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길

명작의 길 (18) - 유만원( 劉曼文)

펜보이 2007. 10. 30. 07:52

 

        

    

 

  

유만원劉曼文의 풍경화


서정적인 문체와 지적인 해석의 조화


신항섭(미술평론가)



아름다운 자연풍경과 마주했을 때 대다수의 사람은 그림으로 옮겨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된다. 이렇듯이 그림에 대한 욕구는 거의 본능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순간에 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아름다움을 영속시키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다. 하지만 자연의 아름다움을 옮기는 데는 기술과 열정이 필요하다. 여기에 화가의 존재가치가 있다. 그런데 화가는 그 아름다움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예술적인 가치로서의 창작이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劉曼文도 화가로서의 직분과 의무는 다름 아닌 개별적인 해석에 있음을 동의한다. 개별적인 해석이란 이전의 누구와도 다른 형식미를 의미한다. 그러기에 주어진 현실, 즉 아름다운 자연과 마주하고서도 실제와는 다른 해석을 주저치 않는다. 그가 바라보는 자연은 아름답다는 일반적인 시각과는 확실히 다르게 보인다. 보이는 것을 그대로 나열하는 사실주의 기법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표현기법을 강구하는 까닭이다. 이는 창작의지와 관련한 문제로서 전혀 새로운 조형언어 및 어법을 모색하는 일이다. 따라서 그의 풍경화가 사실성을 극복하기 위해 시도하는 일련의 현대적인 조형어법은 그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도전이다.

그의 풍경화는 현실을 그대로 보려는 입장과 현실을 재해석하려는 입장을 동시에 수용한다. 화가의 눈에 비친, 사실의 기록이라는 사실주의 미학의 존재가치를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만의 조형언어 및 조형어법을 탐색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다양한 형식의 조형어법이 모색되고 강구되고 있다. 형태를 해체하여 재구성하는 작업이 있는가 하면, 힘차고 명확하며 속도감 넘치는 필치로 형태를 구체화시키는 작업도 있다. 또한 형태를 간명하게 압축하거나 생략 및 단순화시킴으로써 시적 정서가 포진한 서정적인 미에 도달한 작업도 있다.

 

 

특히 2000년도 초반에 시도된 일련의 풍경화는 개별적인 형식미의 가능성에 가까이 접근한 작업으로 관심을 모은다. 숲과 나무라는 지극히 단순한 소재를 가지고 다양한 조형적인 변주를 거듭하는 가운데 독자적인 형식미학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본다는 것만으로는 성립될 수 없는 형태의 파기 및 해체 그리고 재해석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그의 풍경화는 새로운 조형적인 변화를 거듭한다. 그 결과의 하나로서 추상적인 색채이미지 위에 도상화圖像畵한 나무줄기 몇 개를 제시하는 것으로 끝나는 작품은 현실감각을 떠나 개념적인 이미지에 도달하고 있다. 그렇지만 현대의 개념미술과는 다른 시각을 가진다. 오히려 모더니즘의 범주에 드는 작업으로서, 형태보다는 색채 포름 및 내적 감정을 표현수단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러한 작업은 이미 내면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을 취한다.

여기에서 그는 현실을 보고 묘사한다는 시각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실상으로서의 숲이나 나무는 하나의 지나간 시간의 경험에 불과할 뿐, 그의 조형적인 사고에 관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에 의지한다. 물론 숲과 나무라는 소재는 현실에서 취재된 것이니, 상상의 소관은 아니다. 이들 소재는 시지각을 통해 받아들인, 사물에 대해 축적된 과거의 경험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는 경험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잔상조차 버리고, 단지 그 자신의 미적 감수성에 의해 일깨워진 현실적인 창작의 영감에 의탁할 따름이다. 그리하여 그 영감이 지시하는 대로 현상이 아닌, 개념적인 혹은 내면적인 상으로서의 이미지만을 보여주는 셈이다.

                              

  

그에게 자연은 시지각의 대상에서 벗어나 응시하고 관조하는 대상이다. 보이는 사실로서의 자연은 그 자체로서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니, 사실적인 재현으로는 그 자신의 미적 감각이 관여할 여지가 없다는 생각인지도 모른다. 보다 창의적인 시각으로 자연을 응시함으로써 눈에 보이는 그 이면의 세계, 즉 그 자신의 미의식 및 미적 감정이 개입된 관념성이 짙은 자연을 보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성을 떠나 개념적인 이미지에 도달한 그의 풍경화는 실상으로부터 초연한 입장이다.

