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문 전
현대적인 정서 반영한 아름다운 기하학적인 구조
신항섭(미술평론가)
작가란 모름지기 창작의 윤리성에 충실해야 한다. 새로움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창작의 의미는 소진하게 된다. 하지만 새로움을 추구한다는 일은 얼마나 힘든가. 그래서일까. 때로는 사각의 평면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회화의 경우 더 이상 새로움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기에 절망하는 자각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창작의 열정과 신념에 사로잡혀 있는 작가에게 평면공간은 여전히 무한한 가능성의 땅이다.
장동문의 최근 작업을 보면서 평면회화는 여전히 유효한 가능성의 땅임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말을 소재로 하는 그의 작업은 지난 해 마니프에서 호평을 받은 바 있는데, 최근 작업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하지만 지난해와는 달리 구조적으로 좀더 치밀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채색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는 변화가 목도된다. 이 정도의 변화도 생각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조형언어 및 어법이란 급변하는 것보다는 진화하는 형태가 바람직한지 모른다. 그런데 그의 경우 그 변화에 가속이 붙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는 창작의 열정이 왕성하다는 징조이다. 자연연령 50을 넘기면서 무언가 그림에 대한 입장과 생각이 달라지고 있다는 얘기다. 이제야말로 그림이 가지고 있는 그 본래적인 면모를 되찾아야 한다는 자각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의 최근 작업에서 발견되는 구조적인 치밀함은 작업하는 순간의 즉흥적인 감흥을 억제하는 대신에 이지적인 해석이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직선과 곡선을 교묘히 조합하는 조형어법에서 알 수 있듯이 기하학적인 구조 및 구성을 지향하는 작업은 건축설계와 같은 치밀함이 요구되기 마련이다. 근래 작업에서는 치밀함 밀도 세련미 완성도 따위의 용어를 쉽게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용어를 통해 그가 지향하고 있는 조형세계를 가늠하기는 어렵지 않다. 특히 갈색조와 녹색조의 유채색을 도입한 두 대작은 그의 작업이 어떠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짐작케 한다.
이들 두 작품은 바둑판과 같이 일정한 형태의 평면으로 화면을 분할하고 그 중심에 말을 배치한 간단한 구도인데 구조적인 견고함이 마치 전자회로나 건축설계도를 보는 듯하다. 전체적인 화면의 구조도 그러하거니와 말의 이미지를 만들어 가는 작은 기하학적인 이미지의 집합은 전자회로처럼 빈틈없이 조밀하게 짜여져 있다. 조밀한 기하학적인 이미지들은 갑옷을 연상케 하면서도 무언가 생명의 온기가 흐르는 유기체로 보인다. 언뜻 세포분열에 의해 증식하는 생명체와 같다. 차가운 기하학적인 구조체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라는 강건한 동물의 왕성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다. 시각적인 이미지로서의 말에 그치지 않고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말의 이미지를 추구하고 있음인가.
물론 유채색이 도입됨으로써 기하학적인 이미지에서 비롯되는 금속성과 같은 차가운 인상을 누그러뜨리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처럼 치밀하고 견고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말의 이미지에서 느끼는 또 다른 인상은 조각상과 같은 견고함이다. 특히 말과 정면으로 마주한 채 위쪽에서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시점은 머리부분과 몸통 그리고 다리가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어 놓는다. 이는 말의 형태적인 아름다움보다는 구조미를 부각시키려는 의도임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이들 작품은 비재현성이라는 현대회화의 한 속성을 보여주면서 조형적인 해석에 따라 말의 형태가 얼마나 다른 이미지로 탈바꿈할 수 있는가를 증명한다. 말은 속도와 힘의 상징이다. 또한 그 늠름한 기상과 윤기가 감도는 근육질 그리고 매끄럽게 빠진 다리는 때로 성적인 상징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렇듯이 말의 상징적인 이미지는 역시 조각상과 같은 구조적인 견고함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어쩌면 갑옷을 연상케 하는 철편과 같은 구조는 이와 같은 말의 상징적인 이미지에서 비롯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작업에서 기하학적인 구조식에 대한 시도는 이미 오래 전에 있었다. 다만 최근에 와서는 좀더 그림의 밀도를 높이고 구조적인 치밀함을 도모함으로써 기하학적인 이미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하학적인 이미지는 기계적이고 획일적이면 도식적인 도회지의 정서 또는 이성적인 판단에 민감한 현대인의 사고패턴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가 기하학적인 이미지를 선호하게 된 것도 현대적인 미적 감각 및 취향을 의식한 결과인지 모른다. 현대적인 미적 감각이 만들어낼 수 있는 현대인의 보편적인 정서에 화답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작가는 시대감각 및 그 정서를 외면할 수 없기에 그렇다.
