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학 작품세계
세상을 순수미로 감염시키는 정갈한 이미지
신항섭(미술평론가)
수채화와 유채화는 물과 기름이라는 성분에 따른 그 재료의 차이가 현격하다. 따라서 재료의 선택에 의해 ‘수채화작가’ ‘유화작가’로 그 길을 달리하게 된다. 현실적으로 수채화와 유채화를 병행하는 화가들이 적지 않지만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수채화작가’ ‘유화작가’로 구분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두 가지 작업을 병행하는 작가의 경우 스스로의 위치를 애매하게 생각하고 있다. 재료에 따라 화가의 전문성을 분류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전시회라는 상황에서는 엄연히 분리되고 있기 때문이다.
김재학은 수채화로 화단활동을 시작하여 유채화로 완벽하게 변신한 경우이다. 물론 지금도 필요에 의해 간헐적으로 수채화를 병행하고 있으나 미술애호가들은 유채화작가로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그의 유채화 작업에서는 여전히 수채화적인 이미지가 남아 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 듯싶다. 20년 가까이 수채화에 전념해 왔다면 그로부터 완전히 떠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 모른다. 수채화가 가지고 있는 그 표현력에 대한 감각이 이미 체질화되었다고 볼 수 있는 까닭이다. 무엇보다 투명재료가 가지고 있는 맑고 선연한 색감과 선도 높은 형태해석이야말로 수채화만의 특징이다. 이와 같은 수채화의 표현력을 체득한 상태에서 불투명 재료로 바꾸었을 때 그 혼란스러움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는 그와 같은 혼란스러움을 어렵지 않게 극복할 수 있었다. 불투명 재료인 유채가 표현하기 어려운 수채화의 표현적인 특징을 받아들임으로써 간단히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수채화에 한정하는 초기작품은 정물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전통적인 도자기와 토기 그리고 오래된 생활기물을 중심으로 하는 소재는 대체로 무거운 분위기에 갇혀 있었다. 역시 소재 탓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우선 색채이미지에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수묵화의 선염기법에서 응용한 독특한 번짐기법을 적용함으로써 수채화의 표현영역을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번짐기법은 붓 자국을 남기지 않고 물감과 물 그리고 종이가 가지고 있는 물성에 따른 우연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현대미학과의 접목으로 이해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명확한 형태감각과 선명한 음영의 표현은 그의 미적 감수성이 얼마나 첨예한 촉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확인시키려는 듯했다. 이미 이 때부터 그는 타고난 재능과 미적 감수성으로 수채화 작가로서의 견고한 입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에서 정물의 배경에 추상적인 이미지를 도입, 시각적인 긴장감을 높이는 화면구조를 모색하게 된다. 사실적인 형태와 자유로운 추상적인 이미지의 대비는 의외로 긴장감과 함께 화면에 활력을 불어넣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화면구조의 설정은 유채화 작업으로 이어진다. 유채화 작업에서는 종이의 바닥이 드러나는 수채화의 투명성과는 다른 질감표현이 가능해짐으로써 사고의 깊이를 추구하는데 효과적이다. 무엇보다도 심도 깊은 공간표현에서 의식의 심화를 실현할 수 있었다. 특히 거친 터치의 추상적인 이미지의 대입은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의 세계까지를 드러낼 수 있다는 면에서 주목할만한 일이었다.
