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길

명작의 길 (21) - 강관욱

펜보이 2008. 2. 20. 09:58

 

 

 

  강관욱의 작품세계

 

  시대감각 및 시대정신을 구현한 진정한 사실조각

 

 

  신항섭(미술평론가)


  예술은 과학과 달리 진보 또는 발전 발달의 개념을 적용할 수 없다. 원시예술보다 현대예술이 진보했다거나 발전 발달했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와 같다. 미술의 표현양식이 시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형태상의 변화일 뿐, 예술이 추구하는 가치 자체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의 다양한 표현양식이나 형식은 작가 개개인의 창의성 및 시대적인 미감의 변화에 따른 얼굴 바꾸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예술의 본래적인 가치가 위협받아 왔다. 순수미에 대한 시각이 변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1세기 이전의 사실주의 미학을 어느 누가 간단히 진부하다고 말할 것인가. 미의 본질, 즉 미의 진실은 시간 및 공간을 초월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각이 틀리지 않다면 진정한 예술적 가치는 자기확신 및 신념을 버리지 않는, 장인적인 기질의 예술가로부터 여전히 그 또 다른 가능성이 열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강관욱은 자기확신 자기신념에 투철한 조각가이다. 그는 스스로 예술가이기에 앞서 장인이라는 사실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 어떤 형태의 작업을 하든 조각가임을 자처한다면 먼저 장인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 조각가는 일단 손의 기능이 귀신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귀신같다’는 말은 사실적인 묘사력에 관한 한 거칠 것 없는 자유자재한 솜씨를 뜻한다. 강관욱은 적어도 조각가로서 필요한 손의 기능이 이미 그 극점을 넘어섰다. 실제를 그대로 재현하는 일은 물론, 조형적인 상상력이 허용하는 비실제적인 이미지까지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손의 기능을 완결했다.

  이와 같은 장인적인 솜씨는 타고난 재능과 부단한 기능의 숙련을 위한 인체소조를 통해 이루어졌다. 거기에다가 석조, 즉 돌 조각에 필요한 기능 및 기술을 완벽하게 손에 붙였다. 한마디로 돌을 흙 주무르듯 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솜씨를 기초쯤으로 여기는 작가들이 적지 않다. 기능의 완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깨닫지 못하고서 큰 작가가 되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손의 기능을 완성하는 일이야말로 조각가로서의 윤리성이다. 조각가로서의 윤리성에 충실함으로써 그는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적어도 손의 기능이 미숙하여 상상력을 제한 받는 일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가적인 태도는 언제나 겸허하다. 스스로의 재능을 과신하지 않을뿐더러 비현실적인 이상을 꿈꾸지 않는다.

 

                

 

  그의 조각은 항상 현실인식 위에서 출발한다. 현실은 그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적인 공간을 의미한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회인의 한 사람이라는 인식이야말로 그 자신이 추구하는 사실주의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을 객관화하는 냉철한 이성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현실을 뛰어넘는 비실제적인 세계를 꿈꾸지 않으려는 것이다. 감성의 과잉을 억제함으로써 이성적인 판단이 명확하게 된다. 그의 작가의식은 사물을 과학적으로 이해 분석하는 이성적이고 이지적인 눈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꼼꼼히 본다는 것은 단순히 사물의 외형에 대한 이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물의 형태를 정확하고 명확하게 인지하는 능력은 완벽한 손의 기능을 뒷받침한다. 뿐만 아니라, 사물을 정확하고 명확히 보는 능력을 통해 구조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또한 구조적인 이해력은 비례 균제 조화 통일 등의 조형적인 요소에 대한 감각 및 판단력을 높여준다. 즉, 사물에 대한 진지한 관찰 및 사물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손의 기능을 숙련하는 과정에서 미적인 안목이 열리는 것이다.

