엇이든지 형식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묘사된다. 손바닥 크기의 메모지는 물론이요, 수첩, 그리고 스케치북 등 손에 잡히는 대로 연필이나 색연필 또는 볼펜 따위로 소묘를 한다. 따라서 소묘의 소재는 즉흥적이고 단편적인 에피소드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연필소묘의 대다수는 그 묘사대상이 인물인데, 특정인이 아닌 보편적인 인물상이라는 점이 색다르다.

 

            

 

가령 한국의 전형적인 중년부부라든가, 40대 남자 따위와 같이 현실생활과 연관된 인물의 얼굴 특징을 묘사한다. 이들 인물상은 극사실적으로 묘사하는가 하면, 캐리커처 또는 크로키와 같은 간결한 선묘위주의 속사기법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속사의 경우 대상의 성격이나 순간적인 포즈 및 표정을 민첩하게 포착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여기에서는 대상의 형태적인 특징을 잡아내는 순발력과 정확한 비례감각이 요구된다. 속사작업을 위해서는 속사에 대응하는 손의 감각이 예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가 습관처럼 연필로 소묘 또는 크로키 작업을 지속하는 것은 다름 아닌 손의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이처럼 그의 소묘작업은 특정 인물보다는 일상사에서 보고 느끼는 인간군상의 이미지들이 자유롭게 종이위에 펼치는데 특징이 있다. 실제의 대상뿐만 아니라, 티브이 또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마주치거나 스치는 인간군상이 영감을 제공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눈에 보이는 사실의 재현을 넘어 인간 삶에 대한 그 자신의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인 이슈가 화의를 자극하기도 한다. 그의 소묘작업은 형식이나 양식에 구애받지 않고 순간순간의 미적 감흥이나 단상을 표현하는데 최적의 방법임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해 소묘는 화가로서의 자신에게 주어지는 일상에 대한 반사적인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세상사에 대한 작가의식의 기민한 대응방법인 것이다. 실제로 이번 전시회는 이렇듯이 순간순간에 느끼는 삶의 단상을 복기한 작품들이 적지 않다.   

 

 

그런가 하면 모델을 대상으로 하는 본격적인 소묘작업도 병행한다. 그 자신과 가까운 특정인이나 주변 인물들, 그리고 일상사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대상이다. 특히 인체를 대상으로 하는 누드 소묘는 모델의 다양한 포즈 및 순간적인 표정을 잡아내는 민첩성을 발휘한다. 도무지 주저 없이 전개되는 필선은 정확한 묘사력 및 비례감각의 산물이다. 그의 선은 자신감이 넘친다. 속도감 속에서도 형태를 명확히 읽어내는 감각은 순전히 소묘 덕분이다. 숙달된 인체 소묘는 속사작업, 즉 크로키에서 결판이 난다. 인체소묘 작업에서 볼 수 있는 호쾌하고 활기찬 선의 운용은 정확하고 치밀한 사실적인 소묘력의 산물이다.   

 

 

형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은 화가의 특권일 뿐만 아니라 회화적인 상상력을 끝없이 자극하고 보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소재 및 대상을 정확히 묘사하는 사실적인 소묘력이야말로 조형적인 상상을 끝없이 허용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의 날개인 것이다. 달리 말해 화가로서의 자신감을 보조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필기구를 이용한 다양한 형태의 소묘작업이 가능한 것도 따지고 보면 견실한 사실적인 묘사력에 기인한다. 소품들에서 볼 수 있는 극사실적인 묘사력은 단순히 손의 기술이 가지고 있는 완성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극사실적인 묘사력이 더욱 정밀해지면 어느 순간에 세련미로 바뀌게 된다. 세련미는 미적인 가치, 즉 회화적인 가치 또는 예술성으로 치환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1970-80년대의 수채화 작품도 함께 출품한다. 수채화라고 하지만 연필소묘를 바탕에 두고 그 위에 담채로 마무리하는 형식이다. 그러기에 타고난 소묘솜씨가 숨김없이 드러난다. 다시 말해 속살을 드러내는 셈인데, 극사실적인 정밀한 묘사력은 당시 그 정점에 올라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때의 수채화는 사실적인 형태묘사와 더불어 추상적인 이미지를 도입하는가 하면 여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등 당시로서는 전례가 없는 개성적인 화면 구조를 보여준다. 따라서 그의 화력에서 최초로 개별적인 형식미에 도달한 작품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번 소묘전은 새삼 한 작가로서 성장하고 또 자기세계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소묘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 전개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부단한 자기정련의 방법으로, 그리고 건강한 선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채택되는 소묘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무엇보다 아크릴 작업을 지배하는 호방한 운필의 선에서 감지되는 자유로움이 다름 아닌 소묘의 영향임을 간파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의 소묘는 아크릴 작업과의 끈끈한 결속력을 유지하면서 새삼 자신감 넘치는 선이 가지고 있는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선명히 부각시키고 있기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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