이후 그는 인물화와 풍경화에로 점차 영역을 확장해가게 된다. 정물화에서 익힌 조형 감각은 인물화와 풍경화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풍경화를 시작하면서 자연광에 따른 색감 및 명도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보다 명료한 형태묘사 및 극적인 명암대비로 이행하면서 밝고 경쾌한 정서를 구축해가게 된 것이다. 자연광에 과다하게 노출될 때 명암은 전통적인 사실주의 미학이 지향하는 조형적인 관점보다 훨씬 극렬해지게 된다. 이처럼 과다한 자연광의 효과를 받아들임으로써 그의 그림은 실제보다도 맑고 선연하며 선도 높은 이미지, 즉 ‘깨끗한’ 인상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그의 유채화는 확실히 수채화적인 감수성에 빚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채화 특유의 질감을 상실했다거나 깊이가 없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그는 유채화가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이미지로서의 깊이와 무게 그리고 두께를 부단히 의식하면서 작업한다. 이로써 수채화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질감표현에 비중을 두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시각을 반영하다. 여기에서 말하는 질감이란 붓 자국을 선명히 남길 정도의 물질의 존재감이 아니라, 캔버스의 존재를 감지할 수 없도록 하는 유채 자체의 불투명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유채를 바르기만 하면 질감이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물감의 존재성과 캔버스의 존재성을 동시에 사라지게 만드는 질료적인 효과야말로 유채화에서 말하는 질감의 의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유채작업에서 질감이 중시되는 것은 물감의 존재성을 거의 감지할 수 없을 만큼 밀착된 표면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물감과 캔버스가 일체가 되다시피 함으로써 가능한 밀착된 표면구조는 수채화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밀착된 표면구조는 당연히 유채물감의 존재감이 끼어 들 수 없을 만큼 치밀한 묘사력에 의해 지탱된다. 극렬한 사실적인 묘사에 치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의 작업방식으로서는 적어도 캔버스와 물감이 유리되는 상황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캔버스의 존재가 사라지는 상황을 전제로 할만큼 극명한 사실성을 추구함으로써 캔버스와 물감이 일체가 되는 길을 상정하기에 그렇다. 만일 그의 작업에서 질감을 느낄 수 없다면 화면은 사진작업과 같은 무기질적인 차가움만을 느끼게 될 것이다. 따라서 화면의 질감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의 신체적인 기능이 만들어내는 즉, 온기가 느껴지는 일종의 그림으로서의 피부인 셈이다.
이때 그림의 피부에 인화되는 사실적인 이미지는 현실과 허구를 분간키 어려운 극명한 사실성의 경계를 지난다. 이쯤 되면 그의 그림과 마주하고 있는 감상자는 시각적인 혼란과 직면한다. 실제와 일루전의 경계를 분별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그의 묘사력이 신체적인 기능의 한계점까지 도달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뿐더러 물상의 형태를 인지하고 그를 재현하는 눈이 얼마나 정확한가를 뒷받침한다. 물론 보이는 사실에만 집착한 나머지 사실과 환영의 경계를 분간하지 못하는 일은 없다.
우리가 그의 그림에서 보고 있는 것은 현실세계임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일루전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실제를 빙자한다고 할지라도 캔버스는 어디까지나 그 자신의 주관 아래 전개되는 허상의 세계일 뿐이다. 다시 말해 환영의 세계일 따름이다. 그런데도 그림과 마주하고 있는 순간은 물감이 만들어내는 환영임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의 눈을 의심스럽게 만드는 사실적인 이미지를 진실로 믿고싶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가 그의 그림 속에서 찾아내려고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그림은 우리가 기대하는 아름다움, 즉 실제보다도 한층 더 아름다운 세상을 실현하고 있다. 현실보다 한 차원 승화된 아름다움이 그의 그림 속에 기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그림이 아름답게 보이는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무엇보다도 채색의 채도 및 순도 명도가 높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그림의 첫 인상이 맑고 선연하며 정갈하게 보인다. 맑고 선연하며 정갈하게 보인다는 인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깨끗하다’는 형용사가 적절하리라. 티없이 깨끗한 이미지는 아름답다.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함을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상큼한 이미지는 시각적인 쾌적함을 가져다준다. 더불어 깨끗함은 시야의 전망이 좋기 마련이다. 전망이 좋으면 갑자기 시력이 향상된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 십상이다. 뿐만 아니라 깨끗한 이미지는 감정까지도 정화시킨다. 그의 그림이 가지고 있는 특징 가운데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깨끗함이다. 이와 같은 깨끗함은 물감의 채도 및 순도 그리고 명도가 높은데 기인한다.