  강관욱의 작품은 눈에 보이는 사실을 정확히 재현한다. 작품성 이전에 기능적인 완벽성으로 사물을 실제에 가깝게 만들어낸다. 자연에 대한 정확한 모방은 조물주의 창조적인 원리에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 된다. 비록 그 외형으로나마 창조적인 원리를 터득하게 되면 자연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는 눈을 갖게 되는 일이나 다름없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은 자연을 빙자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자연스러움에 육박하고 있다고 할까. 도무지 꾸미지 않은 듯한 자연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무생물로서의 돌이 아닌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숨결이 감지된다. 생명감, 그것은 사실성과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 그의 작품에서 인물은 마치 살아 숨쉬고 있는 듯 착각하게 될 만큼 실제적이다. 이와 같은 사실성은 무엇보다도 귀신같은 솜씨의 산물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회화이건 조각이건 실제처럼 보이도록 눈을 속이는 일은 숙련된 손의 기능으로 어느 정도 가능하다. 하지만 감상자가 작품에서 실제감, 즉 사실성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란 쉽지 않다. 어떠한 인물, 어떠한 형태이건 간에 꾸밈이 있으면 사실성으로부터 멀어지기 마련이다. 사실조각에서 감동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것은 짐짓 실제보다 과장되게 꾸미려 하는 데 연유한다. 꾸미려 하는 마음은 의식적인 것이다. 의식적이면 작업에 몰두하지 못하게 된다. 반면에 꾸밈을 덜어내고 작업의 순수성에 몰입하게 되면 스스로를 잊게 된다. 즉, 무아의 경지에 들어가게 된다. 무아의 경지에서는 꾸민다는 일 따위는 의식할 수 없다. 꾸민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기에 자연스러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스러움은 사물에 대한 면밀한 관찰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특히 그의 경우처럼 사실주의 작업에서는 치밀한 관찰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관찰을 통해 실제에 육박하는 형태감각을 익히게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일부러 꾸미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실제작업에서는 대상을 눈앞에 두지 않고, 단지 데생만으로도 실제처럼 재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조형적인 사고 및 손이 자유롭게 된다. 사물의 형태를 정확히 꿰뚫을 수 있는 안목이 갖추어지면 그 다음에는 그 내면을 투시할 수 있게 된다. 그의 조각에서 시각으로 인지되는 것 이상의 실제감, 즉 생동감을 느낄 수 있음은 우연이 아니다. 표현대상의 감정은 물론이려니와 그 의지까지 읽어냄으로써 생동감을 표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돌 조각은 언제나 소조로써 시작된다. 그 이전에 작품의 내용을 구상하고 포즈를 정한 다름 에스키스에 들어간다. 에스키스를 바탕으로 소조작업을 한다. 때에 따라서는 테라코타로서 완결하기도 한다. 그러나 돌(대리석, 화강석 따위)조각은 소조작업에서 석고로 모델링 작업을 한 뒤 돌에다 옮기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강관욱의 작품 중에서 인물상의 대다수는 직업적인 모델이 아닌, 그 자신의 일상적인 생활권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직업적인 모델과는 다른 자연스러운 포즈와 표정을 얻을 수 있다. 직업적인 모델이 만들어내는 포즈는 상투적이어서 자칫 식상하기 쉽다. 무엇보다도 생동감의 표현에 장애를 느끼기 십상이다. 표현대상의 감정이 움직이지 않기에 부득이 꾸미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부딪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든지 미술은 감동의 표현이 아니면 안 된다. 자기감동에 의해 자극되는 창작충동 및 욕구를 통해 작업행위가 이루어질 때 진실한 표현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 진실을 추적하기 위해 그는 비직업적인 특정 모델을 집중적으로 탐닉하고 있는지 모른다. 모델이 많을수록 작품이 다양해질 수 있음을 알면서도 특정 모델에만 천착하는 이유는 분명히 있다. 미적 가치란 작품의 다양성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님을 직시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면에서 특정 대상만을 집중적으로 탐한다는 것은 그 영혼까지를 드러내려는 의지의 한 표현이 아닐까. 실제로 십 수년간 그의 작업에서 일관성 있게 등장하는, ‘할머니’를 대상으로 한 작품이 보여주는 사실성은 감정표현이란 점에서 다른 인물상보다 더욱 실감 있게 느껴진다. 그에게 ‘할머니’는 모델이라는 피상적인 존재 이상의 인간적인 친숙성으로 다가온다. 그가 할머니를 모델로 작업하려고 결심하게 된 동기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즉 꾸미지 않는 순수한 상태의 표정 및 자태를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직분에 충실하면서 모든 일에 감사해 하는 진실한 인간의 모습이 그를 사로잡은 것이다. 예술적인 영감을 믿는다면 ‘할머니’는 바로 그 영감의 제공자인 셈이다. 그저 평범한 소시민일 뿐인 노인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 속에서 불현듯 숭고한 아름다움을 발견했고 그러한 감동이 창작욕구를 자극했던 것이다.

