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길

명작의 길 (22) - 왕치펑<王奇峰>

펜보이 2008. 3. 7. 23:47
 

 


왕치펑 초대전


시적 정취가 담긴 새로운 개념의 여성상



신항섭(미술평론가)


품성이 착한 사람은 행동거지는 물론이려니와 언행 그리고 감정표현에서도 선한 이미지가 그대로 노출되기 마련이다. 어디 그 뿐이랴 하고 있는 일에서도 어김없이 선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선한 마음이 그 사람의 온 몸을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감정을 담아내는 그림의 경우, 선한 마음으로 그린 작품에는 필연적으로 선한 정서가 포진하게 된다. 일부러 악한 제재를 택하지 않는 한 화가의 마음이 그대로 표출되어 선한 이미지를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왕치펑王奇峰의 그림에는 선한 사람의 얼굴을 보고 있는 듯 맑고 부드러운 기운이 가득하다. 그러기에 그의 그림과 마주하고 있으면 심신이 부드러워지지 않을 수 없다. 마음이 언짢았다가도 그림과 마주하는 순간 그와 같은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지고 만다. 도대체 우리의 시선을 거슬릴만한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맑고 순수하며 순정한 감정을 이끌어내는 시각적인 이미지 및 그런 분위기만이 자리할 뿐이다.

그림은 그린 사람의 인격을 반영하게 마련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실제의 일상적인 모습에서도 그림과 다르지 않다. 온화하고 정적인 생활태도가 그러하고 세상을 긍정적이고 또 아름답게 보려는 마음자세가 그러하다. 무엇이든지 아름답게 보려는 작가적인 시각이야말로 화가로서의 필요조건이 아닐 수 없다. 그림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고 또 사람들의 정서생활을 순화시켜 줄 수 있기에 그렇다. 

 

                    

 

그가 이처럼 순수하고 순정한 이미지의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소재 및 제재의 선택과 무관하지 않다. 아름다운 여인을 제재로 하여 화초를 곁들이는 전형적인 미인도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처음부터 아름다운 대상을 그리겠다는 작의가 선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곧 선과 통하는 것이고 보면 순정한 이미지의 미인도가 품고 있는 분위기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의 미인도는 인물의 표정에 초점을 맞추는 초상화 형식의 인물화와는 다르다. 초상화 형식의 인물화는 정면을 바라보는 데다 자세마저 경직됨으로써 부담스러운 점이 없지 않다. 반면에 그의 인물화는 자연스러운 일상적인 모습이어서 시선을 주기에 편하다.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 일상적인 여인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인 동양 여성의 삶이란 대체적으로 정적이기 마련이다. 유교적인 사회에서 여성은 항상 피동적이고 소극적인 모습이었다. 가정이라는 한정된 생활공간을 장악하면서 남편을 섬기고 자식을 키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여성의 본분이었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예악을 즐기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물론 모든 여성에게 이런 예술적인 소양 및 취미를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은 아니다. 일부 여유 있는 여성들에게 국한된 일이기는 하지만 이런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여성상을 이상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의 그림은 이렇듯 유교적인 전통 생활양식을 연상케 하는 배경을 보여준다. 물론 여기에 등장하는 여인은 모두 미인들이다. 이는 의도적인 설정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고상하고 우아하고 한가로운 모습의 여성상만이 보인다. 다시 말해 치열한 삶의 경쟁에서 초연한, 여염집 여성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한마디로 현실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이상적인 여인상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미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꽃처럼 이미 자연적으로 주어진 아름다움을 재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쩌면 꽃의 아름다움을 그리는 것은 한시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그림으로 옮겨 영속적으로 즐기겠다는 욕구의 발로인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여인의 그림 또한 꽃을 그리는 목적과 다르지 않다. 아름다운 외모에다가 우미한 의상과 그에 어울리는 몸가짐은 어느 면에서 꽃보다도 더 농염하고 매혹적이다. 그 아름다움에 취하고 현혹되지 않는 이가 있을까.

꽃이나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은 선, 즉 착한 마음을 선도한다. 아름다운 그림을 감상함으로써 착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미인도를 보면서 악한 감정으로 반응하는 경우는 많지 않을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림에 표현된 미인의 모습에 현혹됨으로써 잠시나마 그로부터 아름다운 꿈 또는 환상을 갖게 될 것이다. 이는 미인도가 의도하는 숨겨진 가치라고 할 수 있다. 미인의 모습을 통해 시각적인 쾌락을 맛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속에서 이상미를 발견하는 데 의미가 있다.

