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시평

미술시평 (18) - 아, 미술대전이여!

펜보이 2007. 8. 20. 08:35
 

  미술시평

 

  아, 미술대전이여!

 

  올해 구상계열 미술대전은 여느 해와 달리 수개월 앞당겨져 8월 삼복 더위 중에 열렸다.  11월에 열린 지난해에 비하면 무려 3개월이나 빠르게 열린 셈이다.  그러다 보니 1년 후 비슷한 시기에 열리겠거니 하고 여유를 가지고 준비를 한 출품자들은 적지 않게 당황해 하며 땀께나 흘렸으리라 짐작된다.  성격이 느슨하거나 발등에 불똥이 떨어져야만 부산법석을 떠는 작가들 중에서는 어쩌면 작품을 채 완성하지 못한 채 출품하거나 아예 출품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원칙론에서 말하자면 미술대전과 같이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열리는 공모전의 경우에는 되도록 날짜를 비슷한 시기로 맞추어야 한다.  이번과 같이 여름방학 중에 열리게 되면 학생들에게는 오히려 잘된 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꾸어 생각하면 전시 일정이 짧은 데다가 방학중에 열리기 때문에 가족들과 휴가를 떠난다든지 하는 이유로 관람할 기회를 놓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미술대전의 경우에는 어쨌든지 매년 비슷한 시기에 열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만 작품을 준비하는 출품자들이나 관람객들이 거기에 맞춰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이번에는 무엇 때문에 땡볕이 내려 쬐는 폭염이 계속되는 복중에 열리게 되었을까.  아마도 짐작컨대 국립현대미술관의 일정과 관련이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대한민국미술대전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지만 그 주최측은 한국미술협회이다.  따라서 미술대전을 위해서 미술협회가 국립현대미술관측으로부터 임대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국립현대미술관측의 사정에 따라 부득이 전시 일정을 매년 시기가 다르게 열리는 것이다.  그것도 한달 정도가 아니라 무려 한 계절이나 차이가 날 정도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정부산하 기관이고 미술협회는 사단법인이다.  운영비의 대부분을 문예진흥원으로부터 보조받고 있기에 미술협회를 반 민간단체 또는 반 관영단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국립현대미술관과의 협조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상식을 초월한 이번 미술대전의 일정변경도 이처럼 서로 간에 입장이 다른 관계에서 빚어진 문제인 것이다.  미술대전이 한국미술계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특별한 사정이 아니고는 가능한 한 전시 일정을 미술협회 측에 맞추어주는 것이 좋다.  그래야만 한국미술 현장의 상징처럼 인식되고 있는 미술대전이 안정된 여건 속에서 치러질 수 있다.

  미술대전을 주최하는 한국미술협회는 그 회원이 거의 2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매머드 단체인 것만은 분명하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는 속담처럼 그 많은 회원 숫자 때문일까.  참 말도 많고 탈도 많다.  특히 미술협회로서는 가장 큰 연례행사인 미술대전과 관련해서는 이런저런 말들이 많기도 많다.  매년 되풀이되는 일이지만 미술대전의 가장 큰 문제점은 불공정하고 부당한 심사로 모아진다.  그 진위야 어찌됐던 한국 미술현장의 상징처럼 인식되고 있는 미술대전이 불공정하고 부당한 심사로 얼룩진대서야 어디 될 말인가. 

  이번 구상계열 미술대전 공모전과 관련해서 심사위원에 참여한 작가 및 일부 작가들을 통해 들은 내용을 보자면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미술대전의 문제점으로 지적돼온 정실심사는 미술협회 측뿐만 아니라 공모전에 출품하는 일부작가들의 합작품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누가 누구를 탓하고 욕할 수도 없이 총체적으로 썩어 있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물론 수요가 있고 공급이 있어야만 상행위가 발생하듯이 정실심사 문제는 그를 필요로 하는 출품작가들이 존재함으로써 비롯된다.  반대로 일부 심사위원들이 자신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서 또는 금품을 취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출품작가들을 충동질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수요와 공급이 거의 동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열리는 각종 공모전의 경우 심사위원은 심사가 있기 전날까지 누가 선임되었는지 철저히 비밀에 붙여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일 심사가 있다면 그 전날 저녁에야 심사위원에 위촉되었음을 통보하고 참여 여부를 확인한 다음 확정짓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미술대전이 열리기 한 달 전에 이미 일부 심사위원이 내정되어 있다는 얘기가 돌았다.  심사위원으로 내정된 작가는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심사에 참여하게 되니 출품 준비를 해보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믿고 싶지 않은 얘기지만 심사위원으로 내정되어 있다는 작가의 이름이 실제로 한달 후 미술대전 심사위원 명단에 올라 있었다.  미술대전 심사위원은 미술대전 운영위원회를 결성하고 그 모임에서 심사위원을 선정하게 된다.  따라서 미술대전이 열리기 한 달 전에 이미 심사위원이 내정되었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한 달 전이라면 운영위원회가 구성되기도 전이기에 말이다.