  고난의 세월을 말해주는 깊은 주름살과 마른 젖가슴은 그대로 순수한 영혼의 얼굴임을 그는 작가적인 본능으로 직감했다. 스스로를 드러내는 데 전혀 불편해 하지 않는 ‘할머니’의 그 순수한 영혼에 감화됨으로써 비로소 그토록 갈구해온 한국적인 조각의 순수성과 조우할 수 있게 됐다. 다른 영혼을 사로잡을 수 있는 힘이 없는 영혼이라면 결코 예술적인 표현대상이 될 수 없다는 신념이야말로 그가 지향하는 조형세계의 핵심이다. 아름답다는 것은 진실이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진실은 아름다움의 허상일 수 있다. 시각으로 인지되는 아름다움이란 허상인지도 모른다. 그 허상을 좇을 바에는 차라리 비뚤어진 형태 내면에 침잠한 진실에 시선을 돌리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다. 그가 볼품없는 노구를 표현대상으로 설정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내면 읽기’를 통해 감전되는 아름다움에의 감동, 그 실체를 찾고자 한다. ‘할머니’의 모습에는 통속적인 의미에서의 아름다움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그가 아름다움이라고 여기는 것은 인간의 순수한 내면을 울리는 감동의 언어이다. 시각적인 즐거움보다는 내면세계를 감동시키는 요소, 그것이 곧 아름다움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다른 시각의 모델, 일테면 어린이와 10대 소녀를 대상으로 한 작품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점차 쇠진하는 노인과 달리 한창 성장하는 어린이에게서 느끼는 ‘예쁘다’라든가, ‘귀엽다’라는 감정은 아름답다는 일반적인 개념과는 다르다. ‘예쁘다’ ‘귀엽다’는 느낌은 아름다움의 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예술적인 본질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 그 뿐인가. 남자를 대상으로 한 작품 또한 ‘아름답다’는 일반적인 개념과는 거리가 있다. 그렇지만 남자의 인체에서 느끼는 힘은 아름다움의 한 부분일 수도 있다.

  강관욱이 추구하는 조형적인 아름다움은 시각적으로 인지되는 사실에 대한 감동을 거쳐 도달하는 그 이면에 자리하는 ‘영혼의 울림’을 의미한다. 물론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소재나 대상에서도 궁극적으로는 내면의 감동, 즉 영혼의 울림을 추구하게 된다.

  그는 자기 작업을 ‘자생조각’이라고 부른다. 누군가로부터, 그리고 어디에선가 온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의 동인에 의해서 이루어진 조각이라는 뜻이다. 또한 ‘자생조각’이란 서구인의 인체비례에 따르는 서구조각의 조형개념이 아닌, 한국인의 인체 비례에 바탕을 둔 한국조각을 말한다. 비록 한 작가로 성립되는 과정에서는 서구미학을 그대로 받아들였을망정 작가로서의 의식의 개안이 이루어진 후 ‘내 것 찾기’에 시선을 돌리게 됐고, 교육의 효과에 따른 습관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눈’으로 세상을 응시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자생조각’이라는 개념을 얻기에 이른다.