 

                                

 

그의 작품에 나타난 조형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는 형태를 모호하게 묘사하는 데 있다. 인물이든 배경이든 윤곽선이든 전체적으로 희미하게 처리된다. 마치 안개 또는 베일에 가려 있는 듯싶게 은근하게 묘사된다. 이처럼 불명확한 형태묘사는 시각적인 불편함을 가져오기 십상이다. 그런데도 그의 작품에서는 모호한 묘사가 오히려 독특한 시각적인 이미지를 가져온다. 형태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은 어쩌면 비현실적인 상황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즉, 환상적인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한 수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불확실한 형태묘사는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가 하면, 시적인 정취를 표현하는 데도 효과적이다. 인물화임에도 자연스러운 일상적인 여성의 모습을 통해 시적인 아름다움을 감지하게 된다. 다시 말해 인물이 놓여 있는 그 상황, 즉 인물을 감싸고 있는 주변공기가 시적인 정취를 야기한다. 따라서 달콤하고 낭만적이며 동시에 이국적인 정서를 맛보게 되는데, 이러한 이미지를 함축하여 시적인 정서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간간히 시를 쓴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는 다름 아닌 문학적인 소양의 산물이다. 인물화임에도 시적인 이미지를 깃들이게 할 수 있는 그의 미적 감각은 남다른 것이다.

 

         

  

여기에는 색채 이미지도 한 몫을 한다. 원색을 피하여 중간색조로 일관하는 색채이미지 역시 비현실성을 강조하는 요인의 하나이다. 시각적인 자극을 피하여 부드럽고 온화하며 달콤한 중간색조가 빚어내는 정서 역시 환상적인 분위기와 상통한다. 명료하게 보이는 사실적인 기법에다가 색채마저 선명할 경우 현실적인 공간감이 부각되기 마련이다. 그처럼 차가운 이성적인 묘사에서는 환상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환상적이고 서정적인 이미지 및 정서는 미묘한 표정의 중간색이 지어내는 표현감정에 닿아 있다.   

그가 묘사하는 여성은 전통적인 풍모를 지닌 과거의 여인이 아니다. 오늘 우리들 주변에서 만날 수 있을 법한 그런 현대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세련되고 지적이며 우아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전통적인 습속에 갇혀 있는 규방속의 여성상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각박한 생존경쟁에 내몰린 현대적인 여성의 모습도 아니다. 어느 면에서는 자기애에 빠져 있는 비현실적인 여성의 이미지일 수도 있다. 이렇듯이 전통적인 옛 여인의 정서와 현대적인 세련미가 공존하는 미묘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렇다. 그는 전통적인 삶에서 풍기는 아름다운 정서를 현대적인 여성의 이미지에 대입시키고 있다. 그가 전통회화, 즉 중국회화사를 빛낸 유명화가들의 작품에 표현된 옛 사람들의 삶의 정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시 말해 이미 현대인의 삶 속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전통적인 여성들의 삶의 모습 및 그 정서를 선대 화가들의 작품에서 발견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 옛 사람들의 정서를 기반에 두고 현대를 살고 있는 그 자신의 미적 감각을 융화시키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미인도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모습이 현대적으로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지 않는 옛 여성들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오는 것은 현실성을 상실한 옛 그림의 재현에 불과하다. 따라서 옛 사람들의 삶의 정서를 대입시키되 현대여성의 이미지를 부각시킴으로써 전통과 현대의 조화라는 형식논리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여인의 모습은 비록 현대적이지만 그를 감싸고 있는 정서는 확실히 현대와는 다른 옛날 분위기에 가깝다.

 

                            

 

그는 여기에서 현대적인 미인도의 한 해법을 찾아냈다. 그림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의상 역시 전통성과 현대성을 교묘히 융합한 새로운 미적 감각의 소산이다. 일테면 절충식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색감이나 디자인이 무척 세련돼 보이고 아름답다. 우아하고 품격 있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결함이 없다. 이러한 이미지의 의상은 전통회화에서 찾아낸 것인가 하면, 현대적인 디자인의 전통의상을 참고한 것이다.

그는 전통적인 가치를 중시하면서 현대적인 미적 감각을 가미하여 새로운 형식의 미인도를 실현하게 된 셈이다. 뿐만 아니라 조형적인 해석과 관련하여 현대적인 미적 감각을 적극 반영하고 있다. 전통적인 재료인 채색이나 수묵과 다른 유채라는 재료는 그 시각적인 이미지가 전통회화와는 사뭇 다르다. 단지 유채로 전통적인 미를 표현한다는 일 자체만으로도 새롭다. 더구나 조형적인 해석에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도입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인물의 포즈 및 구도에서 전통회화의 정적인 이미지와 다르다. 포즈가 좀 더 적극적이다. 정태적인 포즈가 일반적인 전통회화와는 달리 동적인 포즈가 많은 것이다. 이는 자기표현 및 자기주장이 강한 현대여성의 활동적인 이미지에 합당하다.    

 

 

그는 급변하는 중국사회에서 그리고 현대미술이 만연하는 풍조 속에서 예외적인 작가일 수 있다. 시대적인 상황에 초연한 입장을 취하면서 순수미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순전히 그 자신의 인생관 또는 작가적인 신념에 관한 문제로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가에게는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렇다. 한 작가로서 많은 것을 할 수는 없다. 그 자신의 성품에 맞고 또 예술적인 사상 및 철학에 근거하는 작업에 전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어쩌면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 속에서 실현되는 그의 미학적인 성취는 배금주의에 물든 현대사회 및 인간정신을 치유할 수 있는 하나의 해법인지 모른다.     

 

<왕치펑 초대전은 3월5일부터 15일까지 인사동 장은선갤러리(02-730-3533)에서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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