  이번 미술대전에서 심사를 했던 한 작가는 자신이 심사위원이 위촉된 사실을 통보 받기 이틀 전부터 집으로 전화가 빗발쳤다고 한다.  ‘나는 아무개인데 잘 좀 봐달라’는 식의 비교적 신사적인(?)인 내용으로부터 ‘잘 되면 그 은혜를 잊지 않겠다’ ‘제발 좀 한번 살려달라’는 식의 애원조까지 다양한 전화내용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아직 심사위원으로 통보 받은 일이 없으니 아마도 잘못 짚은 것 아니냐’는 식으로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고 했다. 

  그런데 정말 심사가 있기 전날 미술협회로부터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으니 수락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심사위원에 참여하겠다고 수락의사를 밝힌 그날 저녁이 되자 이번에는 아예 집에까지 찾아와 만나달라는 사람이 여러 명 있었다고 한다.  바로 이러한 것이 미술대전 심사와 관련한 그 주변의 실상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미술대전에서 입상하겠다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과거 국전시절에 있었던 얘기다.  지금도 살아 계신 원로 한 분이 심사위원을 맡게 되었는데 전혀 알지도 못하는 젊은 작가가 집에 찾아와 돈 보따리를 내놓으면서 잘 좀 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원로는 입에 물고 있던 파이프로 머리통을 후려치면서 ‘그렇게 자신 없으면 애나 보지 여기는 왜 왔느냐’고 호통을 쳐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 후 그 젊은 작가는 개과천선했는지 어땠는지 모르지만 몇 년 후 큰 상을 받았다고 한다. 

  금품으로 심사위원을 매수하려는 작태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도 과거 미술대전은 입상자 숫자가 워낙 적다보니 입,특선 작가의 계보가 훤히 드러나는 판이어서 누가 누구를 봐주었다는 심증이 갈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입선작이 3백 점 내외에 이르고 특선만 해도 그 10%에 이르는 현재의 미술대전의 경우 심사와 관련한 비리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게 됐다.  그러다 보니 심사위원과 출품작가들간의 보이지 않는 거래가 훨씬 심각할 것으로 짐작하는 것이 미술계의 일반적인 관점이다.

  심사와 관련한 문제에서는 그렇다 치고 보다 심각한 문제는 미술대전이 한국미술의 흐름 자체를 왜곡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미술의 미래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미술대전이 한국미술의 미래를 암담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미학이 변하고 있다는 것은 미술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도 작가등용문 구실을 하고 있는 미술대전(특히 구상계열)은 도대체 변화가 없다.  전시 때마다 이런 사실을 지적해도 미술대전은 꿈적하지 않는다.  무언가 이번에는 볼만한 작품들이 있겠거니 하고 기대를 하지만 번번이 실망이다.  매년 보고 있는 작품들을 되풀이하여 보게 되는 것이다.  도무지 창의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구태의연한 양식 및 형식의 작품으로 도배하고 있는 것이다.  미술대전은 썩은 물이다.  거기에서 노는 물고기들의 미래란 빤한 일이다.