  한국인의 미의식 및 미감에 의해 만들어지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한국인상’을 정립하겠다는 것이 자생조각의 발원이다. 이러한 생각은 이론이 아닌 실제를 통해 어렵지 않게 구체화될 수 있었다. 물론 ‘자생조각’의 개념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오랜 동안 각고의 노력이 있었으리라는 사실을 예상할 수 있다. 자신은 물론 제삼자로부터 ‘자생조각’의 그 실체가 객관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그는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자생조각’의 조형개념을 구체화시켜야 했던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한국인은 서구사상에 감염된 흔적이 없는 토종의 순수성을 간직하고 있는 얼굴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바로 ‘할머니’에게서 그 전형적인 형상을 발견하게 됐다. ‘자생조각’은 바로 이 지점에서 그 실제적이며 구체적인 개념이 정립되기에 이른다.

 

                               

 

  그러기 전에도 그는 이미 현존하는 삼국시대로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는 다양한 돌 조각을 보면서 그 맥을 잇겠다는 원을 세웠다. 대학 졸업 후 6년만에 마련한 첫 번 째 개인전(1981. 10. 문예진흥원 예술원)에서 벌써 한국인의 생활정서를 내용으로 하는 작품을 보여주었다. ‘소복’이라는 명제로 일관하는 연작을 통해 그는 한국인의 삶의 정서가 담긴 내용을 서정적인 이미지로 표현했다. ‘망부석’ ‘길’ ‘생’ ‘소녀’ ‘흥부’ ‘아지랑이’ ‘입문’ ‘상흔’ 등의 부제가 시사하듯이 한국 여성의 애틋한 정한을 내용으로 한 작품들이 대다수였다. 어딘지 외롭게 보이는 모자상을 비롯하여 남편을 기다리는 망부상, 길 떠나는 소년상 들의 이미지에서는 한결같이 한 수의 서정시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든다.

  ‘소복’이라는 명제는 순수 순결 순종 체념 고요 기다림 등의 정서를 포괄한다. 한마디로 순종을 미덕으로 여긴 한국여성의 삶의 애환을 은유하고 있는 명제이다. 그러면서도 거기에는 애조가 깃들이고 있다. 애조는 슬픔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아름다움에 가깝다. 애조는 곧 애틋함이다. 가여움에 따스한 정을 주고 싶어지는 그런 감정을 유발한다. 정을 유발하는 이미지는 아름답다.

  강관욱은 이렇듯이 한국인의 삶 속에 면면히 흐르는 정서를 기반으로 하는 ‘소복’ 연작으로 이미 그 자신의 앞길을 예고했다. 한국인의 삶의 정서를 조형의 테마로 삼고자 하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두 번 째 개인전인 1985년 11월의 롯데화랑 초대전에서는 이전의 ‘소복’ 연작과 함께 ‘구원’ ‘화물’이라는 새로운 제재가 등장한다. ‘화물’ 연작은 인체 토끼 도자기 등을 보자기에 싼(묶어 맨) 모양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간단히 손에 들고 갈 수 있는 상태의 물건을 ‘화물’이라는 명제로 통합하고 있다. 

  생물이든지 인조물이든지 간에 보자기에 묶여진 모양은 구속감, 부자유를 상징한다. 더 이상 자신의 의지를 과시할 수 없는 한계상황을 시사한다. 타의에 의해 행동을 제약받는다는 것, 즉 자의에 의한 행동이 억압받는다는 것은 묶여진 채로 누군가에 의해 끌려가는, 또는 실려 가는 ‘화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상황을 전제로 한다. 자아를 상실하면 그것은 생명을 상실한 피동적인 존재에 그치고 만다는 자각이 담긴 작업이다. 다시 말해 ‘화물’ 연작은 진정한 자아의 회복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구원’ 연작은 오늘까지도 변함없는 주제이다. ‘구원’은 결론적으로 현실세계의 승화를 의미한다. 억압받고 핍박받는 인간의 영혼은 물론이려니와, 아픔을 모르는 무감각한 인간의 영혼 또한 영원한 구원의 세계로 승화시킨다는데 그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영혼의 울림’을 감동의 메시지로 전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여기에서도 그는 작품의 형식을 통해 거창한 주제를 부각시키지 않는다. 소박한 우리들 삶의 주변에서 흔히 목격되는 일들 및 그와 관계된 사람들의 개인사적인 내용을 형상화할 뿐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 대다수는 아주 낯익고 친숙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미 언급한 ‘할머니’를 대상으로 한 작품을 포함하여, 어린이들과 소녀, 그리고 일(노동)의 아름다움을 형상화한(손을 소재로 한) 작품 모두는 보는 순간 금세 친숙함을 느낄 수 있다. 마치 얘기를 건네면 금방이라도 반응을 보일 것만 같은 실제감으로 충만하여 한층 실감나게 다가온다. 인물을 대상으로 한 ‘구원’ 연작은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그 편안함이란 다름 아닌 강관욱이 목표하는 구원의 메시지에 대한 감정반응인 것이다. 바꾸어 말해 그의 작품을 통해 인간으로서의 순수성을 회복하고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써 우리의 영혼은 구원받는 것이 된다.