그에게 인식된 자연은 하나의 채색의 덩이 뿐인지 모른다. 다시 말해 전체상으로 인식되는 자연은 형태를 구체화시키지 않은 채 단지 색채이미지만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작업하는 과정에서 형체는 거의 드러나지 않고 색채이미지만이 출렁인다. 가령 숲을 표현할 때 녹색 계열의 색반이 어떤 정해진 규칙 없이 자유롭게 리듬을 타면서 화면을 채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최종적으로 나무 몇 그루 또는 나뭇가지 몇 개만으로 작업은 완결된다.

 

                        

  

이처럼 자연을 상징하는 나무와 숲은 그의 미의식 속에서 완전히 용해되어 전혀 다른 이미지로 태어난다. 조형적인 이념 및 사상 그리고 문학적인 감수성에 의해 실제와는 완연히 다른 이미지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 보이는 이미지는 관념의 유희가 만들어낸 이상적인 조형공간을 의미할 뿐이다. 현실로부터 연고성을 상실한 채 하나의 숲과 나무가 있는 이미지로만 다가올 따름이다. 하지만 그 숲과 나무는 철저히 관념의 옷으로 치장되어 있다. 그런데 그 관념의 옷은 새삼 현실의 숲과 나무와는 확연히 다른 정련된 미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인간의 미의식 및 미적 감각에 의해 인위적으로 꾸며진 세계는 감각적으로 느끼는 아름다움과는 다른 고차원적인 것이다. 자연미는 누구나 타고난 감각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지적 탐구에 의해 또는 탐미적인 시각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인 미는 누구에게나 이해될 수 없다. 더구나 거기에 화가 자신의 회화적인 이념이나 사상 또는 철학이 가미되는 경우 그 전체를 한눈에 조망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굳이 사실적인 형상을 버리고 추상과의 제휴를 통해 비자연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것은 역시 창작이란 새로운 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가 모색해낸 비자연적인 조형세계를 탐미적인 눈으로 보면 품격 높은 인위적인 미가 구현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화가에 의해 창조되는 조형적인 미란 자연에서 느끼는 아름다움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로부터 느끼는 미적 쾌감은 일종의 지적인 희열과 상통하는 것이다.

그의 풍경화는 타고난 미적 감수성으로 탐색한 자연미를 지적인 통찰에 의해 재해석해낸 창조적인 공간이다. 그 창조적인 조형공간에는 지적인 희열을 자극하는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의미가 포진한다. 형태를 억제한 추상적인 공간 속에 불현듯 존재하는 나무줄기는 마치 인간처럼 보인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그 나무는 현실의 나무와는 다른, 의인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무에서 인간의 형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파리 하나 없는 벌거벗은 나무줄기가 고적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풍경은 화가 자신의 내면세계를 투영한다. 물체가 선명치 않은 비구상적인 공간으로서의 숲에서 홀연히 존재하는 벌거벗은 나무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뇌하는 그 자신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그 자신의 내면을 반영한 결과로 이해할 수 있기에 그렇다.

 

  

그러면서도 그 풍경에서는 문학적인 서정미가 읽혀진다. 철학적이면서도 상징적인 의미를 함축하는 가운데서도 서정적인 시상을 유도하는 문학적인 정서가 내포하고 있는 까닭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시상을 함축하는 것은 시적인 감수성, 즉 문학적인 이해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단순히 보고 느낀다는 차원을 뛰어넘는 인간 삶의 문제가 은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주의 표현양식을 지양하여 독자적인 조형미를 추구하는 것은 그 자신의 내면세계를 그림 속에 투영시키고자 하는 욕망과 무관하지 않다. 동시에 개별적인 형식미를 실현하기 위한 일이다. 다시 말해 내용과 형식을 일치시키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조형언어 및 어법은 필수적인 것이다. 작품에서 감지되는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내용과 비구상적인 요소가 강한 조형적인 형식미는 현대미학의 개념과도 소통한다.

그의 풍경화는 이 시점에서 현대성이라는 문제와 관련해 그 하나의 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그 자신만의 형식미로 완결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유만원의 개인전은 11월14일부터 30일까지 상해 '木林(무린)畵廊'에서 열립니다>


<유만원은 하얼빈 출신으로서 노신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상해유화조소원1급미술사로서 중국미술가협회 회원 및 중국유화학회 이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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