기하학적인 구조뿐만 아니라 말, 악기, 새, 꽃 따위의 소재를 자유롭게 배치하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회색조로 일관하는 이와 같은 경향의 작업 역시 형태해석에서는 기하학적인 이미지를 도입하고 있다. 한마디로 도회지적인 정서를 물씬 풍기는 화풍이다.
그런가 하면 파스텔화에서는 구체적인 물상의 형태가 없이 단지 기하학적인 구조만이 반복되는 비구상 작업도 시도하고 있다. 어찌 보면 지극히 단조로운 구성인데도 전체적인 인상은 여전히 세포증식과 같은 유기체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흡사 산 위에서 숲을 내려다보았을 때의 그 깊고 아름다운 나뭇잎의 집합처럼 녹색을 기조로 하는 그 비구상적인 이미지는 생명의 기운, 자연의 신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인 형태가 없음에도 무언가 꿈틀거리는 듯한 느낌이야말로 그가 세상을 향해 던지는 메시지인지 모른다.
비구상 작업은 이제까지 보아온 그 어떤 형식의 작품과도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비구상적인 감각에 대한 숨겨진 재능이 드러나고 있는 순간이다. 구상과 추상, 전통과 현대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초월적인 가치로서의 개별적인 조형세계의 가능성을 탐색하려는 보다 적극적인 태도의 산물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의 새로운 행보를 주시한다.
<2003년 개인전 서문>
자연미를 세련된 인위적인 미로 변환
신항섭(미술평론가)
화가가 특정 소재 및 대상에 천착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자칫 소재주의에 갇힌 것이 아닐까, 하는 오해를 무릅쓰면서도 어떤 특정의 소재 및 대상을 반복적으로 다루는 데는 그로부터 무언가 한 소식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리라. 물론 동일한 소재를 반복적으로 다루게 되면 기술적인 완성도 및 세련미가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완성도 높은 기술 및 세련미를 추구하는 작가도 있다고 보면 소재주의가 문제될 일은 또 아니다.
장동문은 말을 소재로 하는 작업을 수년 째 계속해 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말은 그에게서 단순히 그림의 소재라는 의미를 뛰어넘고 있다. 말의 그 형태적인 아름다움은 철저히 분석되고 분해되어 전혀 새로운 가치를 획득하고 있다. 조형적인 아름다움이라는 하나의 변할 수 없는 원칙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로 변신을 거듭하는 가운데 말은 마침내 그 자신의 사고를 사역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이제 말은 그의 의식을 관장하는 존재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말의 그 아름다움에 현혹됨으로써 그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구실마저 상실하고 있는 듯싶다. 그러기에 그는 말이 제공할 수 있는, 가능한 그 어떤 조형적인 변주도 거부하지 않는다. 말의 형태적인 특징을 감싸는 세련미 넘치는 윤곽선이야말로 그만의 조형언어로 양육한 미적 가치임을 천명한다.
그는 말의 이미지를 구조적으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역시 화면의 전체적인 구성 또한 구조적인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러기에 화면의 어느 한 구석도 우연적이거나 감정적인 표현이 개재할 수 없을 만큼 치밀하게 직조되고 있다. 그 구조식의 일관된 흐름, 즉 통합된 이미지는 기하학적인 패턴을 가진다. 즉 기하학적인 직선과 곡선을 교묘히 배합하여 견고한 구조의 화면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거기에는 차가운 이성적인 이미지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화면을 크게 분할하거나 테이핑 작업에 의한 연속적인 큐빅의 이미지, 그리고 원형의 물방울 이미지 따위가 화면을 지배한다. 그런데다가 형태를 분별하는 색채이미지는 평면적으로 처리되고 있다. 이와 같이 평면과 기하학적인 이미지의 조합은 마치 수학공식처럼 빈틈이 없어 보인다. 감성이 끼어들 여지가 없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이러한 문제를 의식했음인지 말을 비롯하여 새, 꽃, 나뭇잎 따위 자연물의 이미지를 도입하고 있다. 물론 바이올린이나 첼로 따위의 악기며 도자기도 가세한다. 이들 소재는 자칫 경직되기 쉬운 기하학적인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완화시켜 준다. 단순히 소재만으로도 친근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물이나 인조물과 기하학적인 이미지를 하나의 통일된 구조식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은 마치 연금술사의 비장의 기술과도 같다.