  ‘구원’은 작품 자체의 목표는 아니다. ‘구원’은 작품과 마주하는 사람의 아픈 감정, 또는 무감각한 감정을 일깨워 주는데 기능하는 조각의 내적인 외침이자 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초월한 이상세계를 구현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우리가 존재하는 현실에 대한 실제감정 및 현실조건에의 반응을 기대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그의 조각은 결코 허황하지 않다. 언제나 실제적이기 때문이다.

 

                               

 

  그의 조각이 지시하는 내용은 현실인식과 함께 한다. 형태상으로야 소박한 ‘할머니’의 모습에 지나지 않으나, 그 ‘할머니’의 외적인 이미지 속에서 감지되는 내적인 정서는 우리들의 현실상황과 관계가 있다. 가령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이 전개되고 있을 무렵의 작품에서는 그와 같은 현실상황에 대한 작가적인 고뇌가 ‘할머니’의 형상 속에 은유되고 암시된다. 그의 조각에서 유심히 보아야 할 부분은 그 인물이 처한 상황이다. 인물의 형태(포즈)는 그 인물이 처한 현실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현실상황은 포즈와 함께 인물의 표정 속에도 함축적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할머니’를 대상으로 한 ‘구원’ 연작은 특정 모델을 포즈만 바꾸어 반복적으로 작업함으로써 소재주의에 빠져 단조롭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작품 하나 하나가 가지고 있는 상황과 그에 따른 작품의 내용은 저마다 다르다. 항상 변화무쌍한 인간의 내면세계를 투영하고자 하는데 따른 결과이다.

  최근(1990년대 초반) 동안의 작품은 왠지 차가운 무기질의 조각처럼 생각되지 않는다. 그가 일어서라고 하면 곧바로 발을 떼고 입을 열 것만 같이 생생한 모습이다. 이제 그는 돌의 표면에 체온을 불어넣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는 느낌이다. 표면처리에서 생명의 리듬을 실현한 것이다.

  ‘釘정’은 그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짚어낼 만큼 능숙하게 반응한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준다는 말이다. 사실 조각의 힘은 여기에 있다. 마음의 움직임을 따라주는 손의 기능이 한없이 자유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작가의 의지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에 취할 만큼 명료하면서도 날렵하게 움직이는 손의 기능은 사실 조각의 내부를 떠받치는 견고한 힘이다. 인체조각의 피부가 호흡하고 있다. 작품을 에워싼 주변 공기가 미동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다. 그는 조각의 내부로부터 차 오르는 생명감을 조각의 피부에 골고루 분사시키고 있다. 하지만 조각의 표면은 거칠다. 무수한 정 자국이 피부를 감싼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피부가 거칠기에 오히려 생동감이 배증하는 역설의 논리를 보여주고 있다.

 

  

 

  샌드페이퍼를 이용한 표면연마는 인체의 피부와 같은 부드러움을 만들어내는 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표면연마는 자칫 인체의 피부를 질식하게 만들기 십상이다. 조각에 생기를 불어넣는 음영이 자리할 곳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전래의 한국 석 조각은 모두가 정 끝으로 마감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표면을 연마함으로써 곱지 못한 국산 돌의 속내가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보다 직접적인 이유는 거친 묘면 질감이 지어내는 표정의 풍부함을 중시한데 있지 않았을까. 음영이 들어설 수 있는, 그래서 생동감이 감지되는 살아 있는 표정을 부여하기 위함이리라. 어쨌든지 그의 작품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의식적으로 표면연마를 지양하고 있다.