  미술대전은 신인의 등용문임과 동시에 기성 작가들에게도 한 단계 상승할 수 있는 기회의 문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미술대전에 출품하는 작가들의 숫자가 해마다 점증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신인의 등용문이어야 할 미술대전이 기성작가만을 위한 무대처럼 운영되고 있다.  다시 말해 참신한 신인이 출현하지 않는 대신에 기성작가들만의 경력 쌓기 무대가 되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도대체 새로운 기법이나 새로운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이 거의 눈에 띠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국전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몇 가지 스타일의 작업들만이 벽면을 채우고 있어 기성화단의 그룹전이나 다를 바 없다는 느낌이다.  왜 이래야 할까.  그리고 왜 이런 일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미술대전이 지향하는 이념적인 목표가 뚜렷하지 않다는 데 있다.  물론 미술대전이 신인작가의 등용문 구실을 한다는 점에서 보면 먼저 아이디어의 참신성과 함께 기술적인 완성도가 심사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대전에서 참신성은 심사기준에서 제외되고 있는 듯하다.  신인다운 패기와 도전적인 자세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무언가 다른 관점 및 시각이 반영된 새로운 형식의 작품을 받아들이지 않는 데 기인한다.  이것이야말로 미술대전의 고질적인 병폐이다.  수 백 점에 달하는 작품들이 몇 가지 형식 및 양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사실은 미술대전이 치유할 수 없는 중병에 들어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상황은 미술대전 출품자들에게 안일한 작업태도를 갖게 해줄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입선하려면 어떤 형식으로 작업을 해야 한다는 모범답안이 마련되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모범답안을 놓고 작업하다보니 수 백 점에 달하는 입선작들이 대동소이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마디로 해바라기성 작가들만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뿐만 아니라 이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입선작과 특선작을 비교해보면 입선작 중에는 새로운 시각을 가진 작품이 더러 눈에 띤다.  그런데도 형식이나 내용이 진부한 작품을 특선으로 밀어 올린다.  이런 식으로 운영하다보니 청운의 꿈을 품고 새로운 언어로 세상을 한번 들썩이게 만들어야 되겠다는 도전적인 젊은 작가들이 무참히 짓밟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미술대전이 썩은 물로 혼탁해지는 것이다.  몇 가지 한정된 양식 및 형식을 암시하는 듯한 현재의 미술대전 심사기준(?)이 고쳐지지 않는 한 ‘한국미술의 미래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몇 가지 스타일이라는 것도 자세히 보면 그중 대다수는 국내화단의 일부 그룹이나 몇 몇 중견 및 중진작가의 아류라고 할만한 조형적인 특색으로 보여준다.  가령 유화부문의 경우 사실주의 및 자연주의와 인상주의 형태의 해체를 통해 재구성한 작업, 반추상 형식의 작업 등 열 손가락에도 미치지 못하는 한정된 양식과 형식으로 좁혀지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에서는 이상을 꿈꾸는 작가의 상상력은 전혀 작동할 필요가 없게 된다.  상상력이 고갈된 작가에게서 그 작품에서 어떠한 조형적인 혁신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미술대전의 운영방식 그 자체가 작가의 창의적인 상상력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미술대전이 계속되는 것은 한국미술의 미래에 치명적이다.  미술대전이 다양성을 억제하고 획일화로 몰고 가는 한 거기를 통해 배출되는 작가들의 현재와 미래는 이미 정해진 사실이다.  개성을 죽이고 이름 한 줄을 얻기 위해 눈치나 보는 해바라기 작가가 되어 다시 그런 작가들을 만들어내는 악순환의 열차를 타는 것은 예정된 일이다.

  미술대전에 대해 존폐문제는 어제오늘 제기된 문제점이 아니다.  그럼에도 개선된 점은 하나도 없다.  그저 구습을 되풀이할 따름이다.  이는 일부 기성작가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치밀한 음모인지도 모른다.  한국미술의 미래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단지 미술대전과 이런저런 식으로 연관성을 갖고 해바라기 작가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이러한 무책임한 작가들 앞에서 한국미술계 전체는 그저 무력하기만 하다. 

  그래서 미술대전을 운영하는 미술협회의 무능을 탓하면 현 집행부를 반대하는 쪽에서는 맞장구를 칠 것이다.  그러나 반대쪽도 마찬가지다.  진정 미술협회와 한국미술의 미래를 걱정한다면 다른 거창한 공약은 말고라도 그래, 어디 획기적인 미술대전 운영 개선방안이라도 내놓아보기 바란다.  이런 미술대전이라면 더 이상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다. (신항섭)


 <"미술신문" 2000년9월5일(제249호)>