여기에다가 그의 그림은 극명한 명암기법을 받아들이고 있다. 실제보다도 한층 강조된 명암처리를 통해 정화된 세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깨끗하다’는 인상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전통적인 명암기법은 대체로 어둡고 무거운 느낌을 주는데 반해 그의 그림은 경쾌하고 발랄한 느낌의 명암기법을 채택한다. 전통적인 명암기법은 형태의 입체감을 강조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그 또한 이러한 요구에 충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명암에 대해 좀더 적극적인 사고를 하게 된 것이다. 명암의 효과를 극대화함으로써 새로운 해석의 조형적인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로써 그의 그림은 형태의 윤곽에 날이 선 듯한 선명한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기에 명암의 대비로 인한 시각적인 효과는 극적이다. 명암의 경계가 너무 명료한 나머지 시각적인 긴장감이 감돌 정도이다. 하지만 대립적인 관계로서의 명암이 아니라, 이미지의 명료함 즉, 형태의 명확성을 위한 명암으로서의 기능을 가진다. 이렇듯이 극적인 명암대비는 이미지의 해상도를 높이기 마련이다. 마치 아날로그 사진에서 디지털 사진을 보는 듯한 해상도의 증가치를 경험할 수 있다. 이는 반드시 명암대비의 효과만은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색채의 순도 및 명도를 극적으로 높인 결과의 하나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극렬한 사실적인 그림에 대해서는 사진에 비유하는데, 인간의 눈과 손의 기능은 광학렌즈의 기능을 훨씬 상회한다. 광학렌즈는 확대될수록 형태의 선명도가 떨어지게 되어 있는 반면에 그림은 크기가 커질수록 더 섬세하고 명료한 형태해석이 가능하다. 그의 그림을 통해 느끼는 감동은 일차적으로 이 부분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명암기법은 단순히 형태의 입체성을 표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표현적인 언어의 하나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미적 감각은 빛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는 자연광을 보다 실제적으로 이해하고 응용한 결과이다. 특히 꽃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 보여주는 그 빛의 존재성은 새삼 색채의 아름다움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일깨워 줄 정도이다. 그의 그림에서 빛은 언제나 과다하다. 억제된 빛이 아니다. 스스로의 흥취에 의해 넘쳐나는 빛은 아름다운 색채의 꽃들이 지닌 아름다움을 한껏 부추긴다. 그러면 꽃들 스스로가 환희에 들떠 빛의 아름다움을 노래한다. 빛과 색채의 화답이 그림을 생기 넘치게 이끌어 가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세상에 대한 긍정과 찬미의 노래이다. 일체의 부정적인 요소를 제거한 순수의 세계를 지향한다. 설령 옹색한 소재일지라도 거기에는 나름대로 아름다운 이미지가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그렇다. 소재 및 대상의 현실적인 모양이 어떻든 간에 일단 캔버스에 불러들이면 아름답게 변신한다. 타고난 재능과 미적 감각으로 물상에 마술을 거는 것이다. 그의 마술에 걸려든 모든 형태는 우리의 눈을 현혹하는 아름다움으로 치장한다. 그리하여 그가 이상으로 여기는 세상의 일원으로 편입된다. 아울러 우리는 그가 전하는 아름다움의 메시지를 수용하면서 감정의 샤워를 맛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쾌적한 정서를 만들어내는 그림의 설득력이다.
이렇듯이 그는 우리로 하여금 넘치는 빛과 솔직하면서도 아름다운 색채의 조화를 통해 세상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다. 실제의 사실을 실제보다 더 아름답게 재현하는 그의 조형감각은 삶에 대한 총체적인 긍정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눈에는 세상은 참으로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곳이다. 그의 그림은 우리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2005년 선화랑 초대전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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