  흙의 순수성을 살린 테라코타의 그 표면질감과 다름없는 피부, 그래서 한결 인간적인 따스함을 느낄 수 있는지 모른다. 거친 표면처리는 사실조각이 마련할 수 있는 정신의 여백일 수도 있다. 완벽함에 이르기 직전의 단계에서 멈추는 아쉬움인 동시에 숨통을 열어주는 여백이기도 한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표면을 매끈하게 연마했다고 가정하자. 그 순간 친숙함은 반감하고 말리라. 한국인의 정서는 완벽함보다는 조금은 모자라는 데서 위안을 느껴 왔다. 이렇듯이 ‘구원’이라는 명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또한 정신적인 위안이다.

  강관욱은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또 다른 변화를 모색해 왔다. 그 변화란 표현영역의 확장쯤으로 받아들여도 좋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신과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관계’를 해명하는 조형작업이 그 하나요, 한국인으로서의 역사인식을 보여주는 작업이 나머지 하나이다. ‘신과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관계’를 표현하는 작업은 그 소재 및 대상이 인간에서 자연으로 옮겨간다. 실례로 바다에서 일어나는 파도의 이미지를 표현한 작품은 자연현상을 돌에다 고정시키는 작업이다. 여기에서 그는 자연현상을 신성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 신성을 형상화하는 것으로써 창조적인 원리에 도달하고자 한다. 한 순간을 포착하는 기술은 인간의 시지각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설령 사진으로 순간의 이미지를 잡아낸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지나간 시간 속의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오랜 관찰과 사색으로 자연의 창조적인 신비에 접근해 들어가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 하나의 결실이 ‘포착된 순수형태’, 즉 파도를 형상화한 작품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역사인식에 근거하는 다른 형태의 작업은 극적인 요소가 강하다. 36년간 일제치하에서 핍박받은 한국의 젊은 남녀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 일본인들의 발길에 짓밟히는 굴욕적인 남자의 모습이라든가, 일본군에 의해 정조를 유린당하는 꽃다운 젊은 여성들의 처참한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이 그것이다. 그리고 거역할 수 없는 억압적인 힘에 굴종하게 되는 ‘민초’들의 모습도 생동감 넘치게 묘사된다. 비록 그 자신이 실제의 역사현장에는 없었을지라도 예술가로서의 사회인식 및 역사의식으로 한 시대의 아픔을 증거로 제시하려는 의지의 소산인 것이다. 이와 같은 작품에서는 저항정신이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감정을 극도로 절제한다. 작가의 흥분된 감정이 노출되면 작품으로서의 생명력이 식어버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식이나 사회인식이 그에게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어찌 보면 초기작업부터 일관된 관심사였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 표현하는 어법이 간접적이고 우회적이었기에 쉽게 읽혀지지 않았을 따름이다.

  강관욱은 예술이란 어디까지나 예술로서의 형식미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음을 신념한다. 그가 생각하는 예술적인 형식미는 조형적인 완성도가 높은 순수미의 발현에 있다. 순수미 속에 역사의식 및 사회인식이 내용으로 담기는 것이다. 이제까지 살펴보았듯이 작품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의 작품 속에 담긴 메시지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예술의 완성이란 모름지기 표현하는 자와 감상하는 자 간의 끊임없는 탐색과 대화라는 소통의 기능을 통해 성립되는 것이다. 일방적인 강요나 자의적인 이해 및 해석으로는 예술의 참가치가 구현되기 어렵다. 강관욱은 척박했던 한국 사실주의 조각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았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한국 사실주의 조각은 그로부터 열리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실조각의 궁극은 무엇일까. 그는 변할 수 없는 이 하나의 이 의문을 끌어안고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인내하며 시험하고 있다. <강관욱 화집, 2000년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세미나를 위해 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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