특히 생명이 깃들어 있는 유기적인 존재물을 도상의 이미지로 단순하고 간명하게 만들어가는 조형적인 해석이야말로 개별적인 영역이다. 이전의 작가들과 다른 새로운 개념의 형태적인 해석이란 어차피 창작의 윤리성이자 작가적인 의무이다. 조형이란 형태를 만든다는 의미이고 보면, 현실과 다르다는 것은 필연적인 요구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조형적인 구조식을 창안함으로써 자연물의 아름다움과는 또 다른 새로운 인위적인 미적인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다.
그가 만들어내는 형태미는 다름 아닌 그 자신만의 독자적인 조형언어 및 어법의 소산이고 인위적인 가치인 것이다. 인공의 아름다움은 인간에게 주어진 권능이기도 하다. 인위적으로 물상을 만들 수 있는 기술과 함께 아름다움을 분별할 수 있는 감각을 통해 자연미와는 다른 전혀 새로운 미의 세계를 성립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이러한 능력을 감성적이기보다는 이성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가 만들어내는 그림 속의 이미지들은 빛나는 이성의 힘을 보여준다. 감정의 흐름에 의탁하는 형태가 아닌, 이성적인 시각을 반영한 형태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그림이 감성적으로 메마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치밀한 기하학적인 구조식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통해 극렬한 인위적인 아름다움의 실체를 확인하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말의 형태미를 보자. 말의 전체적인 형태미는 사실적인 형태를 응용하여 응축한 것이다. 그러므로 날렵하고 매끄럽고 강직하고 멋진 기상을 뽐내는 말의 형태적인 특징이 그대로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간결하게 처리되는 말의 윤곽선은 멋들어지고 세련돼 보인다. 말의 아름다운 외형이 선명하게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미는 순전히 그 자신의 세련된 미적 감각에 의해 조형된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윤곽선 안쪽, 즉 말의 몸을 덮고 있는 자잘한 기하학적인 이미지들의 편린은 윤곽선을 더욱 명쾌하게 보조한다. 기하학적인 패턴의 화면 위에 자연물을 배치했을 때 오는 상충을 피하고 동화시키기 위해서는 말의 이미지 또한 기하학적인 해석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기하학적인 조형어법을 가지는 다양한 비정형의 이미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기하학적인 패턴의 구조로 일치시킬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의 작품에서 말의 이미지는 단수 또는 복수로 등장한다. 구성적인 묘를 살리기 위한 일종의 조형적인 변주인 것이다. 말의 이미지가 복수일 경우는 여러 마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변주를 의미하는 것이다. 한 마리뿐인 작품과 여러 마리가 함께 하는 작품은 그 시각적인 이미지가 전혀 다르다. 복수의 이미지는 공간의 확장과 더불어 시각적인 유연성을 부여한다. 시각의 분산효과와 더불어 구성적인 아름다움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집단의 힘 또는 질서의 아름다움도 외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말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하는 최근의 작업을 통해 다양한 조형적인 변주의 가능성을 부단히 탐색한다. 기하학적인 해석이라는 조형의 틀을 유지하는 가운데 소재의 선택 및 배치 그리고 구성을 통해 인위적인 미, 즉 다양한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최근 작업은 현대적인 공간과 아주 잘 어울릴 수 있는지 모른다. 아파트로 상징되는 현대인의 주거공간은 모두 기하학적인 공간구성으로 연결되고 있는 까닭이다. 자연미를 인위적인 조형미로 변환해내는 그의 조형감각은 세련미를 더하고 있다. 그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갈수록 농도 짙은 세련미를 보여줄 것이다.
<2006년 개인전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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