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길

명작의 길 (16) - 고찬규

펜보이 2007. 10. 18. 22:52

 

 

고찬규 작품세계


삶의 진정성이 담긴 우리들의 초상화

 

신항섭(미술평론가)


 

서양미술사의 주인공은 인물화이다. 물론 풍경이나 정물도 한 부분을 차지하지만 인물화에 비하면 그 비중은 현저히 낮다. 영웅주의적인 서양의 인물화는 인간 삶의 역사를 반영한다. 현실, 즉 실상을 반영하는 초상화 형식은 물론이려니와, 서사시적인 기록화 형식에서도 인물은 그림의 주인공이 되고 세계의 중심이 된다. 세계를 움직이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당연한 자긍심의 발로이다. 그러나 개인중심으로 가는 현대사회에서 그림에 등장하는 인간의 모습은 외양보다는 내면에 집중된다.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의미를 두는 것이다. 따라서 실제보다 미화하거나 차가운 느낌의 사실성을 부각시키는 인물화와는 다른 형태해석, 즉 변형 왜곡 따위와 같은 조형어법이 필요하게 되었다.

고찬규의 인물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영웅주의적인 이미지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왜소하고 나약하게만 보이는 현대인의 일상적인 모습이 있을 따름이다. 사회구조가 전문화 세분화되고 있는 거대한 현대사회에서 인간은 그 공동체를 존재케 하는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그림에서 인간 개개인의 존재에 대한 영웅주의적인 설정방식은 이제 하나의 전설에 불과하다. 물론 현대사회에서도 영웅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쇼비니즘적인 허상일 따름이다.

 

 

그는 현대인물화는 무엇을 표현해야 할 것인가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영웅주의적인 삶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생활하는 소시민의 일상을 대상으로 한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 자신의 주변이나 오며가며 만나는 평범한 시민들이다. 어떤 특정인을 모델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한마디로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바로 우리 자신이거나 우리 이웃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 인물들은 반복적이고 연속적이며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분주한 현대사회의 한 일원으로 살아가는 소박한 우리들 초상인 것이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변함없는 일상적인 삶에 버거워하면서도 그저 현실에 순응해 가는 인간상이다. 영웅적인 존재성을 드러내는 특정의 직업으로 사회적인 위치를 누리는 존재가 아니라, 어디에서도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 익명의 인간들이다. 그들은 인간의 역사를 주도하는 위치에 있지도 않고, 그런데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그저 주어진 삶에 충실할 따름이다.

그가 이처럼 하찮은 풀잎처럼 살아가는 소시민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적어도 그들에게는 자신을 포장하거나 과시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일에 충실함으로써 그로부터 얻어지는 대가에 고마워하는 소심한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꿈과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결코 자신의 능력 밖의 터무니없는 망상으로 꿈을 부풀리는 짓 따윈 부끄러워하는 윤리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이다. 다만 현실적인 삶보다 좀 더 여유가 있으면 좋겠다는 정도의 꿈을 부둥켜안고 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을 포함하여 그러한 소시민적인 삶의 풍경 속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애정의 눈길을 보낸다. 애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소시민들에게서는 진정한 삶의 애환과 그 체취가 느껴지는 까닭이다. 위선이나 가식, 또는 자기과시가 없는 사람들은 속내를 외면에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일상적인 삶에서 비롯되는 희로애락의 감정이 표정과 몸짓에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것이다. 그의 시선은 바로 여기에 머문다.

 

 

예술로서의 가치는 영웅들이 아니라, 이 사회의 밑바닥을 형성하는 평범한 소시민의 내면세계를 탐조하는 데 있다는 판단인지 모른다. 실제로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캐릭터의 방향은 명쾌하다. 굳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인지, 사회적인 지위는 무언지, 생활수준은 어떤지 따위의 질문과는 상관없이, 한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잃지 않는 개개인의 일상사에서 묻어나는 내면을 선명하게 드러낼 따름이다. ‘환승’ ‘겨울날’ ‘불면도시’ ‘다시 혼자’ ‘혼자’ ‘봄비 그치다’ ‘무지개’ ‘첫눈’ ‘동행’이라는 명제가 시사하듯이 일상사와 거기에 반응하는 소시민들의 감정 및 행위를 낱낱이 드러낸다.

그렇다. 자신의 존재, 아니 내면을 숨길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그 소박한 삶의 방정식이 우리에게 새삼 뜨거운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는 현대도시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상사와 마주치면서 그때마다 거기에 솔직히 반응하는 소시민의 모습에서 진정한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세계를 그대로 묻혀내는 표정 및 몸짓은 현란한 색깔과 모양으로 치장한 꽃보다도 더 아름답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 표정 및 몸짓은 단지 시각적인 이미지에 그치지 않는 짙은 삶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에 흐르는 정서는 잿빛 현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이미지에 맞닿아 있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저마다 다른 직업과 환경 속에서 살지만 소시민이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그들은 어쩌면 그리도 하나같이 웃음을 잃은 굳은 표정으로 세상을 응시한다. 잿빛 도시를 덮는 우울한 그림자처럼 웃음이 가신 눈빛은 현대인의 고뇌를 상징한다. 그러나 그 눈빛은 아주 강렬하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많은 얘기를 은폐하고 있을 법한 미묘한 표정이다. 그들의 강렬한 눈빛은 누군가 특정인을 향한 시선이 아니라, 차가운 경쟁사회 그 심장을 관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익명의 존재들은 감정의 과잉을 허용하지 않는다. 존귀한 존재로서의 자존을 중시하는 까닭이다. 비록 현실이야 고달플지언정 사회를 향해 항변하거나 존귀한 자아를 울리는 자해행위는 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 부분이야말로 그의 그림이 숨기고 있는 메시지인지 모른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지표는 일상에의 충실함에 있다. 설령 생활이 순탄치 않아 고되고 외롭더라도 그 아픔을 함께 나눌 대상이 있다면 큰 위안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저마다 어려움을 안고 살아가기에 아픔을 공유할 대상을 찾는 일마저 힘이 부친다. 진정한 소시민적인 사고 및 태도는 타인에게 부담이 되거나 짐을 지우지 않는데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혼자이기 일쑤다. 더러 부부나 애인으로 설정되는 복수의 인물이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그 복수의 인물들조차 서로 간의 결속을 확신하지 못하는 듯싶다. 다시 말해 조건에 의해 맺어진 관계일지라도 결국은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자각이 팽배하다. 결코 기쁨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처럼 저마다 스산하고 망연한 시선으로 세상을 응시한다. 치열한 경쟁을 유도하는 현대사회는 함께 있어도 마음을 공유할 수 없는 그런 외로움을 강권하기 때문이리라.

 

             

 

그는 현대도시인의 일상사와 거기에 반응하는 감정세계를 서정적인 문체로 그려낸다. 구태여 상황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표정과 몸짓만으로도 능히 거기에 공감할 수 있다. 그의 그림이 이룬 조형적인 성과는 독자적인 형식미의 인물상을 확립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형태의 변형 및 왜곡을 통해 독특한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그 캐릭터의 이미지만으로도 거뜬히 그의 작품임을 알 수 있게 됐다. 이는 개별적인 형식미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인물이든지 거식증 환자처럼 깡마른 체구이다. 피골이 상접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마른 형의 인물의 캐릭터를 제시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각박한 현실에서 하루하루 고단하게 살아가는 소시민을 상징하는 이미지에 걸맞다. 그다지 생활의 여유도 없을뿐더러 사회적인 힘도 없는 평범한 샐러리맨을 포함하여, 노동자 장사꾼 등의 사회저변 계층의 인물들을 아우르는 이미지로서는 아주 절묘하다. 그렇다고 해서 신체적인 힘이 없는 병약한 모습은 아니다. 신체보다 큰 두상과 굳건한 골격은 오히려 강건한 인상을 준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너끈히 견딜 수 있는 잡초 같은 성격을 상징하는 것이다.

여기에다가 툭 튀어나온 광대뼈, 벌어진 미간, 조그만 눈, 명료한 눈동자, 치켜 오른 눈썹, 움푹 들어간 콧잔등, 하늘이 보이는 콧구멍, 갸름한 턱, 그리고 기다란 목으로 이루어진 얼굴은 전형적인 몽골계통의 황색인종이고, 또 한국인이다. 물론 오늘의 한국인 가운데 이와 같은 얼굴형을 가진 사람을 그다지 많지 않으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한국인의 얼굴의 특징을 요약하면 결코 이와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은 얼굴의 모양은 모든 인물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단지 얼굴을 구성하는 이들 요소가 어떻게 구성되느냐에 따라 개개인의 특징이 나타날 뿐, 그 나머지는 공통적이다.

  

             

 

이처럼 그의 미적 감각에 의해 재해석된 인물의 조형적인 특징은 개별적인 형식미를 떠받치는 힘이다. 그림이란 내용에 앞서 시각적인 이미지 예술이다. 형식이 온전하면 내용이 부실하더라고 큰 흠이 되지 않는다. 반면에 아무리 내용이 좋더라도 형식미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림으로서의 가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산출해낸 인물의 형식미는 독립적인 한 작가로서의 당당한 자기주장이자 설득력인 것이다.

독자적인 인물의 형식미는 10여년 가까운 세월동안 조금씩 진화를 거듭하는 가운데 마침내 최근에 완성되었다. 이미 10여년 전에 지금과 같은 새로운 해석의 인물상을 제시했었음에도 어딘가 미흡하고 안정되지 못했다. 지난 번 개인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러다가 이번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세련된 형식미로 발전시킨 것이다. 더구나 아주 세련된 색채이미지를 구사함으로써 인물이 가지고 있는 다소 경직된 이미지를 상쇄한다. 단지 인물만이 화면에 존재하는 데도 고상한 색채이미지로 인해 작품에 격조가 깃들이고 있다. 단색평면이라는 화면구조의 단조로움이 전혀 거슬리지 않을뿐만 아니라, 되레 고상한 색채이미지를 통해 탐미적인 즐거움을 맛보게 된다. 이렇듯 인물과 고상한 색채이미지가 조화를 모색하는 형식적인 아름다움은 눈 밝은 이들을 능히 매료시킬만한 지경에 이르렀다. 흔히 보기 힘든 미묘한 중간색조의 아름다움은 전통적인 채색재료가 아니면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새삼 분채라는 전통적인 채색재료가 가진 은은한 깊이와 아름다움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색채의 아름다움은 유채나 아크릴 물감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작업은 새삼 전통적인 채색재료가 가지고 있는 색채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고 있는 셈이다.

인물화에 대한 공부가 척박한 한국 화단에서 그의 작품은 미점과 같은 존재로 떠오른다. 자기만의 형식미를 갖춘 인물의 캐릭터를 만들어내기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그는 마침내 누구나의 가슴을 울릴 수 있는 친근한 이미지의 한국인상을 구현했다. 그 인물들의 표정과 몸짓에 깃들인 삶의 정서는 왠지 가슴을 아리게 만든다. 그야말로 삶의 진정성이 묻어나는, 우리들 초상화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고찬규 초대전"은 11월14일부터 30일까지 상해 '무린화랑'에서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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